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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시인 사이드 도서 갤러리에 자주 간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인들은 불쌍하다

암기되는 시...

차라리 외로운 기다림에 치친 시인들이 행복할지도...

 

 

김지하의 서정시...


“이거, 또 시예요?”

“그래. 슬픈 시야. 아주 슬픈…….”

몽달씨가 핼쑥한 얼굴을 쳐들며 행복하게 웃었다. 슬픈 시라고 해놓고선 웃다니. 나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몽달씨 옆에 앉았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다 나았어요?”

“응. 시를 읽으면서 누워 있었더니 금방 나았지.”

금방은 무슨 금방. 열흘이나 되었는데. 또 한번 나는 몽달씨의 형편없는 정신 상태에 실망했다.

“그날밤에 난 여기에 앉아서 다 봤어요.”

“무얼?”

“김반장이 아저씨를 쫓아내는 것…….”

순간 몽달씨가 정색을 하고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예전의 그 풀려 있던 눈동자가 아니었다. 까맣고 반짝이는 눈이었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않을 작정인지 괜스레 팔뚝에 엉겨붙은 상처딱지를 떼어내려고 애쓰는 척했다. 나는 더욱 바싹 다가앉았다.




TV에 김지하 시인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사회자가 클린턴 전미국대통령과의 만남에서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10년도 전에 어느 분에게 제가 '박노해나 김지하를 시인으로 볼 수 없다. 그들은 감수성이 없다. 그것은 시가 아니라 선동문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식으로 대들자 그 때 그 분은 웃으며 김지하도 차분한 서정시가 있는데 얼마나 좋은지 몰라하며 저를 달래던게 생각났습니다.
신경 끄고 있다가 이제와서 찾기 귀찮아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김지하의 서정시라며 어떤 작품이 실렸나 봅니다. 그리고 예전과 마찬가지로 시는 시험문제나 숙제로 어린 학생들을 어지간히 괴롭히나 봅니다.
시가 무엇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지 시 그것만을 위한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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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렐라
소햏도 김지하를 교과서로 배워서 그다지 관심을 느끼지 못했소. 그러다가 대학와서 리포트를 선택해서 쓰게 되었오. 계기는 정말 내가 읽은 것이 김지하 시의 전부인가?라는 의심 때문이었소. 당시 개인적이고 소소한 문제나 서정을 노래하고 있는 시집을 주로 읽어와서 그런지 오히려 김지하의 시에 충격을 먹었소. 눈으로 읽어도 리듬이 죽지 않고 읽히는 맛이 있는 시구나,하고. 김지하가 군사독재, 민주화항쟁 시대를 겪지 않았다면 그도 정신적이고 철학적인 쪽으로 시를 쓰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었오. 2005/04/08 x
시체렐라
교과서에서 배우는 시는 마치 책 앞장의 목차처럼 대략적인 개요를 알게 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오, 소햏은 작문 교사가 교과서 대신 직접 교재를 만들어 시를 가르쳐서 무척 재밌게 배웠다오, 물론 문학 시간에는 암기식으로 시를 배웠고...둘 다 장단점이 있으므로 병행해야 한다고 보오. 교사들의 자질에 따라 평생 시를 읽을 수도 있고 졸업과 동시에 읽지 않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끔찍하기도 하오. 2005/04/08 x
시체렐라
시도 다른 문학이나 예술처럼 독특한 매력이 있기 때문에 계속 쓰여지게 되는 것 같소. 세상에 정답이 있으면 편하겠지만, 살다보면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겪게 되고 고민하게 되지 않소? 왜 그런것인지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우리는 겪고 있다. 그 수많은 비밀을 알아내어 말하려는 자가 예술가라면, 시인은 시라는 형식이 그 비밀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오. 시인은 무엇을 원하기에 시를 쓴다기 보다 발견한 비밀(대상이 내부이든 외부인든 상관없이)을 언어로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해, 다시 또 시에서의 형식(언어, 리듬, 이미지등)을 고민하오. 무엇을 위하여 시를 쓰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오. 눈과 머리로 시를 읽다보면 느끼게 되는 한계가 아닌가 하오. 마음으로부터 교감하는 시를 한 편이라도 2005/04/08 x
시체렐라
만나게 되어, 그 시로부터 자신이 말할 수 없는 변화를 겪게 된다면, 살아있는 사람의 육성처럼 자신의 영혼을 매만져주는 기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오. 쓰고 나니 잡소리가 너무 많아져서 미안하오. 여기 쓴 건 소햏이 생각하는 것일 뿐이니 읽고 넘어가 주시구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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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ukye > 정본을 원한다면 이 이상이 없다

일리아스에 대해서는 아동용에서 완역까지 여러 번역이 있다. 아동이나 청소년을 위한 축약본을 원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완역을 원한다면 이 단국대판 일리아스를 능가할 것이 없다.

내게는 일리아스 번역의 질을 가늠하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로는 고유명사이다. "이"와 "위"를 제대로 구분하고 "우스"와 "오스"를 혼동하지 않았다면 일단 합격. 둘째로는 메넬라오스와 파리스의 결투를 보러 나온 헬레네를 본 트로이아의 원로들이 하는 말이다. "어쩌면 그 얼굴 모양이 불사의 여신들과 저토록 닮을 수가 있는가." 이 부분을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듯하다" 어쩌고로 번역한 책이라면 조르바의 표현대로 악마에게나 줘 버릴 책이다. (실제로 그런 번역이 있다!)

동서 세계문학전집의 <일리아스/오딧세이>도 완역이기는 완역이고 주석도 잔뜩 달아 놓았지만 운문을 산문으로 그냥 죽 이어 놓았다. 덕분에 엄청난 쉼표의 압박에다 전혀 한국어 같지 않은 도치문의 잔치가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왜 처음부터 끝까지 트로이아를 트로야라고 옮긴 것인가?)

홍신문화사판 <일리아스>도 완역이고 문장 또한 산문화했지만 적어도 말이 되는 산문화이다. 주석이 거의 없는데 이것은 보급용 문고판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홍신문화사판 <일리아스>가 단국대판 <일리아스>를 능가할 수 있는 단 한 부분이 있다. <일리아스> 8권, 헥토르가 그리스군 진영에 돌진하며 말들을 격려하는 대목이다. 헥토르가 모는 네 마리의 말 이름은 각각 "크산토스" "포다르커스" "아이톤" "람포스"이다. 이게 뭐가 중요하냐고? 홍신문화사판에는 여기에 해석이 붙어 있다! 각각 "황갈색" "흰 다리" "붉은색" "흰색"이라는 뜻이다. 단국대판에는 같은 부분에 이 말이름이 그 털색깔에서 왔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다. (덧붙이면 아킬레우스의 유명한 신마 이름인 "크산토스"와 "발리오스"는 "황갈색"과 "얼룩무늬"이다. 즉, 최근 개봉한 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우스의 말을 두 마리 다 검은 말로 내놓은 것은 구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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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인생의 가장 큰 몫에 대하여

는 어떻게든 살아가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큰 몫이란 생각을 종종 합니다.

리고 가끔 현재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실천 없는 반성을, 사유 없는 실천을 반성하고  또다시 실천 없는 일상을 되돌아 보며 반성에 반성을 거듭하곤 합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생활에 대해 의문을 가지곤 합니다. 어째서 나는 흙을 일구고 생명을 기르는 일을 택하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아늑한 집을 짓는 일을 택하지 않았을까, 이른 새벽 아직 사람들이 거리에 나서기 전에 길을 닦고, 청소하는 일을 택하지 않았는지 반문해보곤 합니다. 어째서 글을 읽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책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택했는지, 종이를 만들기 위해 제 속살 다 내어 바치는 세상 나무들에게, 그렇게 만들어진 책을 읽게 될 사람들에게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받아 챙기는 월급이 오로지 저 혼자 일 잘해서 받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세상에 책 한 권 펼쳐내는 일이 제 속살 내어 바치는 세상의 나무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지 항상 되살펴 묻게 됩니다. 이를테면 제가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챙겨먹는 밥값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학을 전공했고, 글쓰기와 책읽기, 책을 세상에 내놓는 일을 업으로 삼은 뒤로도 이런 일들을 직업으로 택한 데 대한 많은 회의를 품곤 했습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으며 자본주의의 음습한 기운이 전세계를 적시는, 희망이 사라진 세기를 살아가고, 비루한 일상 속에서 전망없는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는 속에서 문학이란, 글쓰기란,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일이란 얼마나 의미있는 일일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러나 시인 함민복이 <긍정적인 밥>이란 시에서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나의 글쓰기에 대한 마음은 이 시인에 비하면 아직 멀기만 합니다.

울 첼란(Paul Celan)이란 시인이 있습니다.

울 첼란은 소련과 루마니아 접경지역에서 태어나 일평생 독일어를 모국어로 시를 쓴  유태계 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모국어의 나라인 독일은 파울 첼란을 죽음이 춤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인간의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고, 사람들을 총살하는 동안 동료 유태인 악단은 흥겨운 춤곡을 연주해야 하는 속에서도 파울 첼란은 시를 썼습니다. 파울 첼란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지만 극심한 우울증과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에 시달리다 결국 세느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맙니다.  

런 자신의 문학을 파울 첼란은 '유리병편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가 받을 것인지, 과연 무사히 전달될 수 있을 것인지 글을 쓰는 이는 알지 못하지만 지금 쓰는 이 글이 험난한 파도와 암초 사이를 뚫고, 깊은 심연에 가라앉지 않고 누군가, 어딘가에는 닿으리란 희망을 품고 망망대해에 띄우는 편지 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이렇듯 당신의 해변 언저리에 무사히 도착한 '유리병편지'를 집어드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Ghetto)에서 봉기를 일으켰던 유대인들은 전멸의 위기에 직면하자 생존자들이 마지막 힘을 모아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해 줄 시인 한 사람을 피신시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유태인들의 마지막 희망을 한 몸에 품은 시인 이작 카체넬존은 자신들의 일을 담은 시들을 깨알같이 베껴 여섯 부를 만들어 파묻어 놓은 후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끌려가 끝내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중 유리병에 넣어 파묻었던 한 부와 가방 손잡이에 꿰매 숨겨 놓았던 한 부가 기적적으로 구해져서 몇 년 전 출판되었습니다.

런 까닭에 저는 거창하게도 '문학이란 세상 모든 이들에게 절망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에게 희망을 걸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가끔 이렇게 말하는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데 당신 한 사람이 저 거대한 체제에 반대한다고 해서, 변화와 변혁을 꿈꾼다고 해서, 혁명을 꿈꾼다고 해서 세상이 변할 수 있겠는가' 같은 패배주의적인 말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시대의 급류를 잘 타기 위해 애쓰다가 끝내는 좌초하여 혹은 말은 그렇게 냉소적으로 했음에도 역시 괴로워하며 불만 많은 소시민처럼 술잔을 기울입니다. 우리는 운명이나 필연, 숙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신탁(神託)에 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상사가 매양 1+1은 2의 결과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과학에 대한 것이 아니라 따뜻한 피가 흐르고, 늘 왼쪽 가슴에서 심장이 뛰는 인간에 관한 것입니다. 변하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고, 인간을 움직이는, 인간을 움직이고자 하는 학문이 바로 인문사회과학이고 예술입니다.

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한때 그 자체가 혁명적인 행위였습니다. 글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싶다는 마음, 남의 생각에 귀기울이겠다는 마음가짐의 표출이기 때문입니다.
일 중요한 것은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 내가 옳은 일이라고 믿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리는 불행히도 당대에 어떤 성과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해서 고대 사회의 노예들이, 중세의 농노들이, 근대의 시민들이 변화와 혁명을 포기했다면 우리는 현재까지도 귀족이나 양반 계급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했을 겁니다. 우리가 지금 불가능하다고 믿어지는 일들을 꿈꾸기 시작했을 때, 그것들을 일상에서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을 때 바로 그곳, 그 지점으로부터 세상은 변화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신에게 지금 이렇게 띄우는 '유리병편지'가 고스란히 잘 전달될 수 있을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러나 누군가에게 어느 순간에는 제 마음이 닿을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약하지만 이곳에서 작은 출발을 다짐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룰 수 있습니다.
게바라는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리가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꿈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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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ichelle > 오에겐자부로 전집/ 고려원

 

poptrash님의 요청사항  
고려원에서 나온 오에 겐자부로 전집.
24권을 목표로 했다가 10권정도 미출간 상태에서 회사가 부도를 맞았다는군요. 
오에 겐자부로로 검색해보면 이 고려원 시리즈를 구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던데....
어느 돈많고 복받을 출판사에서 판권을 구입, 재출간해주면 안될까요?



1. 동시대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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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년의 인사

4.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
5.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
6. M/T와 숲의 이상한 이야기
7. 구세주의 수난
8. 흔들림
9. 위대한 세월
10. 킬프군단
11. 조용한 생활
12. 치료탑. 치료탑 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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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하하하 >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와 대표 작품(1944-2003)

▶ 2003년 존 맥스웰 쿳시 - '철의 시대'

▶ 2002년 임레 케르테스 - '운명'

▶ 2001년 V.S. 네이폴 - '당혹스러운 도착'

▶ 2000년 가오싱젠 - '영혼의 산'

▶ 1999년 귄터 그라스 -`양철북'

▶ 1998년 주제 사라마구 -`수도원의 비망록'

▶ 1997년 다리오 포 -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우연한 죽음'

▶ 1996년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 1995년 셰이머스 히니 -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

▶ 1994년 오에 겐자부로 - '개인적체험'

▶ 1993년 토니 모리슨 - '재즈'

▶ 1992년 데렉 월코트- '또 다른 삶'

▶ 1991년 나딘 고디머 - '보호주의자'

▶ 1990년 옥타비오 파스 - '태양의 돌'

▶ 1989년 카밀로 호세 세라 - '파스쿠알두아르테 일가'

▶ 1988년 나집 마흐프즈 - '우리 동네 아이들'

▶ 1987년 요세프 브로드스키 - '소리없는 동네'

▶ 1986년 월레 소잉카 - '늪 지대 사람들'

▶ 1985년 클로드 시몽 - '사기꾼'

▶ 1984년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 -'프라하의 봄'

▶ 1983년 윌리엄 골딩 - '파리 대왕'

▶ 1982년 가르시아 마르케스 - '백년 동안의 고독'

▶ 1981년 엘리아스 카네티 - '현운'

▶ 1980년 체스와프 밀로즈 - '한낮의 밝음'

▶ 1979년 오디세우스 엘리티스 - '방향'

▶ 1978년 아이작 싱어 - '고레이의 사탄'

▶ 1977년 비센테 알레이산드레 - '마음의 역사'

▶ 1976년 솔 벨로 - '희생자'

▶ 1975년 에우제니오 몬탈레 - '기회'

▶ 1974년 H.마르틴손 - '아니 아라 ' / E.욘손 - '해변의 파도'

▶ 1973년 패트릭 화이트 - '아주머니 이야기

▶ 1972년 하인리히 뵐 - '기차는 늦지 않았다

▶ 1971년 파블로 네루다 - '황혼의 세계'

▶ 1970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수용소 군도'

▶ 1969년 새뮤얼 베케트 - '고도를 기다리며'

▶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 - '설국'

▶ 1967년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 '과테말라 전설집'

▶ 1966년 S.요세프 아그논 - '출가' / 렐리 사크스 - '엘리'

▶ 1965년 미하일 솔로호프 - '고요한 돈강

▶ 1964년 장 폴 사르트르 - '구토'

▶ 1963년 게오르게 세페리스 - '연습장'

▶ 1962년 존 스타인벡 - '에덴의 동쪽'

▶ 1961년 이보 안드리치 - '드리나강의 다리'

▶ 1960년 생존 페로스 - '찬가'

▶ 1959년 살바토레 콰지모도 - '시인과 정치'

▶ 1958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닥터 지바고'

▶ 1957년 알베르 카뮈 - '이방인'

▶ 1956년 J.R.히메네스 - '프라테로와 나

▶ 1955년 H.락스네스 -'독립된 백성

▶ 1954년 어니스트 헤밍웨이 -'무기여 잘 있거라ꡒ

▶ 1953년 윈스턴 처칠 - '제2차대전 회고록'

▶ 1952년 프랑수아 모리악 -'테레즈 데케르'

▶ 1951년 P.라케르크 비스트 - '바라바'

▶ 1950년 버트런드 러셀 - '권위와 개인'

▶ 1949년 윌리엄 포크너 - '음향과 분노'

▶ 1948년 T.S.엘리엇 - '황무지'

▶ 1947년 앙드레 지드 - '좁은 문'

▶ 1946년 헤르만 헤세 - '데미안'

▶ 1945년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 '비수'

▶ 1944년 J.V.옌센 - '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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