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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책을 읽고 이틀이 지났다. 비로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책표지를 쓰다듬어본다. 위대한 작품, 감히 소설 앞에 위대하다는 수식어를 붙여본다. 어울린다. 나는 절대 성취할 수 없을 것 같은 것을 코맥 매카시는 만들어냈다. 나 뿐만 아니라 이전의 누구도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을 그는 그렸다.
<로드>의 가장 큰 성취는 '세계'다. 나는 대단한 소설을 평가할 때, 그 소설이 갖고 있는 세계를 본다. 그것이 확고하고 명징할 때, 종이 위의 검은 기호에 불과한 것들이 비로소 단단한 육체를 획득한다고 믿는다. 인물이나 문장은 물론 그 다음이다(때때로 인물이나 문장이 고스란히 하나의 세계일 때도 있다. 김훈의 문장이 내겐 그랬다). <로드>의 세계는 무언가에 의해 멸망해버린 문명으로부터 출발한다. 잿더미가 된 도시 위에 단 두 사람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 <로드>는 그들에게 이 세계를 던져준다. 그곳은 내가 본 곳 중 가장 구체적인 멸망이 있는 세계다. 그곳은 "재의 큰 파도들이 위로 솟구쳤다가 광야를 거쳐 멀리 쓸려내려가는" 곳이며, "해안 평원의 강들이 황무지가 된 농장들을 가로지르는 납빛 뱀처럼 보이"는 곳이며, "하루하루가 헤아림도 없이 달력도 없이 진창을 기어가듯 지나가는 곳"이다. 그리고 그 곳은 내가 본 세계 중 가장 비현실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존재감 있는 세계다. 그 존재감이 이 소설을 한 차원 높은 곳으로 격상시켜준다.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책을 읽은 뒤에도 이 소설을 떠올리는 동안만큼은 결코 누구도 이 세계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로드>에서 빛나는 다른 것은 '문장'이다. <로드>의 문장은 모래주머니를 연상시켰다. 그것은 매우 무겁지만 다행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무거웠다. 안 된 일이지만, 아마 어떤 사람들은 감당하지 못하고 중간에 내려놓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대부분 여백을 기다렸기 때문일 것이다. 로드의 문장에는 여백이 없다. 생각할 시간도 없다. 그냥 문장이 있고, 또 문장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멸망한 세계를 가장 잘 떠받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임무는 작가가 지시했다기 보다, <로드>를 구성하는 세계가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떤 문장들은 그것을 쓰는 작가마저도 질식시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단단하다. <로드>의 문장에는 타협이 없다. 그것이 독자든, 작가든. 그저 멸망한 세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잿빛 문장들일 뿐이다.
<로드>의 감동은 '살아남은 두 사람'에게 있다. 남자와 소년. 그들은 <로드>의 세계와 정면으로 맞서는 인간이다. 음식물을 싣고 나르는 한 개의 카트와, 두 발의 총알을 장전한 한 정의 권총이 그들의 전부다. 세상은 멸망했고, 문명은 붕괴되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다른 이들을 살육해 잡아 먹는다. 지구에 단 한 사람이 살아남을 때까지 절망은 계속될 것이다. <로드>의 세계에는 희망이 없다. 신도 없고, 당연히 구원 같은 것도 없다. 남자와 소년은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로드>라는 이야기의 바깥에서 이 세계에 도전하기 위해 온 것만 같다. '남자'는 문명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는 이 세계가 변하지 않을 것을 안다. 그는 이 지긋지긋한 절망을 끝내고 싶다. 그는 죽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걷는다. 남쪽이라고 부르는 목적지에 도착해도 결국 그에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걷는다. 다만 자신의 아들을 이 세계에 혼자 남겨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구하고자 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은 어느샌가 자신의 목숨 이상으로 존재하게 된다. 반면 '아들'은 문명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소년은 늘 자신과 같은 인간의 존재를 그리워한다. 낯선 사람을 만나도 소년에겐 잡아먹힐 것이라는 두려움보다, 동정심과 반가움이 앞선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소년이 숲길로 도망가지 않는 것은, 그가 <로드>가 만들어낸 세계보다 '인간'을 선택한다는 의미에서 빛나는 장면이다. 완벽한 절망의 세계에서 결국 인간은 인간을 구원할 것이다.
<로드>를 떠올리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연상된다. 그러나 이들과 비교하지 않겠다. 그것은 이 작품들에게는 물론이고 <로드>에게도 큰 실례가 될 것이다. 항상 위대한 것들은 단지 그것으로 빛나는 역사를 이뤘다. <로드>는 <로드>다. 그것이 내가 이 작품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