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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평점 :
19세기 초 영국 여성과 아일랜드 남성이 만나 이룬 퀸턴가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국경을 넘는 사랑으로 대를 이어가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은 독립투쟁을 막기 위해 ‘블랙 앤드 탠즈’를 아일랜드에 파견하고, 그들의 첩자가 킬네이 저택 나무에서 혀가 잘린 상태로 목매달린 채 발견되면서 한 가문의 비극이 시작된다. 블랙 앤드 탠즈는 첩자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한밤중 킬네이를 급습하고 아홉 살이던 주인공 윌리 퀸턴은 여동생과 아버지, 퀸턴가의 사람들 전부를 잃고 폐허가 된 킬네이에서 도망쳐 알코올중독자인 어머니와 불안한 생활을 이어간다. 잔혹한 운명임에도 성장해나가던 윌리는 어느 날 찾아온 영국인 외사촌 메리앤을 만나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윌리가 돌연 자취를 감추며 비극은 계속된다.
소설은 윌리, 메리앤, 이멜다의 시점에서 서술되며 한 가문의 비극을 보여준다. 소박한 아일랜드 킬네이 주택에서 벌어진 그날의 끔찍한 장면은 세 사람을 운명의 꼭두각시로 만든다. 주인공인 윌리는 사촌인 메리앤을 사랑했고 둘 사이에서 딸 이멜다가 태어난다. 소설은 세 사람의 시점을 각각 보여주면서 영국과 아일랜드의 갈등, 가족 간의 갈등, 내전과 공포가 난무하는 배경 속에서 가엾은 운명의 꼭두각시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퀀턴가는 한 순가에 몰락했고 윌리는 살인자가 되었으며 메리앤은 사랑을 찾고자 용기를 낸다. 하지만 부모의 과거를 알게 된 이멜다는 점점 미쳐버린다. 그럼에도 폐허가 곳에는 절망적 슬픔을 달래주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온정이 있다. 이야기의 거장인 윌리엄 트레버는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말한다. 비극적인 운명일지라도 끈질기게 살아남으라 종용한다. 아무도 원하지 않아도 반쯤 탄 음울한 집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 확신하는 메리앤의 태도에서 사랑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같은 결심에는 선물같은 아이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토록 간절하면서도 확신에 찬 사랑을 해 본적이 있었던가. 비참함 속에서도 끝내 구원의 빛을 선사하는 이야기가 남긴 여운이 오래 지속될 것 같다.세대에 걸친 비극과 사랑의 잔혹한 운명을 대하는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군인들의 학살 이후 킬네이가 그랬듯 그 결정적인 순간들 이후 우리는 모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난도질당한 삶들, 그림자의 피조물들. 그의 아버지의 말처럼 운명의 꼭두각시들. 우리는 유령이 되었다.
p. 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