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조희문 선생이 [서평문화]에 기고한 글이다.

출처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웹진(http://www.kpec.or.kr/site/web/sub.asp?menuKMCD=KP0065&iframesrc=sub%5FframeView%2Easp%3FmenuKMCD%3DKP0065%26selKMCD%3DKP0115%26BKNO%3D973)

 

 
한국영화사 연구의 새로운 시선
 
서명 :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글쓴이 : 조희문 (인하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
저/역자 : 김려실 지음
출판사 : (주)도서출판 삼인
2006-12-20 / 352쪽 / 18,000원

영화연구 분야에서 한국영화사 연구는 새로운 관심 대상이다. 1999년 <쉬리>가 흥행바람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한국영화는 갑작스럽게 문화의 중심으로 진입했다. <공동경비구역>, <친구>,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 <괴물>로 이어진 흥행신기록 돌파는 영화계 내부는 물론 우리 사회 전체가 영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과정이었다. 영화제작은 단기간에 큰 이익을 낼 수 있는 유용한 투자 대상이 되었고, 관객을 불러들이는 극장은 문화가 상품으로 거래되는 장터 역할로 주목받았다. 흥행바람을 일으킨 영화는 동시대적인 문화의 화두로 떠오르며 바람을 탄 산불처럼 더 많은 관심과 지지를 불러 모았다. 오랫동안 싸구려 저질문화의 상징처럼 홀대 받던 한국영화는 시대를 리드하는 첨단문화로 격상했고, 미래의 대안처럼 위상이 바뀌었다.


변화는 학계에도 나타났다. 한국영화의 비약적 성장은 현상과 원인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촉발시켰고, 많은 연구자들이 한국영화로 방향을 돌렸다. 한국영화가 산업적 혹은 문화적으로 중심에 진입 할수록 연구자들의 수도 늘어났다.


한국영화사 연구는 세 단계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 1960년대의 한국영화사 연구는 영화가 서양에서 전래한 이후 어떤 과정을 통해 한국적인 문화로 정착되었는가에 대한 경험적 정리 수준으로 접근하고 있다. 안종화의 『한국영화측면비사』를 비롯하여 노만의 『한국영화사』, 이청기의 『한국영화의 전사단계와 발생기적 특성에 관한 연구』,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는 주로 국내에서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때서부터 해방 시기까지의 무렵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들 연구자들은 영화계에서 직접 활동했거나, 일제 강점기 시대에 성장기를 보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어느 경우든 영화는 멀리 떨어진 ‘과거의 현상’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이나 경험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측면비사』는 영화계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사건과 영화인들의 활동, 그들이 만든 성과에 대해서 일화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영화계의 내부 사정을 살피는 데는 더 없이 유용한 성과로 주목받았다. 오랜 동안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전거로 존재하며 후속 연구의 인용자료 역할을 했던 이유다. 한국영화의 초창기 시절부터 직접 활동한 원로 영화인이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서술한 ‘진술서’의 내용에 대해 시시비비를 걸만한 경력이나 자료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노만, 이청기, 이영일의 연구도 안종화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


이 시기의 연구는 한국영화의 역사를 기록했다는 점에서는 한국영화의 탄생과 성장기를 같이 보낸 세대들의 1차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오류와 왜곡의 씨앗을 뿌리는 작업이기도 했다. 의도적이지는 않았겠지만 경험과 기억에 의존한 정리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탓에 사실의 부정확함, 연대기적 순서의 혼란, 일제강점기 시대에 대한 과거사적 부담으로 인한 과민한 생략과 특정한 인물, 작품에 대한 영웅화 작업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 영화가 처음 소개되는 것은 담배회사인 영미연초회사가 자사 판매의 빈 담뱃갑 10개를 가져오면 영화를 보여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 같은 경우는 영화의 대중적 인기가 확산되자 뒤늦게 담배판매 시장에 뛰어든 영미연초회사가 오히려 영화를 판촉에 이용한 사례를 거꾸로 설명한 것이다. 일본이 중국, 미국과 전쟁을 시작하여 극단적인 통제와 선전체제로 전환하는 1940년대 이후에 제작된 군국주의 선전 영화들은 한국영화 목록에서 사실상 제외하고 있다. 언급할수록 일본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결과로 이어지며 한국영화의 독자적 위상은 훼손된다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이같은 시각은 나운규의 활동과 그의 작업에 대한 과장된 평가로 이어졌다. 1924년에 단역배우로 영화 활동을 시작한 이후, 1936년 <오몽녀>의 감독을 마지막으로 사망할 때까지 12년 동안 배우, 감독, 시나리오 작가, 제작자로 활동한 나운규는 대표적인 영화인이자 영화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의 역할과 공헌에 대해서는 일제에 저항한 민족투사의 이미지를 크게 강조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1992년에 조희문이 박사학위 논문으로 발표한 ‘초창기 한국영화사연구’는 야사와 일화, 감성적인 정서에 의존하던 영화사 연구의 경향을 사료와 기록 등을 바탕으로 한 실증적 연구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전의 연구가 영화제작 단계에서부터 시작한 것과는 달리 영화가 국내에 유입되어 새로운 문물로 확산, 정착되는 과정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정리함으로써 ‘한국영화’의 개념과 범주를 새롭게 설정하는 단계로 전환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자료에 근거한 실증적 접근은 이전의 작업성과 또는 상식처럼 통하던 여러 가지 단정들을 부정하거나 반박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후 실증적 연구는 조혜정의 박사학위논문 ‘미군정기 영화정책에 관한 연구’(중앙대,1997), 복환모의 ‘식민지통치에서의 조선총독부의 영화정책’(와세다대, 2005) 등으로 확산되며 한국영화사 연구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최근에 나온 이화진의 『조선영화-소리의 도입에서 친일영화까지』(책세상, 2005), 김려실의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1901~1945년의 한국영화사를 되짚다』(삼인, 2006)는 한국영화사 연구가 새로운 단계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증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문화적 상상력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는 영화가 국내에 도입되는 과정에서부터 말머리를 끌어낸 뒤 일본 제국주의가 어떻게 영화를 식민지 통치에 활용했는가에 대한 변천을 꼼꼼한 자료와 함께 서술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대 선전영화들이 성행하던 무렵의 작품들 -<미몽>, <군용열차>, <어화>, <지원병>, <복지만리>, <반도의 봄>, <집없는 천사>, <그대와 나>, <망루의 결사대>, <조선해협>, <젊은 모습>, <사랑과 맹세>-에 대한 텍스트와 콘텍스트적 교차를 해석하고 있는 부분은 이 분야 연구의 진전이다. 친일과 반일,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저항 같은 이분법적 시각을 벗어나 친일과 선전을 강요하던 이런 영화들이 대중에게 어떻게 비춰졌는가를 들여다봄으로써 친일영화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국 일본은 영화를 통해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투사하려 했지만, 관객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나름의 시각으로 재구성해 다른 가치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은 흥미롭다. ‘제국-문명의 상징계가 투사한 빛에 결코 동화될 수 없는 식민지가 원시적 어둠 속에서 실재계와 접촉하게 되는 문화적 장소(location of culture)’가 바로 식민지 조선의 영화관이었다는 대목은 식민지 시대의 한국영화(조선영화)에 대한 복합적인 위상을 설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대의 한국영화 중에서 대표작으로 꼽히는 <아리랑>(1926)의 영화적 위상에 대해 ‘항일영화’ 또는 ‘항일영화는 조작된 신화’라는 영화연구자들 간의 논쟁을 아우르면서 ‘의도된 모호성’을 반영한 영화라는 새로운 주장으로 전환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저자야말로 의도적으로 모호한 평가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 영화의 감독과 주연, 원작이 이전의 평가대로 나운규가 맞는다면 이후 영화가 거둔 열광적인 지지가 ‘항일영화=민족영화’라는 등식에 부합하는 것이지만, 나운규가 이 영화를 감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따른다면 이 영화가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민족영화이자 항일영화’라는 평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나운규가 이 영화의 감독이라는 주장과 감독하지 않았다는 주장 어느 쪽도 확정하기 어려운 상태에서(적어도 저자 입장에서는) 또한 <아리랑>의 내용이 항일적 표현을 직설적으로 드러냈다는 흔적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아리랑>의 위상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논쟁을 흡수하는 대안으로 의도적인 모호함을 담았고 관객들이 그것을 읽고 반응했다는 논리는 비단 <아리랑>에만 한정되기 어렵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수업료>라는 영화에 대해 조선총독부 측에서는 좋은 영화라고 홍보했지만 일반관객들은 별달리 열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당시 수업료를 내지 못하는 상당수 학생들의 어려운 처지를 드러내는 사실주의 적 경향으로 해석한 경우도 얼마든지 ‘의도된 모호성’에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아리랑>이 ‘의도된 모호성’을 담은 영화라는 저자의 평가는 필름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아리랑>의 추상적 가치에 또 다른 의미의 신화를 더하는 결과로 연결되고 있다.


또 한 가지는 자료인용의 원칙이랄까 윤리에 관한 부분이다. 한국영화사 연구 특히 초창기부터 일제강점기 시대의 기간은 부족한 자료와 기록을 재구성해야 하는 부분이 태반이다. 자료의 발굴과 그것에 근거한 다양한 평가는 한국영화사 연구 분야의 중요한 기초 역할을 한다. 그러나 몇 번의 인용을 거듭하는 사이에 자료의 출처가 모호해지며, 심한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연구결과처럼 오인되는 사례도 자주 나타난다. 이 책에서도 국내에 영화가 전래되는 시기와 경로를 정리하고 있는 ‘영화의 전래를 둘러싼 주장들’, ‘활동사진과 극장체험들’, ‘상상된 민족영화 <아리랑>-영화소설과 시나리오’ 같은 부분들에서 서술하는 내용들 중에서 재인용의 근거를 밝히지 않은 채 1차 조사인 것처럼 자료를 동원하는 부분이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는 대목은 유감스럽다.


그러나 이같은 몇 가지 부분들을 제외한다면 일제강점기 시대의 한국영화사를 과거의 자료와 기록을 재구성하는 단계에서 현재적 시각으로 평가하는 단계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성과로 꼽을 만하다. 최근에 발굴된 필름을 실제 연구 자료로 활용하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연구의 새로운 단계를 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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