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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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라는 것


<남자의 자리>는 소설일까? 작가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의 존재를 추적하면서,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생각할 때 썼던 그 단어들을 되찾는 일이다. 작가는 추억을 사적으로 꾸미는 일도, 자신의 행복에 들떠 아버지의 삶을 비웃는 일도 없이 담담한 시선과 간결한 문장으로 아버지의 존재를 기억하길 원한다(이상 20-21면).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어떤 조건의 모든 지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47면). 그녀에겐 오직 아버지의 존재, 아버지의 자리, 있는 그대로의 실존을 구현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를 추억하는 일은, 때로 매우 이기적인 기억의 편린들일 때가 많다. 오늘 나의 세계, 그 정황에서 살아가는 나의 존재 방식은 지독히 편향적인 것이어서, 오래된 실체는 종종 가공된 추억으로 미화된다. 그렇게 과거 나의 오류는 숨겨지고, 오늘 나의 낭만적인 행복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작가는 그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가공된 추억은 진실이 아니니까. 그것이 나의 아버지일 수는 없으니까. 





아버지란 존재


아버지는 우울한 시대에 태어나 평생 끊임없는 노력으로 더 좋은 자리에 오르고자 했다. 아버지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는 거친 사내였다. 못된 성질은 그를 지탱해 주는 원동력, 가난을 견뎌 내게 하고 자신이 사내임을 믿게 해주는 힘이었다.(23면)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할아버지는 노름에 빠져있었고, 술에 취해 침울한 낯으로 아이들을 때리고는 했다. 아버지는 배우는 것을 좋아했지만, 할아버지는 그를 학교에서 빼내어 농사 일을 시켰다. 아버지가 불과 열두 살 때였다. 1차 세계 대전이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던 그 때에야 아버지는 군대를 통해 비로소 세상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군대에서 돌아온 그는, 소를 치는 목동에서 공장 노동자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바야흐로 산업화의 시대였다. 그리고 급격한 도시화 과정 속에서 그는 다시 도시의 소상인으로 전업한다. 그 전업은 마치 신분 상승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다시 노동자 신세로 떨어지지나 않을까 전전긍긍(39면)했고, 그 시대는 농사꾼처럼 보인다는 것은 진보되지 않았다.(76면)고 여겼다. 


아버지는 성실했다. 할아버지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술도 입에 대지 않고 오직 조금 더 나은 신분이 되고자 어느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다. 그는 언제나 더 나은 세상을 바랐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늘 자신의 자리를 확인했고, 더 이상의 욕심은 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떤 강박 비슷한 것도 있었다. 가진 것 이상으로 폼을 잡아선 안돼!는 그가 입만 열면 하는 소리였다(62면). 그래서 가족들은 늘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생각하며, 여러 행동 수칙과 금지된 언어 목록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비천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드러나는 자신의 존재는 어떤 부끄러움, 또는 굴욕 같은 것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사투리는 할아버지의 유일한 언어였고 아버지에겐 뭔가 낡고도 추한 것, 즉 열등함의 표지였다(66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항상 상대를 힐난하는 듯한 거칠고 천박한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고, 심지어 서로를 염려해 주는 말을 나눌 때조차 그랬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는 달리, 자식의 의견을 존중하였지만 그렇다고 예의 바른 언어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딸의 고유 영역을 인정해주는 것이었지만, 그것도 굳이 무관심한 듯 거친 언어로, 마지못해 그런 척 하였다. 딸은 늘 모욕당하는 느낌이었고 아버지와는 다른 영역의 존재이고 싶었다. 그래서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부녀 간에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란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예절 바르게 대하는 모습은 내게는 오랫동안 신비로 남아 있었다.(78면)


아버지에게도 꿈이 있었을 것이나, 꿈을 이루는 것보다 체념이 더 익숙한 시대를 숙명처럼 살았다. 하루하루의 고단한 일상이 끊임없이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는 없다고 확신했다(86면). 다만 아버지는 그저 먼 발치서 자신과 다른 존재로 자라는 딸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 마음 속엔 딸이 자신보다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81면)을 꿈처럼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127면)





아버지의 꿈이었던 딸의 욕망


딸은 언제쯤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챈 것일까? 딸은 언제나 더 나은 세계의 다른 존재가 되려는 꿈을 향해 살았고, 마침내 그런 존재가 되었다. 딸은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아버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예의 바르고 품위 있는 친구들이 집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최선을 다해 준비하였고(아버지는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저 일상적인 방문에 불과했을 것에 특별한 축제의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내 친구들에게 경의를 표했고, 세상 예절을 잘 아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104-105면), 딸이 사귀던 정치학 전공의 애인을 데려왔을 때에는 자신과 사위 사이에 놓인 교양과 힘의 간극을 그저 한없는 베풂으로써(106면) 맞이하였다. 그러나 딸은, 아버지의 그런 정성마저 어찌할 수 없이 드러나는 어떤 존재의 열등성으로 인식하였다. 천박하고 비루한 삶의 자리, 딸은 작가가 되어서야 그 천박함의 다른 면들을, 어쩌면 그 본질을 위태롭게 기록한다.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왠지 좁은 길을 아슬아슬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사람들이 천하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 회복과 이런 작업에 수반되는 소외에 대한 고발 사이에 낀 좁은 길 말이다.”(57면)


이들 세부적인 것들의 의미 규명은 이제 내게 하나의 절대 명령으로 다가오며, 그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지금껏 그것을 하찮은 것으로 확신하며 억눌러 왔기 때문이다. 모욕당한 기억만이 그것을 간직해 올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욕망에 굴복해 왔던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저 아래 세계의 추억을 마치 뭔가 천박한 것인 양 잊게 만들려고 애쓰는 이 세계의 욕망에 말이다.(79면)


그 시대였을 수도 있고, 아버지였을 수도 있고, 그 시대 어느 아버지나 그랬을 수 있지만, 작가는 자라면서 받았던 숱한 모욕들로 그 기억을 정당화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제, 자신의 자리, 자신의 세계가 가진 욕망이 아버지의 자리를, 아버지란 존재를 천박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야 만다. 작가는 자신의 욕망에 굴복하였음을 자백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제 늙었고 바짝 오그라들고 있었다.(95면) 위장에서 종양이 발견되고 수술을 받는다. 딸은 대학생이 되어 도시로 떠났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이제는 삶을 조금이나마 즐겨 보겠다고(101면) 마음먹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 어려운 상태였다. 딸은 다른 세계의 남자와 결혼하여 다른 나라로 떠나고, 간혹 아이와 함께 부모의 집에 잠시 머무를 뿐이다. 그렇게 부모의 집을 방문했던 어느 날, 드디어 아버지는 초라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아버지의 죽음, 그 과정을 기록하면서도 작가의 감정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작가는 단지, 아이와 방문하여 부모와 함께했던 그 마지막 시간들을 소중히 간직할 뿐이다. 


그렇게 함께 보낸 어느 차분하고도 아름다운 저녁 시간, 그것은 구원과도 같은 순간이었다.”(116면)





아버지, 그 남자의 자리, 그곳에 내가 있었고, 세상이 있었다


두 번째 읽었다. 작은 판형에 129면 밖에 안 되는 책. 처음엔 단숨에 읽었는데, 이번엔 자주 멈춰야 했다. 첫 번째 독서가 세월을 넘어 유유히 흐르는 한 남자의 서사에 막막했다면, 오늘은 그 서사를 그저 관찰자 시점으로 응시해야 했던, 그러나 그 남자의 가장 중요한 존재였던 작가의 담담한 슬픔에 가슴이 울컥했다


내가 부유하고도 교양 있는 세계에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내려놓아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작업을, 난 이제 이렇게 끝냈다.(125면)


아니 에르노는 작가적 은유와 상상력, 해석과 미화를 철저히 배제한 채, 최대한 천천히 아버지를 회상한다. 추억되지 않는 기억의 실체는 무엇보다 아플 것이다. 적나라한 아버지의 자리가 규명될 즈음, 어찌할 도리 없이 드러나는 자신의 욕망을, 작가는 아프게 서술한다. 아버지의 자리에 또한 그녀의 자리가 있었던 까닭이다. 다른 세계에 편입된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오만이었다. 규명된 실체는, 그렇게 드러난 존재는, 또 다른 존재들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아버지, 그 남자의 자리, 그곳에 내가 있었고, 세상이 있었다. 


문득, ‘남자의 자리, 그곳에 거했던 숱한 존재들, 그러나 그곳에서 다른 존재이고자 했던 나의 허영, 그리고 내가 구축하고 결국 아스라이 사라져갈 비루한 나의 자리가 교차했다. 그것은 그리움이기도 했고, 반성이기도 했고, 성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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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걷다 - 르완다에서 강정까지 송강호의 평화 이야기
송강호 지음 / IVP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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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다음과 같이 썼다.

"어쩌면 예수께서 그러하셨다. 불의와 폭력의 땅을 걸어가셨고, 그곳에서 정의와 평화를 꿈꾸셨을 것이다. 그분의 가슴 속엔 시편 85편의 노래가, 아모스 선지자의 소원에 가쁜 숨을 품고 계셨을 것이다. 간혹 서둘러, 당신을 앞질러 내달리려 하던 제자들을 제지하셨고, 그런 군중들을 피해, 그는 홀로 적막한 외로움을 찾아 기도하셨다.

평화, 그 아득함. 그 아련한 기다림을 연습하셨던 것이 아닐까. 오랜 기다림이 야기할 절망을 예견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는 그 기다림을 신신당부하셨던 것은 아닐까. 기다림에 간절함을 담아내되, 오래도록 변치핞은 단단한 소망으로 연단할 것. 그래서 그 아득함에도, 걷고 또 걸을 것. 주저 앉지 말 것. 희망을 포기하지 말 것.

그리고 오늘 강정을 비롯한 불의와 폭력이 가득한 우리의 땅에 평화는 간절하지만, 아득한 희망이 된다. 우리의 싸움은 계속 밀리고, 구럼비는 부서지고, 강정 사람들의 가슴은 세대를 이어 짊어질 트라우마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래도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 우리 앞서, 송강호 선생님이 걸어간다. 그 어딘가 즈음에 문정현 신부님도 계신다. 그리고 우리의 동지들이 그곳에 있다. 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걷는 이들이 있다. 어쩌면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 우리 차례다."(4월 11일, 페이스북 담벼락)

(*이지훈 작가님의 사진입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송강호 박사님의 책이 출간되었다.

그사이 책을 만들던 숱한 시간들이 고통스럽게 지나갔다. 평화는, 희망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닐까. 감당하기 힘든 내용이었고, 저자였다. 평화의 사람은 세상과 불화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을 꿈꾸고 희망하는 사람은 좌절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꿈꾸는 사람 송강호'와 대화하며, 그 불화와 좌절이 우리의 길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송강호 박사님과 숱한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그분과 제주교도소 좁은 면회실에서 눈 맞추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평화의 사람은 빛나는 눈동자로 연대의 마음을 전했고, 난 절망스런 자격지심에 그저 눈물이 났다.




이 책은 세상에 불편한 책이 될 것이다. 아마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그러할거다. 페이스북의 숱한 벗들께서 보내주시는 따뜻한 응원에 힘을 얻는다. 하지만 이 책이 많이 팔릴 것이라는, 섣부른 기대는 접어둔다. 오늘 영업부장과 함께 서점을 돌며 홍보했다. 그들의 예측은 "글쎄요"였다. 기독교 서점일 수록 더하다. 대놓고 "안 팔릴 책"으로 단정 짓는 이들도 있다. 괜찮다. 처음부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께서, 당신을 앞질러 내달리려 했던 제자들을 제지하셨던 것처럼, 그분보다 앞서 달리지 말자.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굳센 마음으로 오늘도 그 길을 걷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원래 평화는 아득한 것이다. 그 아득함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되, 결코 포기하지는 말자.

(*조성봉 감독님의 사진입니다.)




그럼에도 평화와 정의의 길을 소원하는 순례자들이 이 책을 널리널리 알려주셨으면 좋겠다. 믿을 건, 그 길을 걷는 이들과의 연대 뿐이다. 나처럼 한없는 자격지심으로 절망스런 마음들도 함께해주시면 좋겠다. "모든 정의는 연대하여 평화를 이루어 낸다."

(*조성봉 감독님의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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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게 인사하는 법 - 제5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43
김이윤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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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그닥"이었다. 단숨에 읽었으나 강렬한 인상은 받지 못했다. 

허나, 최소한의 시간이 지나 "여여"와의 객관적 거리를 확보한 즈음, 
슬슬 "여여"의 마음들이, 아름아름 넘겨짚었던 그 두려움들이, 알알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난, 모든 이별을 만만히 이겨낼만큼 자란 것이 아니라, 다만 익숙해졌을 뿐인게다. 

모든 잊혀졌던 이별에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 그리하여 "여여"처럼 홀로 설 수 있을 만큼, 
난 충분히 성장하지 않은게다. "여여"가 서른의 막바지에 이른 나보다 더 어른 같다. 

여섯살 된 딸 "예지"를 "여여"처럼 길러야겠다.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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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진보 - 이정희 유시민 대담집
이정무 지음 / 민중의소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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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오늘 밤이면 끝을 볼 것 같다. 책 표지는 좀 촌스러운데, 내용은 좋다. 너무 좋다. 노무현과 유시민을 좋아하지만 민주당은 한나라당스럽고 국민참여당은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민주노동당을 떠나 진보신당을 지지하고 후원하고 있으며, 진보대연합에 대한 기대치보단 진보신당이 독자적인 길을 가는 것이 어떤 면에선 더 의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의 대화를 유심히 따라가며, "아직 오지 않은 진보의 미래"를 낙관할 수는 없으나 기대감은 더욱 깊어진다. '불온한 자유주의자' 유시민과 '진정성 있는 진보주의자' 이정희의 대화가 계속 되었으면 좋겠고, 계속 그들을 지켜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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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피터슨 - 부르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순례길
유진 피터슨 지음, 양혜원 옮김 / IVP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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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처럼 "한 길 가는 순례자"이고 싶었다. 이 책을 보면 '그 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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