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회사메일에 "아침울림"이란 제목을 단 메일이 들어온다. 문광부에서 "정기메일서비스"라며 보내는 것인데,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읽을 만은 하다. 내용은 문화계 인사들의 간단한 칼럼인데, 오늘은 만화가 이현세 화백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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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개나리와 목련이 피었다. 그 뒤를 따라 곧 온 산이 진달래로 붉게 물들겠다.
내가 자란 경주에도 예외 없이 진달래가 지천에 깔려 있었다. 어린 시절 이때쯤이면 아버지는 땔감을 구하기 위해 지게를 메고 산에 올랐다.
아버지는 땔감인 아카시아를 한 짐 채우고 나면 식용으로 쓸 칡을 캐거나 산두릅 나무를 툭툭 베어서 땔감 위에 덤으로 쌓는다.
그리고 나서 진달래가지 하나를 낫으로 쳐서 봄 처녀가 머리에 꽃을 꽂듯이 나뭇짐 위에 꽂고 산을 내려왔다. 아버지가 나무하러 갈 때 어쩌다 나를 데리고 가면 나는 너무나 신이 났다.
갈 때는 지게 위에 올라타고 흔들흔들 가마 타는 기분이 그만이었고 산에서 갓 캔 칡을 제일 먼저 질겅질겅 씹고 내려오는 맛도 좋았다. 하지만 진짜 신나는 일은 다른 데 있다.
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장터가 있었고 장터 입구 양편으로 국밥집이 쭈욱 있었다. 주로 개장국과 돼지머리 국밥이었다.
아버지는 집으로 오기 전에 항상 이곳에 들렀다. 이곳에서 아버지는 한숨을 돌리고 막걸리 한 사발을 쭈욱 들이킨다. 그리고 내게는 국밥 한 그릇을 시켜 준다. 고깃국이 귀하던 때라서 나는 국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강아지처럼 바닥까지 핥았다.
원래는 막걸리 한사발에 국밥 한그릇이 아버지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정량이었지만 내가 그 정량을 빼앗아 먹었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 때 아버지의 그 웃는 모습이, 그 빙그레 웃어주던 미소가 무엇을 말하는지 나도 아이를 두고서야 알았다.

년 봄, 모처럼 쉬면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때 읽은 책들 중에 <허삼관 매혈기(許三觀 賣血記)> 라는 책이 있다.
전기에 감전된 듯 내게 참신한 긴장과 감동을 준 이 책에서 나는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중국의 3세대 작가인 <위화>가 쓴 이 책은 가족을 위해 절대 절명의 순간마다 피를 뽑아 팔아서 살아가는 허삼관이란 남자의 고달픈 일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소설은 결코 어둡지 않다.
슬픔과 웃음을 교묘하게 넘나들며 중국의 문화혁명시기를 광대처럼 타고 넘는다.
나이가 들어 세 아들을 모두 키운 허삼관은 어느 날 갑자기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매혈을 결심한다. 여태까지는 피를 뽑은 후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항상 돼지고기 한 근과 독한 황주 1잔을 마셔왔지만 이번에는 갑자기 돼지고기 한 근과 독한 황주 1잔을 마시고 싶어서 매혈을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피를 사 줘야하는 젊은 혈두는 <늙은 피는 가구쟁이들이나 사지 병원에는 필요없다>고 허삼관을 비웃으며 돌려보낸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서 엉엉울며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허삼관을 아내 허옥란이 돼지고기 한 근과 황주 1병을 시켜놓고 달래며 허삼관과 함께 젊은 혈두를 향해 갖은 악담을 쏟아내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이 난다.
이렇게 허삼관은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고, 우리 아버지들의 얼굴이다.

작가 위화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가 정치적 인간이든 대중소비적 인간이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작가라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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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부분보다, 아버지가 나무를 다 하고 나면 진달래가지 하나를 쳐서 지겟짐 위에 꽂고 내려왔다는 말에 그 광경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편견일지 모르지만) 필시 무뚝뚝했을 아버지의 마음에 슬쩍 깃든 그 서정과 낭만이 애틋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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