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지는 듯 하면서도

반복해 들을 수록 빠져드는 음악을 구사하는

음악가들을 나는 좋아한다.

 

ego-wrappin,

kings of convenience,

myrra,

eva cassidy,

damien rice,

sean lennon etc.

 

ego-wrappin의 음악 중 특히 좋아했던 곡은

"Bird"라는 곡이었다.

 

앨범을 구할 수도 없었고, 인터넷으로 아무리 찾아도

검색되지 않았던 그 곡을

단골술집 사장 언니가 다운 받아 놓은 후,

그 곳에서 술을 마실 때마다,

술집에 들어서자 마자,

술을 마시고 나서 정리하고 나갈 때는

꼭 그 곡을 틀어달라고,

그 곡만 다 들으면 가겠다고,

참 많이도 사람들을 괴롭혀댔다.

 

"Bird"를 부르는 여자 보컬의 목소리는

정말 너도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따듯한 위로를 해주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언젠가는

날 수 있을 거라고,

지금의 현실은 네가 겪어 볼 만한 강도의 아픔이라고 말이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이 곡에서 위로를 받는다.

 

음악이 인간의 삶에 허용하는 감정은 과연 어느만큼일까.

우리에게 음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행복과 위로를 놓쳤을까를 생각하면

가끔씩은 아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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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만드는 넋굿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상처란 그 넋굿의 자리로서

그것을 현재 속에 간직하는 흔적이라고나 할까.

다시 볼 때마다,

그 아픔의 과거가 ‘여기’에 살아나고

미래인 다른 하늘이 ‘지금’ 속에 가득 펼쳐지는 곳.

시간의 직선적인 흐름이 무너져 솟구치며 소용돌이치는 곳.

상처를 통해,

마침내 우리는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

 


이인성  <낯선 시간 속으로> 중에서

사진 :  영화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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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우연의 뒷문을 열고 들어온다."
문장을 어디선가 읽고 기억해 두었다.


그 수많은 우연의 뒷문을 열고 들어오는

"운명"이라는 것은

알다시피 하나가 아닌 복수이다.

 

그런데 이 시대의 사람들은

"운명"이라는 단어를

복수가 아닌 단수로 받아들이는 것만 같다.

 

그저 하나, 단 하나의 운명.

 

그렇게 한계를 지어놓고 희소성을 만들어놓아야

"운명"의 운명이 대단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우연히 열어제낀

우연의 뒷문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는

단 하나의 운명일지도

어쩌면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수없이 얽혀 있는

우리의 운명이 말해주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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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삶의 형태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는가,

그 의심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

결국 찾아냈는가.

 

정미경의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그런 의문이 들었다.

오늘의 작가상 수상자인 그녀의 소설집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잘 씌어진 소설이었으나 쉽게 읽히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내 일상의 순간순간을 되짚게 만드는

그 무심한 칼날을 가진 말투에,

결코 무심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거짓말은 아름답다. 자신을, 혹은 상대를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 누구나 거짓말을 하니까.

다만 끝까지 지켜지지 못한 거짓말만이

더 날카로운 칼이 되어

자신을, 상대방을 깊이 찌른다." (190쪽)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재이 역시, 그에게 일상의 모든 걸 말해주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 배신감 같은 걸 느낄 이유도 없다.

그의 감추인 부분을 끝내 모르는 채로

그리고 모르는 체하며 살고 싶다.

너의 외로움이나 공허감까지 껴안기엔

내 것만도 너무 무겁다." (288-289쪽)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관계'라는 것은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 무엇처럼 느껴진다.

 

너와 나의 명백한 구분,

상대와 나의 동등한 관계.

결국은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폭력을 행사하면서 말이다.

가령, 무관심, 고독, 질투, 집착, 고통 등등등.

 

작가가 말하는 것은 어쩌면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각각의 사람들을 통해서

 

"누군가와 함께 지낸다는 건,

서로가 자기의 외로움을 몰래 끌어안은 채

살아가야 한다는 걸 깨닫는 일이구나." (188쪽)란 말처럼

 

스스로의 외로움을 끌어안아 줄

누군가를 찾지 말고,

스스로의 외로움을 끌어안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두에게 공통적인 외로움

'관계' 속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외로움을 '견딤'으로서

비로소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 2006.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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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7-06-18 0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의 외로움이나 공허감까지 껴안기엔 내 것만도 너무 무겁다"
맘에 와닿는 글귀에요..^^&

겨울집 2007-06-21 15:41   좋아요 0 | URL
가끔은 이기적인 사회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교통사고가 혼자만 조심한다고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니듯,
혼자만 배려를 베풀다가는
결국 제 갈 길을 못가게 되는 경우도 발생한단 말이지요 ^^;

그러니 더욱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반성해야 할텐데,
어째 갈 수록 자극적인 것들만 보게 되니
왠만한 고독과 슬픔에는
진정이 담기기 힘든 것만 같습니다.

p.s : 배꽃님~ 정말 반갑습니다.
제 페이퍼 첫 댓글을 님이 남겨주셨네요~ ㅋㅋ

2007-06-22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6-22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과연 그럴까?

더욱더 사랑하는 것 밖에는

사랑의 치료법은 없는걸까.

 

우리의 삶을 좌우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감정적인 것이라면,

왜 우리는 그 많은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감정을 분화시키고,

그 속에서 긍정적이라고 분류된 것만을

취하려 하는 것일까.

 

정말 우울과 사랑, 혹은 슬픔과 사랑,

비관과 행복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야만 한다고 강요받고 사는 것일까.

 

사실 누구도 그렇게 강요하지 않지만,

그 강요의 이름이 사회적이어서,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투명한 막을 씌우고 끊임없이

우리의 목을 조르고 있음을

난 왜 이 문장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일까.

 

더욱더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치료법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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