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엌
오수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욕망과 함께 이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성 때문에 인간은 고민해도 되지 않을 문제를 고민하게 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성보다 욕망이 앞서는 동물과는 달리 ‘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는 동물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희망사항일 다름이다. 인간은 언제나 ‘이성적이고자 노력하는 동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이치이고 솔직한 모습인 샘이다.
오수연의 <부엌>은 이런 이중성을 ‘먹다[食]’의 문제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부엌>은 장편 연작으로 2편의 단편과 1편의 중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작품은 1인칭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화자 ‘나’는 모두 우유부단한 ‘소녀’의 심성을 가진 여자다. 앞의 두 단편에서 ‘나’는 아프리카인이며 육식주의자인 ‘무라뜨’와 아시아인이며 채식주의자인 ‘다모’와 함께 자신의 부엌을 공유하면서 인간관계의 갈등에 부딪친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국내가 아닌 ‘외국’으로 설정된 이유는 극단적인 관계를 통해 인간을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나와 무라뜨, 다모는 ‘인도’라는 공간에서는 모두 외국인이다. 외국 유학생인 무라뜨와 다모는 부엌이 없는 기숙사에 살고 있기 때문에 부엌이 있는 내 집에 드나들게 된 것이다. 만약 인물들이 외국인이라는 신분이 아니라 한 나라의 사람이었다면 손쉽게 다른 ‘부엌’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고 소설은 이야기 전개의 타당성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언어, 문화, 생활이 다른 나라의 사람이 영어를 통해 인도에서 겪는 이야기는 인간의 ‘소통’과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 극적인 배경이 되는 것이다. 나는 요리 하기 싫어하지만 부엌이 좋은 집을 고르며, 부엌에서 오래 머물면서도 그런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다모의 경우에는 부엌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전부인이 있었기에 부엌이 싫어서 기숙사에 살고, 무라뜨는 부엌을 갖고 싶지만 형편상 기숙사에 산다. 단편인 <부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는 ‘나’는 무라드와 다모 사이에서 방황한다. 나는 자신처럼 제대로 먹지 못하는 채식주의자 ‘다모’를 동일시하여 ‘할 수만 있다면 살이라도 떼어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반면, 꿈속에서 육식주의자 ‘무라드’에게 ‘나를 잡아 먹어’ 달라고 말한다. 다모는 타인을 싫어하지만 살기 위해 다른 것과 최소한의 접촉을 유지한다. 다모에게 먹는 것 역시 그런 접촉이며, 음식은 ‘무엇인가의 생명을 희생’해야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이며,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자신의 육신인 샘이다. 겉으로 보이는 이타성 역시 상처받고 싶어 하지 않는 소극적인 인간관계, 이기적인 자기 보호 본능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무라뜨는 육식주의자라는 취향을 인도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부정 당하는 것이다. 자신을 편견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무라뜨는 공격적이다. 인간의 이성을 고집하는 다모와 본능적인 생존의식-욕망을 지키려고 하는 무라뜨 사이에서 ‘나’는 다모를 이해하지만 무라뜨에게 끌린다. <나는 음식이다>에서는 이들의 갈등이 좀더 심화되고 감각적으로 나타나는데, 위장병이 생긴 나의 위통은 ‘따로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무라뜨를 버리고 다모를 택했지만 서로에게 너무나 완전한 ‘이상’을 요구하기에 버텨내지 못하고 병만 더욱 깊어질 뿐이다. 결국 나는 무라뜨의 먹는 모습을 통해 ‘먹고 싶지만 먹으면 메스꺼운’ 위통의 욕망을 해소시킨다. 그러나 나의 욕망의 대상은 무라뜨가 아닌 다모였기에, 다모에게 오랄섹스를 시도한다. 그 순간 나는 운명적으로 허기를 가지고 태어나 자신의 몸을 먹고 머리만 남은 ‘끼르띠무카’가 되고 다모는 희생제의의 제물의 표정처럼 자신을 내주며 근심이 없어진 무감각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먹고 먹히는 생명의 법칙에서 벗어나려는 다모를 위해 최선책으로 그를 먹기로 한다. 어머니가 아이를 안 듯 그를 먹고 무라뜨를 먹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일 뿐 다모를 먹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음식’이 되어 무라뜨에게 먹어 달라고 한다. 다모라는 인물은 먹이사슬이라는 본능의 부조리함에 대해 고통 받으며 그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맬 뿐이다. 이런 다모와 세상과의 대립은 <땅 위의 영광>에서 ‘나’를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나는 다모가 택시의 창문에 낀 거지의 손을 아랑곳 하지 않고 격렬한 감정을 표시하며 서서히 창문을 올려 쫓아내는 장면을 목격한다. 잠시 머물렀다 떠날 이방인인 주제에 사회 제도에 대해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될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건을 통해 다모가 ‘어른스러운 체하는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 속에서 다모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녀(두 단편에서의 나)의 이야기처럼 나에게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자살 하면서 ‘너 때문이야’라고 말하며 쓰러진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어머니의 병을,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는 그녀의 병을 걱정할 뿐이다. 다모는 실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되고 싶은’ 인물이다. 유학생인 나는 인도의 신분제도라는 새로운 인간관계 앞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소녀 ‘리즈’와 그녀의 엄마는 하녀 신분의 천민이다. 그러나 사람이다. 사람으로 동등하게 대할 것인지 하녀로 부릴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나는 리즈와의 관계를 통해 인간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경계가 적정할 것인지 고민한다. ‘하이!’라고 손 흔드는 관계인지, 빗자루로 패거나 머리채를 잡아 당기는 관계인지. 그러나 나 역시 인도 사회에서는 어떤 계급도 없는, 인도인이 아니라는 면에서는 천민보다도 못한 외국인, 괴물일 뿐이다. 나는 그녀와 다모와의 사랑을 통해 자신을 재조정해 나간다. 인간관계에서 솔직하지 못하면서 늘 불만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타인의 시선에 따라 움직였던 ‘겁먹은 어린아이’인 다모의 모습에서, 다모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인정하면서도 그래도 살아가는 그녀를 이해함으로써 ‘죄많은 어른’이 되어간다. <나는 음식이다>에서 나(그녀)는 희생제의의 제물이 되어 ‘아이’로써 생을 버렸지만, 이제는 책임감을 가지고 생을 살기 위해 다모라는 ‘아이’를 죽인 ‘어머니’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피식자에서 포식자로, 남에게 잡아먹힐게 두려워 남을 잡아먹는 끼르띠무까라는 삶의 본질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리즈를 위해 울어줄 수 있지만 용서해줄 수 없는 인간.
이 세 편의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우유부단한 소녀에서 포식자인 여자로 또 다른 생명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작가는 소설에서 포식자라는 본능이 앞선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그런 자신을 볼 수 있고 희생당하는 타인을 잊지 않고 있다면 나와 너의 경계는 현실적으로는 닫혀있지만 이상적으로는 동시에 열려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 경계의 열림은 현실이 될 수 없는 한계를 가지는, 망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이성이라는 부분에서 이상적으로 남아있음으로써, 인간이 끊임없이 세상을 삶을 버리지 않고 더욱 끈질기게 살아가도록 만들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