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같이는 / 복효근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 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 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 내는 물방울의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 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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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방길 / 유재영 

 

어린 염소  

등 가려운 

여우비도 

지났다. 

 

목이 긴 

메아리가 

자맥질을 

하는 곳 

 

마알간 꽃대궁들이 

물빛으로 

흔들리고. 

 

부리 긴 

물총새가 

느낌표로 

물고 가는 

 

피라미 

은빛 비린내 

문득 번진 

둑방길 

 

어머니 

마른 손 같은 

조팝꽃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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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누군가를 기다리는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가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 너'이지만, 화자는 오히려 '너'에 대한 기다림을 설레는 기대감과 행복하고 충만한 심정으로 그린다. 이 작품은 이렇게 만남의 시간이 될 미래와, 기다림의 시간인 현재에 대하여 다같이 축복을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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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런 2009-03-31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때마다 가슴설레는 시인데.. 이 시는 시인이 모 잡지에 기고하기 위해 급하게 그냥 휘갈겨 쓴 시라지요.. 그 얘기를 듣고는 황지우시인의 천재성에 감탄을 하면서도.. 시인이 휘갈긴 시를 나는 이렇게 가슴속에 품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시인에 대한 얄미운 감정이 들기도했어요~ㅎㅎ;;;

Somnus 2009-04-04 22:02   좋아요 0 | URL
이 작품이 그런 경위로 탄생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정이 들어서 가장 좋아하는 시 중 한 편이 된 것이 최근인데, 이렇게 댓글까지 달리니 공연히 뿌듯해지네요. 감사드립니다.^^
 

성에꽃 / 최두석 

 

새벽 시내 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 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 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 

어느 추운 겨울, 새벽의 시내 버스 차창에 어린 성에를 통해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시대 현실에 대한 아픔을 함께 그리고 있다. 화자가 동시대인들의 삶의 모습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버스를 탔던 사람들이 남긴 숨결을 통해 느낀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한편, 이 시에서 '엄동 혹한'은 군사 독재가 외피만 바꾼채 연장되고 있던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을 상징하는데,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라는 부분에서 이 점이 분명히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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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 송찬호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지버얺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 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 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 

구두를 제재로 하고 있지만, 대상 자체의 속성에서 인과적인 의미의 연결을 이끌어 내고 있지는 않다. 이 시는 일관된 의미의 흐름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유로운 연상을 통해 이미지의 계속적인 확산을 보여 주고 있는데 결국 이 시에서 '새 구두'는 미래의 삶에 대한 조그만 희망이자 위로를 의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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