천국의 난민 문학동네 시집 49
윤의섭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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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갖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가지고 있지 않은 책.<천국의 난민>이라는 시집이 책이라기 보다 마치 내 주위를 맴돌고 있는 현실의 소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일까. 나는 너무 자주 읽어서 도서관에서 빌린 시집을 나 자신의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다. 바로 잠시 전까지도 말이다.  불현듯 윤의섭의 시집이 읽고 싶어 방 안을 모두 뒤졌고,  다 뒤지고 난 뒤 시집을 사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이전에 잊고 있었던 기억과 함께.

 읽고 싶었지만 읽을 수 없었다. 시집으로 읽은 것도 아니고 강의에서 잠시 다루어졌던 한 편의 시. '천국의 난민'를 읽으며 내내 놀라운 마음을 가라 앉혀야 했다. 좋다 나쁘다라는 감정 너머에서 밀려오는 놀라움. 어린 시절 처음 동화책을 읽었을 때, 새로운 시공간이 꿈처럼 펼쳐지던 기분과 흡사했다. 그러나 학교 생활에 휩쓸려 시인도 시집에 대한 기억도 잊혀지고 그 학기를 마치게 되었다. 그 다음 학기가 시작될 무렵쯤 나는 정발 번뜩하고 그 시가 읽고 싶어져서, 수업시간에 모아두는 파일을 뒤지고, 먼지가 쌓인 상자와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시인의 이름도 시의 제목도 잊혀진 가운데 나는 그 시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같이 수업을 들었던 친구마다 붙들고 시의 내용을 설명하며 물어 보았지만 고개를 갸우뚱 하며 잘모르겠다며 멋적어 할 뿐이었다. 생각나는 단어를 검색 사이트에서 뒤져봐도 찾을 수 없었다.

천국,

내가 기억하고 있던 단어는 천국이었다. 비로소 시집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도서관에서 시집 부분의 모든 책을 다 뒤진 후였다. 이 시집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내 가슴 뛰며 책장을 넘겼다. 책을 덮고 나서 왜 그토록 이 시집을 읽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윤의섭의 시에서 천국을 보았던 것이다. 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천국을.  나는 난민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현실의 시간과 공간에서 다른 차원의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현실의 시공간성에서 자꾸만 미끌어지던 내 자신이 산사람처럼 실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귀신처럼 실재하고 있다-라고 윤의섭의 시가 말해 주었던 것이다.

시인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런 메시지를 읽었고 편히 숨쉴 수 있는 세상을 얻은 기분이었다. 

천국의 난민이라는 시집에는 제목처럼 정말 난민들이 가득 살고 있다. 윤의섭이라는 시인의 목소리를 빌어서 은하철도999에서나 만날 수 있는 우주가 펼쳐진다. 시 한 편 마다 한 혹성의 사연이 실려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무임승차를 하고 있었던 샘이다. 아니 시 안에서 몰래 숨어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난민 같은 자아가 있을 것이다. 그 자아를 내내 업고 현실을 살아가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바로 내 리뷰를 읽는 당신에게 나는 우주를 여행할 수 있는 은하철도의 승차권 같은, <천국의 난민>을 건네 주고 싶다. 지금 나는 열차에서 내려 또 다른 열차를 타고 다른 우주를 여행하러 떠난다.

시인은 시를 썼다. 그 시를 찾아 읽는 것조차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여행을 포기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한 편의 시 대신 시인의 말 중 일부를 남긴다.

 

[......그리하여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현실은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꿈꾸게 하였다. 시간과 공간의 고립성이 갖는 부적절함을 인식하게 된 것은 바람 부는 한가운데에서 잠깐 동안이나마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이다. 바람 속에 서 있어본 적이 있다면, 그 순간이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모를리 없다. 분명, 바람 속이라는 공간과 잠시 뒤 사라질 짧은 순간이라는 한계는 이 세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말하자면 전혀 다른 세계이다. 그것은 다른 세계로의 도피를 말하는게 아니다. 이 세계가 갖고 있는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는 모른다. 보여지고 만져지는 세계는 그 이면에 감추어진 또 다른 본질을 가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그 이면이 슬쩍 우리에게 나타나는 순간을 우리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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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ukye > 정본을 원한다면 이 이상이 없다

일리아스에 대해서는 아동용에서 완역까지 여러 번역이 있다. 아동이나 청소년을 위한 축약본을 원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완역을 원한다면 이 단국대판 일리아스를 능가할 것이 없다.

내게는 일리아스 번역의 질을 가늠하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로는 고유명사이다. "이"와 "위"를 제대로 구분하고 "우스"와 "오스"를 혼동하지 않았다면 일단 합격. 둘째로는 메넬라오스와 파리스의 결투를 보러 나온 헬레네를 본 트로이아의 원로들이 하는 말이다. "어쩌면 그 얼굴 모양이 불사의 여신들과 저토록 닮을 수가 있는가." 이 부분을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듯하다" 어쩌고로 번역한 책이라면 조르바의 표현대로 악마에게나 줘 버릴 책이다. (실제로 그런 번역이 있다!)

동서 세계문학전집의 <일리아스/오딧세이>도 완역이기는 완역이고 주석도 잔뜩 달아 놓았지만 운문을 산문으로 그냥 죽 이어 놓았다. 덕분에 엄청난 쉼표의 압박에다 전혀 한국어 같지 않은 도치문의 잔치가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왜 처음부터 끝까지 트로이아를 트로야라고 옮긴 것인가?)

홍신문화사판 <일리아스>도 완역이고 문장 또한 산문화했지만 적어도 말이 되는 산문화이다. 주석이 거의 없는데 이것은 보급용 문고판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홍신문화사판 <일리아스>가 단국대판 <일리아스>를 능가할 수 있는 단 한 부분이 있다. <일리아스> 8권, 헥토르가 그리스군 진영에 돌진하며 말들을 격려하는 대목이다. 헥토르가 모는 네 마리의 말 이름은 각각 "크산토스" "포다르커스" "아이톤" "람포스"이다. 이게 뭐가 중요하냐고? 홍신문화사판에는 여기에 해석이 붙어 있다! 각각 "황갈색" "흰 다리" "붉은색" "흰색"이라는 뜻이다. 단국대판에는 같은 부분에 이 말이름이 그 털색깔에서 왔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다. (덧붙이면 아킬레우스의 유명한 신마 이름인 "크산토스"와 "발리오스"는 "황갈색"과 "얼룩무늬"이다. 즉, 최근 개봉한 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우스의 말을 두 마리 다 검은 말로 내놓은 것은 구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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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오수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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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욕망과 함께 이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성 때문에 인간은 고민해도 되지 않을 문제를 고민하게 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성보다 욕망이 앞서는 동물과는 달리 ‘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는 동물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희망사항일 다름이다. 인간은 언제나 ‘이성적이고자 노력하는 동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이치이고 솔직한 모습인 샘이다.

오수연의 <부엌>은 이런 이중성을 ‘먹다[食]’의 문제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부엌>은 장편 연작으로 2편의 단편과 1편의 중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작품은 1인칭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화자 ‘나’는 모두 우유부단한 ‘소녀’의 심성을 가진 여자다. 앞의 두 단편에서 ‘나’는 아프리카인이며 육식주의자인 ‘무라뜨’와 아시아인이며 채식주의자인 ‘다모’와 함께 자신의 부엌을 공유하면서 인간관계의 갈등에 부딪친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국내가 아닌 ‘외국’으로 설정된 이유는 극단적인 관계를 통해 인간을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나와 무라뜨, 다모는 ‘인도’라는 공간에서는 모두 외국인이다. 외국 유학생인 무라뜨와 다모는 부엌이 없는 기숙사에 살고 있기 때문에 부엌이 있는 내 집에 드나들게 된 것이다. 만약 인물들이 외국인이라는 신분이 아니라 한 나라의 사람이었다면 손쉽게 다른 ‘부엌’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고 소설은 이야기 전개의 타당성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언어, 문화, 생활이 다른 나라의 사람이 영어를 통해 인도에서 겪는 이야기는 인간의 ‘소통’과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 극적인 배경이 되는 것이다. 나는 요리 하기 싫어하지만 부엌이 좋은 집을 고르며, 부엌에서 오래 머물면서도 그런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다모의 경우에는 부엌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전부인이 있었기에 부엌이 싫어서 기숙사에 살고, 무라뜨는 부엌을 갖고 싶지만 형편상 기숙사에 산다. 단편인 <부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는 ‘나’는 무라드와 다모 사이에서 방황한다. 나는 자신처럼 제대로 먹지 못하는 채식주의자 ‘다모’를 동일시하여 ‘할 수만 있다면 살이라도 떼어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반면, 꿈속에서 육식주의자 ‘무라드’에게 ‘나를 잡아 먹어’ 달라고 말한다. 다모는 타인을 싫어하지만 살기 위해 다른 것과 최소한의 접촉을 유지한다. 다모에게 먹는 것 역시 그런 접촉이며, 음식은 ‘무엇인가의 생명을 희생’해야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이며,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자신의 육신인 샘이다. 겉으로 보이는 이타성 역시 상처받고 싶어 하지 않는 소극적인 인간관계, 이기적인 자기 보호 본능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무라뜨는 육식주의자라는 취향을 인도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부정 당하는 것이다. 자신을 편견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무라뜨는 공격적이다. 인간의 이성을 고집하는 다모와 본능적인 생존의식-욕망을 지키려고 하는 무라뜨 사이에서 ‘나’는 다모를 이해하지만 무라뜨에게 끌린다. <나는 음식이다>에서는 이들의 갈등이 좀더 심화되고 감각적으로 나타나는데, 위장병이 생긴 나의 위통은 ‘따로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무라뜨를 버리고 다모를 택했지만 서로에게 너무나 완전한 ‘이상’을 요구하기에 버텨내지 못하고 병만 더욱 깊어질 뿐이다. 결국 나는 무라뜨의 먹는 모습을 통해 ‘먹고 싶지만 먹으면 메스꺼운’ 위통의 욕망을 해소시킨다. 그러나 나의 욕망의 대상은 무라뜨가 아닌 다모였기에, 다모에게 오랄섹스를 시도한다. 그 순간 나는 운명적으로 허기를 가지고 태어나 자신의 몸을 먹고 머리만 남은 ‘끼르띠무카’가 되고 다모는 희생제의의 제물의 표정처럼 자신을 내주며 근심이 없어진 무감각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먹고 먹히는 생명의 법칙에서 벗어나려는 다모를 위해 최선책으로 그를 먹기로 한다. 어머니가 아이를 안 듯 그를 먹고 무라뜨를 먹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일 뿐 다모를 먹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음식’이 되어 무라뜨에게 먹어 달라고 한다. 다모라는 인물은 먹이사슬이라는 본능의 부조리함에 대해 고통 받으며 그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맬 뿐이다. 이런 다모와 세상과의 대립은 <땅 위의 영광>에서 ‘나’를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나는 다모가 택시의 창문에 낀 거지의 손을 아랑곳 하지 않고 격렬한 감정을 표시하며 서서히 창문을 올려 쫓아내는 장면을 목격한다. 잠시 머물렀다 떠날 이방인인 주제에 사회 제도에 대해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될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건을 통해 다모가 ‘어른스러운 체하는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 속에서 다모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녀(두 단편에서의 나)의 이야기처럼 나에게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자살 하면서 ‘너 때문이야’라고 말하며 쓰러진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어머니의 병을,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는 그녀의 병을 걱정할 뿐이다. 다모는 실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되고 싶은’ 인물이다. 유학생인 나는 인도의 신분제도라는 새로운 인간관계 앞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소녀 ‘리즈’와 그녀의 엄마는 하녀 신분의 천민이다. 그러나 사람이다. 사람으로 동등하게 대할 것인지 하녀로 부릴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나는 리즈와의 관계를 통해 인간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경계가 적정할 것인지 고민한다. ‘하이!’라고 손 흔드는 관계인지, 빗자루로 패거나 머리채를 잡아 당기는 관계인지. 그러나 나 역시 인도 사회에서는 어떤 계급도 없는, 인도인이 아니라는 면에서는 천민보다도 못한 외국인, 괴물일 뿐이다. 나는 그녀와 다모와의 사랑을 통해 자신을 재조정해 나간다. 인간관계에서 솔직하지 못하면서 늘 불만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타인의 시선에 따라 움직였던 ‘겁먹은 어린아이’인 다모의 모습에서, 다모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인정하면서도 그래도 살아가는 그녀를 이해함으로써 ‘죄많은 어른’이 되어간다. <나는 음식이다>에서 나(그녀)는 희생제의의 제물이 되어 ‘아이’로써 생을 버렸지만, 이제는 책임감을 가지고 생을 살기 위해 다모라는 ‘아이’를 죽인 ‘어머니’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피식자에서 포식자로, 남에게 잡아먹힐게 두려워 남을 잡아먹는 끼르띠무까라는 삶의 본질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리즈를 위해 울어줄 수 있지만 용서해줄 수 없는 인간.

이 세 편의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우유부단한 소녀에서 포식자인 여자로 또 다른 생명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작가는 소설에서 포식자라는 본능이 앞선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그런 자신을 볼 수 있고 희생당하는 타인을 잊지 않고 있다면 나와 너의 경계는 현실적으로는  닫혀있지만 이상적으로는 동시에 열려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 경계의 열림은 현실이 될 수 없는 한계를 가지는, 망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이성이라는 부분에서 이상적으로 남아있음으로써, 인간이 끊임없이 세상을 삶을 버리지 않고 더욱 끈질기게 살아가도록 만들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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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인생의 가장 큰 몫에 대하여

는 어떻게든 살아가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큰 몫이란 생각을 종종 합니다.

리고 가끔 현재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실천 없는 반성을, 사유 없는 실천을 반성하고  또다시 실천 없는 일상을 되돌아 보며 반성에 반성을 거듭하곤 합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생활에 대해 의문을 가지곤 합니다. 어째서 나는 흙을 일구고 생명을 기르는 일을 택하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아늑한 집을 짓는 일을 택하지 않았을까, 이른 새벽 아직 사람들이 거리에 나서기 전에 길을 닦고, 청소하는 일을 택하지 않았는지 반문해보곤 합니다. 어째서 글을 읽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책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택했는지, 종이를 만들기 위해 제 속살 다 내어 바치는 세상 나무들에게, 그렇게 만들어진 책을 읽게 될 사람들에게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받아 챙기는 월급이 오로지 저 혼자 일 잘해서 받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세상에 책 한 권 펼쳐내는 일이 제 속살 내어 바치는 세상의 나무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지 항상 되살펴 묻게 됩니다. 이를테면 제가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챙겨먹는 밥값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학을 전공했고, 글쓰기와 책읽기, 책을 세상에 내놓는 일을 업으로 삼은 뒤로도 이런 일들을 직업으로 택한 데 대한 많은 회의를 품곤 했습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으며 자본주의의 음습한 기운이 전세계를 적시는, 희망이 사라진 세기를 살아가고, 비루한 일상 속에서 전망없는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는 속에서 문학이란, 글쓰기란,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일이란 얼마나 의미있는 일일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러나 시인 함민복이 <긍정적인 밥>이란 시에서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나의 글쓰기에 대한 마음은 이 시인에 비하면 아직 멀기만 합니다.

울 첼란(Paul Celan)이란 시인이 있습니다.

울 첼란은 소련과 루마니아 접경지역에서 태어나 일평생 독일어를 모국어로 시를 쓴  유태계 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모국어의 나라인 독일은 파울 첼란을 죽음이 춤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인간의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고, 사람들을 총살하는 동안 동료 유태인 악단은 흥겨운 춤곡을 연주해야 하는 속에서도 파울 첼란은 시를 썼습니다. 파울 첼란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지만 극심한 우울증과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에 시달리다 결국 세느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맙니다.  

런 자신의 문학을 파울 첼란은 '유리병편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가 받을 것인지, 과연 무사히 전달될 수 있을 것인지 글을 쓰는 이는 알지 못하지만 지금 쓰는 이 글이 험난한 파도와 암초 사이를 뚫고, 깊은 심연에 가라앉지 않고 누군가, 어딘가에는 닿으리란 희망을 품고 망망대해에 띄우는 편지 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이렇듯 당신의 해변 언저리에 무사히 도착한 '유리병편지'를 집어드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Ghetto)에서 봉기를 일으켰던 유대인들은 전멸의 위기에 직면하자 생존자들이 마지막 힘을 모아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해 줄 시인 한 사람을 피신시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유태인들의 마지막 희망을 한 몸에 품은 시인 이작 카체넬존은 자신들의 일을 담은 시들을 깨알같이 베껴 여섯 부를 만들어 파묻어 놓은 후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끌려가 끝내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중 유리병에 넣어 파묻었던 한 부와 가방 손잡이에 꿰매 숨겨 놓았던 한 부가 기적적으로 구해져서 몇 년 전 출판되었습니다.

런 까닭에 저는 거창하게도 '문학이란 세상 모든 이들에게 절망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에게 희망을 걸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가끔 이렇게 말하는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데 당신 한 사람이 저 거대한 체제에 반대한다고 해서, 변화와 변혁을 꿈꾼다고 해서, 혁명을 꿈꾼다고 해서 세상이 변할 수 있겠는가' 같은 패배주의적인 말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시대의 급류를 잘 타기 위해 애쓰다가 끝내는 좌초하여 혹은 말은 그렇게 냉소적으로 했음에도 역시 괴로워하며 불만 많은 소시민처럼 술잔을 기울입니다. 우리는 운명이나 필연, 숙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신탁(神託)에 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상사가 매양 1+1은 2의 결과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과학에 대한 것이 아니라 따뜻한 피가 흐르고, 늘 왼쪽 가슴에서 심장이 뛰는 인간에 관한 것입니다. 변하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고, 인간을 움직이는, 인간을 움직이고자 하는 학문이 바로 인문사회과학이고 예술입니다.

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한때 그 자체가 혁명적인 행위였습니다. 글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싶다는 마음, 남의 생각에 귀기울이겠다는 마음가짐의 표출이기 때문입니다.
일 중요한 것은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 내가 옳은 일이라고 믿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리는 불행히도 당대에 어떤 성과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해서 고대 사회의 노예들이, 중세의 농노들이, 근대의 시민들이 변화와 혁명을 포기했다면 우리는 현재까지도 귀족이나 양반 계급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했을 겁니다. 우리가 지금 불가능하다고 믿어지는 일들을 꿈꾸기 시작했을 때, 그것들을 일상에서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을 때 바로 그곳, 그 지점으로부터 세상은 변화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신에게 지금 이렇게 띄우는 '유리병편지'가 고스란히 잘 전달될 수 있을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러나 누군가에게 어느 순간에는 제 마음이 닿을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약하지만 이곳에서 작은 출발을 다짐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룰 수 있습니다.
게바라는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리가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꿈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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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ichelle > 오에겐자부로 전집/ 고려원

 

poptrash님의 요청사항  
고려원에서 나온 오에 겐자부로 전집.
24권을 목표로 했다가 10권정도 미출간 상태에서 회사가 부도를 맞았다는군요. 
오에 겐자부로로 검색해보면 이 고려원 시리즈를 구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던데....
어느 돈많고 복받을 출판사에서 판권을 구입, 재출간해주면 안될까요?



1. 동시대게임
2. 만연원년의 풋볼
3. 신년의 인사

4.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
5.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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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킬프군단
11. 조용한 생활
12. 치료탑. 치료탑 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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