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념의 기(旗) / 김남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 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愛)가 

맑게 가라앉는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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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삶에의 열망과 종교적 염원. 

인간과 신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는 시적 화자의 마음을 형상화한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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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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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부조리를 해소하고 조화로운 합일을 이루고 싶은 소망. 

고독하고 메마른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소망을 

사회적 부조리와 모순의 해소라는 공동체적 목표와 함께 다룬 시이다.  

물은 합일과 생명감을, 불은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정화하는 것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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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 한해(情天恨海) / 한용운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정(情)하늘을 따를소냐. 

봄 바다가 깊다기로 

한(恨) 바다만 못하리라. 

 

높고 높은 정(情)하늘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손이 낮아서 

오르지 못하고, 

깊고 깊은 한(恨)바다가 

병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 

건너지 못한다. 

 

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으면 

정(情)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다리가 길어서 건널 수만 있으면 

한(恨)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 

 

만일 정(情)하늘이 무너지고 한(恨)바다가 마른다면 

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 

 

아아, 정(情)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恨)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무릎보다는 얕다. 

 

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짧든지 

정(情) 하늘에 오르고 한(恨) 바다 를 건너려면 

님에게만 안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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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情)과 한(恨)이라는 대립되는 개념이 '임'이라는 초월적 존재로 합일되는 경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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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반(半) / 정지용 

 

내 무엇이라고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의 고흔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 

바다에서 솟아 올라 나래 떠는 금성(金星). 

쪽빛 하늘에 흰 꽃을 달은 고산 식물(高山植物).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스로 한가로워―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어지며 

구비구비 돌아간 시름의 황혼(黃昏)길 위­― 

나―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임을 고히 지니고 걷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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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높은 존재, 

인간은 불완전하고 상대적이며 낮은 존재로 인식하고 

절대적 존재에 대한 경배와 묵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의 반'은 불완전하지만 그대와 동질성을 나누고 싶은 소망을 표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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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동(九城洞) / 정지용 

 

골작에는 흔히 

유성(流星)이 묻힌다. 

 

황혼(黃昏)에 

누뤼가 소란히 쌓이기도 하고 

 

꽃도 

귀양 사는 곳 

 

절터ㅅ드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산 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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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고 적막한 자연의 세계. 

시인의 고고한 정신적 경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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