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이제 보니 루이스 세풀베다는 남자이고, 먹물이었다.
당연한 일인데, 그걸 여태 깨닫지 못했다.
남성성이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교육받고 살다 보니,
예민하게 굴지 않으면 ‘당연한 일’로 취급되는 일 중에서
그건 당연한 게 아니라 남성적인 생각과 판단에 따른 일일 뿐이란 걸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뭐, 봐줄 만하다. 나에게 파타고니아를 보여주었으니까.
파타고니아를 그리워하게 해주었으니까.
[세상 끝으로의 항해](열린책들에서 [지구 끝의 사람들]로 다시 나온)를 읽었을 때부터
파타고니아는 내게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리운 곳’이 되었다.

작가가 칠레를 떠나게 된 이야기, 떠나서 남미를 떠돈 이야기,
유럽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파타고니아로 온 이야기,
그리고 마침내 할아버지의 고향인 스페인 마르토스를 찾아간 이야기...
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사람들 이야기다. 작가가 만나고,
바로 이 작가를 만든 사람들.
저항, 자유와 자신감, 그리고 자연 앞에서 삼가는 태도가
마치 핏속에 흐르는 유전자와 같은 사람들.
팔라시오스 기장, 그는 어디로 갔을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인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주인공을 연상케 하는 그는.
"파타고니아 특급열차"는 이제 없어졌다고 한다.
아, 예전에 수원과 인천을 다니던, 수인선 같았을 것 같은 그 열차는
이제 수인선처럼 영영 탈 수 없겠지.

사실,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 이따위 생각은 환상일 뿐일지 모르지만,
내게도 꿈꾸는 건 허락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 책은 꿈을 좇아 힘들게 몸을 놀린 기록이니까.

공화파, 혹은 사회주의자, 혹은 아나키스트인 할아버지는
스페인 파시스트 정부를 피해 남미의 칠레로 도망쳤고,
손자는 반대로 칠레의 독재 정부를 피해 남미를 떠돌다 스페인으로 간다.
그러나 손자에게 고향은 칠레임이 틀림없다.
그가 할아버지의 고향인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마르토스에서 자신의 ‘뿌리’를 만났다 해도.
그랬으니까 [귀향]이란 소설을 썼을 것이다.
마르토스는 할아버지의 꿈이 시작된 곳이니까, 그곳은 ‘꿈’의 상징이니까.

이 책에서 알게 된 새로운 작가, 브루스 채트윈.
그가 쓴 [파타고니아], 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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