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 / 유치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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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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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역사에 길이 빛날 논개의 애국심을 그리고 있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색채 대비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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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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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비 /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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