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룸 소설, 잇다 3
이선희.천희란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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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신의 '소설, 잇다' 시리즈는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만남을 통해 한국 문학의 근원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다시, 또 함께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시리즈로 그 세 번째 책은 이선희와 천희란의 소설을 함께 보여준다. 식민지 시대라는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게 된 이선희의 소설은 파격적이었다. 세련되고 도시적이며 예상을 벗어난 이야기 전개에 근대 문학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이 책에는 이선희의 두 편의 장단편이 실려있는데 모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단편 <계산서>에서 아내는 사고로 다리가 절단되는 사고 후 집을 떠났다. 사고로 인해 결혼 생활이 망가지고 늦은 시간 남편이 새 넥타이를 매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애정이 전과 같지 않다는 걸 직감하게 된다. 분명 두 다리가 멀쩡한 다른 '계집'을 만나러 갔을 거라는 생각에 아내는 남편과 동등해지기 위해서 그에게 얻어야 하거나 그에게서 빼앗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그러고는 남편이 죽어야 수지 타산이 맞을 거라는 계산서를 들이민다.


​장편 <여인 명령>은 한 여성의 지위 변화와 몰락을 통해 당시 결혼제도의 불합리와 자유연애의 허상을 보여준다. 여자전문학교 학생인 주인공인 '남숙채'는 '유원'과 연인 사이였지만 숙채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유원의 검거로 헤어지게 된다. 이후 숙채는 대학생, 백화점 점원, 술집 여급 등의 변화를 겪고 김 의사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는다. 하지만 그는 어릴 적 혼인한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었고 뒤늦게 알게 된 숙채는 불안정하고 고된 삶을 이어나간다. 김 의사는 전처와의 이혼을 진행하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이에 숙채는 유원을 찾아가 자신의 아들을 입적할 것을 명령한다.


이선희 소설 속 여성들은 고통과 비애로 인해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서 남성에 대한 피해 의식과 보상 심리가 기저에 깔려 있지만 그녀들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불행에서 탈피하려 한다. 남편의 목숨을 원하거나 자신의 아들을 입적하라는 명령함으로써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자아를 확립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도적 사회적 한계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모습이 인상 깊게 남는다.


​이선희의 소설은 현대에 읽어도 단연코 파격적이다. 그 때문인지 천희란의 소설 <백룸>이 다룬 레즈비언, 커밍아웃 등의 소재가 오히려 평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과거와 현재의 소설은 시대를 달리하고 있지만 탈출불가능한 미궁에서 자아를 찾아 출구를 향해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지금의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건 바로 한계를 벗어나려는 용기가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나는 내 남편이 자동차에 치이거나 혹여 뜀박질하는 말발굽에 채여서라도 다리 하나가 없어지기를 바랐다.
p. 20 <계산서>


나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받고 있다는 심리적 부담의 정체를 캐물었다. 그러나 그녀가 실제로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요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로 그 사실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p. 426 <백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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