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1 /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 가도 퍼 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 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 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 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 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섬진강을 어머니의 젖줄로 표현하여 질박한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는 남도 사람들의 가슴 속 상처가 된 응어리진 한과 설움을 보여 주는 한편, 그들의 설움을 위로해 주는 포용력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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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꽃 / 이용악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채를 드리운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띠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 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도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 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우리 나라의 토종 꽃이면서도 오랑캐꽃이라고 불리게 된 제비꽃의 유래담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오랑캐꽃의 이미지와 일제 강점기에 고통받는 민족의 현실을 등치시킴으로써, 망국민의 설움과 비애를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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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 이용악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白茂線)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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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으며, 실제로 고향이 북쪽인 작가의 전기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창작되었다. 전체 5연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의미상으로는 '기-승-전-결'의 전형적 형식에 수미상관의 구조를 곁들인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시에서 '눈'는 잉크병마저 얼게하는 혹한을 상징하고, 이러한 추위 속에서도 가족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하게 만들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위치해 있는 서울이라는 공간과 고향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함으로써,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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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小夜)의 노래 / 오장환 

 

무거운 쇠사슬 끄으는 소리 내 맘의 뛰를 따르고 

여기 쓸쓸한 자유는 곁에 있으나 

풋풋이 흰눈은 흩날려 이정표 썩은 막대 고이 묻히고 

더러운 발자국 함부로 찍혀 

오직 치미는 미움 

낯선 집 울타리에 돌을 던지니 개가 짖는다.  

 

어메야, 아직도 차디찬 묘 속에 살고 있느냐. 

정월 기울어 낙엽송에 쌓인 눈 바람에 흐트러지고 

산짐승의 우는 소리 더욱 처량히 

개울물도 파랗게 얼어 

진눈깨비는 금시에 내려 비애를 적시울 듯 

도형수(徒形囚)의 발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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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질곡 속에서 죄수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도형수'라는 시어에 잘 나타나 있다. 잃어버린 모성에 대한 그리움으로 어머니가 묻혀 있는 '차디찬 묘'를 찾아가지만, 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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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앞에서 / 오장환 

 

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거리다 

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양귀비 끓여다 놓고 

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지운다. 

 

간간이 잿나비 우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 

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 간다. 

 

예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 

상고(商賈)하며 오가는 길에 

혹여나 보셨나이까.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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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는 고향 근처의 주막에서 자신이 떠난 동안의 슬픈 고향 소식을 전해 들으며, 집집마다 누룩을 띄워 술을 빚는, 전나무 우거진 고향 마을은 이미 이 지상에서 사라지고 없음을 실감한다. 완전한 고향을 찾지 못하고 떠돌이 장꾼들에게서 고향의 정취만이라도 확인하려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통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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