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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평점 :
흔히 사람들은 순간을 살라고 조언한다. 끊임없이 미래나 과거를 보려 들지 말고, 그 모든 걸 더해 보지도 말고, 현재라는 풍성하게 무르익은 과일을 맛보라고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하면 인간은 그 순간에 머물게 된다. 중독자처럼 자신을 속이고 포기해 버린다. 그 모든 달콤함이 썩는 것 외에는 아무 변화도 일으킬 수 없게 될 때까지.
p. 29
밸은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무엇으로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순간에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었다. 처음으로 나는 밸이 끝없이 끌어모아야 했던 에너지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과거가 무너져 내렸기에, 현재가 계속 이어지도록 만들기 위해 온갖 에너지를 끌어모아야 했다. 나는 밸에게 몸을 기대고 웅크리며 그녀가 나를 안도록 했다. 최대한 세게 나를 꽉 안으라고 말했다. 필요하다면 날 뭉개 버려도 좋아. 밸의 힘은 놀라웠다. 그녀에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단순히 에너지 고갈의 연료라는 걸 깨달은 게 그때였다.
p. 128
한국인의 피가 아주 조금 섞인 20대 청년 틸러 바드먼은 어릴 적 가출한 어머니로 인해 언제나 마음의 결핍을 느낀다. 틸러의 아버지는 아내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사랑을 베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그러던 중 틸러는 해외 연수를 앞두고 중국계 사업가인 퐁을 만나게 되고 그의 사업을 돕기 위해 '낯선 세계'로 떠나게 된다. 소설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은 운명적 만남과 타국에서 보낸 일 년의 시간을 통해 떠나 버린 이의 여정을 그린다.
하늘 아래 외톨이처럼 느껴질 때, 쳇바퀴 같은 삶이 무의미하다 생각될 때,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갈망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종종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특히 지금처럼 어떤 이유로 절대 내 자리를 떠날 수 없을 때 더더욱 낯선 세계로의 여정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틸러가 아버지에게는 예정대로 해외 연수를 간다 말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퐁을 따라 떠나게 된 심리가 조금은 이해가 된다. 보잘것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젊은 청년의 열망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틸러의 여정은 생각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학대 속에서 노예처럼 취급받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틸러는 자신이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를 여전히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처럼 틸러가 보낸 시간이 그만큼 가치가 있었을까.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결핍 때문에 낯선 이들에게서 결핍을 채우려 애쓰는 청년의 모습이 그저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나에게도 자유로운 삶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해외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가져 성공의 길로 가겠다는 포부도 있었다. 잊고 있던 기억들이 자꾸만 떠오르는 건 틸러에게서 느끼는 동질감 때문일 것이다. 방대한 양의 소설이지만 손을 놓을 수 없었던 <타국에서의 일 년>은 화려한 무역 도시들을 배경으로 틸러라는 인물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건넨다. 낯선 경험이 성장의 발판이 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선택한 결단이 하나 둘 쌓여 자아를 형성하고 혼란한 젊은 시절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확고한 자신만의 여정을 걷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