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여고에 다닐 적에, 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이 싫었다. 나는 뭔가 ‘다른’ 자극을 원했던 것 같다. 다른 생각, 다른 깨달음, 좀더 수준 높은 이성(理性).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까닭이 마치 여학생 공동체에 있는 양 착각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만약 내가 남자라서 남학생 사이에 있었다면 더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

페미니즘, 곧 여성주의는 내게 축복이었다. 내 존재를 긍정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 여성인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내 욕망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가해자’인 남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내 정체성에 ‘만족’했고, 더 고민하지 않았다. 그냥 저항하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저항의식에 ‘안주’하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그러나 여성주의는 안주해야 할 해답이 아니었다. 이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면서,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35쪽)는 데에 아프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민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나는 언제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전에 어느 남자 후배가 여자 후배에게 커피를 타달라고 했는데 그 여자 후배가 커피를 타주려 하자, “자기가 직접 타 마시라고 해. 팔이 없어, 다리가 없어?”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팔이나 다리가 없다면 자기 스스로 커피도 타지 못하는, 좀 모자란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린 말 아닌가. 정말 팔이나 다리가 없는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떨까. 그런가 하면 나는, 여자 후배에게는 언제든지 생각나는 대로 잘못을 지적하고 조언해주는데 남자 후배에게는 자존심 다칠까봐 한 번 더 생각하곤 한다. 남자 후배가 더 경력도 나이도 많은 까닭도 있지만, 정말 그것이 전부일까. “여성의 타자 역시 여성이 아니라면, 이미 가부장제 사회가 아닐 것이다.”(79쪽) 여성 스스로 가부장제 질서를 내면화하지 않은 사회는, 이미 가부장제 사회가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생각과 태도에 대해서도 계속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솔직히 나는 가끔 의식적으로 웃어주고, 의식적으로 목소리에 애교를 싣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은 여성에게 억압이자 자원”(156쪽)이란 걸 무심결에 알고 있었을까.

머리가 아프다. 페미니즘은 곧 도전, 그러니까 끊임없는 문제 제기인 것이다. 하지만, 모순덩어리인 내가 가끔은 문제를 제기할 줄 알 때, 나는 내가 대견하다. 그래, 나는 누군가 나 자신을 ‘여자’로만 취급하려 할 때는 분명히 저항해온 것 같다. 각자 다른 감성을 지니고, 다른 역사와 관계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을 그냥 ‘여자’라는 단일한 존재로 치부해버리는 폭력에 대해. 하지만 혹시 나 아닌 다른 여성들에 대해서는, 나 역시 그냥 ‘여자’로만 취급하지 않았을까?

(덧붙이고 싶은 말)
53쪽, “남성은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남성 명사에는 인(人)이 붙지만, 여성 명사에는 녀(女)가 붙는다. 우리말 여성형 지칭에서 유일하게 인 자가 붙는 경우는 미망인(未亡人, 남편을 따라 죽지 않은 여자)뿐이다”고 했는데, 한 가지 더 있다. 그건 바로 ‘부인’이다. 한글로는 부인 하나지만, 한자로는 두 가지다. 夫人과 婦人. 夫人은 남의 아내나 자기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이고, 婦人은 결혼한 여자란 뜻이다. 결국 결혼해서 남성에게 종속된 경우다.

101쪽, 다이어트 뒤에 오는 “폭식은 남성의 투사(投射, 남 탓으로 돌리는)와 대비되는 여성의 내사(內射, 자기 탓으로 돌리는)로 일종의 우울증인데, 사회가 싫어하는 여성이 되겠다는 자기 처벌이다”라고 했다. 폭식이 우울증의 일종인 경우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을 보존하려는 본능에 따라 몸이 반작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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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2006-10-30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이어요. (으잉?) ^^;;; 고마워요 따우님~
참, 이 책을 선물해주신 로드무비님 고맙습니다~

2007-01-31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랑비 2007-01-31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아, 소심하다니깐요. ^^ 폐, 많이 끼치고 살아요 저. 님께도 폐 끼친 적 있잖아요. 그냥 폐 끼치는 거하고 존재감 자체에 생채기를 내는 건 다르다고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