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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끝나갈 무렵, 출판사에서 다시 일하기로 결심했을 즈음부터 책 읽기는 호흡의 패턴을 잃었다. 



책은 희망이자 절망이었고, 삶의 일탈이자 권태였다. 



뜨겁던 여름의 쇠락은 가을에 사무쳤고, 난 숨가쁘게 달리면서도 그 서글픔이 살뜰하여 자주 울었다. 



그리고 겨울에 이르렀다. 유난히 소담스런 책들이 나를 맞는다. 



미카미 엔은 책으로 얽힌 인연의 미스터리로 유혹하고, 이서희는 관능의 문장으로 나를 매혹하여 사로잡는다. 



손택의 청춘은 열정을 다스리는 파토스를 선사하고, 김두식의 단단하면서도 따스한 시선은 길 너머 길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렇게 다다른 나의 밤엔 김연수의 노란 불빛 서사가 기다린다. 



책이 다시 삶의 호흡이 될 조짐이다. 예사롭지 않은 겨울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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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둔자 (막심 고리키 지음/이강은 옮김/문학동네)

막심 고리키는 20세기 소비에트연방에 저항하며, 억압받는 프롤레타리아 민중을 혁명으로 이끈 예술가다. 이데올로기의 폭압에 저항하며 인간다움을 견인하는 것이 예술의 소명이었다. 이 책은 고리키의 대표 단편선으로,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입문서로 충분할 듯 싶다. 


2. 진저맨 (J. P. 돈리비 지음/김석희 옮김/작가정신) 

이 소설은 1955년 제2차세계대전 직후 쓰여진 작품으로, 신성모독적, 음란하고도 비속적 언어, 초도덕성으로 무장한 '진저맨'('생강색 머리의 남자'라는 뜻)의 이야기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수백 가지 판본으로 5천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이 작품이 쓰여진, 그리고 독자들의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던 그 시대적 정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절대 가치가 무너지며 불안과 허무가 엄습하고, 그 자리를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대신하던 시기, 바로 그때 '진저맨'은 맹위를 떨친다우리나라엔 다소 늦게 소개되는 느낌이나 김석희의 번역이므로 일단 신뢰하고 환영하는 것이 마땅할 터. 


3. 파과 (구병모 지음/자음과모음)

김영하의 신작 <살인자의 기억법>이 가속도 높은 남성적 필치로 한 '전직' 연쇄살인범이었던 독거 노인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구병모는 60대 '현역' 여성 킬러를 형상화한다. 환갑이 넘어 '업계'의 대모의 반열에 오른 주인공의 눈에 어느덧 타인의 모습이 들어온다. 김영하의  소설이 파멸되어 가는 한 남성 살인범의 비극을 다뤘는데, 구병모는 평생 청부 살인업자로 살았던 주인공에게 구원을 선사할 것인가. 자못 궁금하다. <위저드 베이커리>의 구병모를 기억한다면, 그 궁금증은 설렘의 또다른 은유다. 


4. 여름 거짓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김재혁 옮김/시공사)

<책 읽어주는 남자>에 대한 잔상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지독한 고독, 혹은 욕망. 그리고 휘몰아치는 시대의 폭력. 그 간극을 유유히 관통한 슐링크의 서사에 나의 죄의식은 출구를 찾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이번엔 그의 단편집이다.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책은 대부분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찰나의 흥분에 가깝다. 슐링크는 다소 난해한 감정이입의 단계를 거쳐 집요한 서사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단편도 그러할까. 그러기를 기대한다. 도서 소개 문안에 이런 문장이 있으니, 좋은 시작이다. "우리는 사랑과 행복을 찾고자 거짓말을 하지만 과연 그렇게 해서 정말 행복해지는가"


5.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문학동네)

예판에서 구매했는데 집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서점에서 보았다. 약속 시간이 한시간 넘게 남아 서점에 들러 매대에 놓인(쌓인) 책을 집어 들었는데...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다. '압도적 서사'가 속도감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 소설에 맞는 말이다. 언뜻 꽤 오래 전에 쓰여진 그의 전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연작처럼도 느껴졌다. 김영하의 최고작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또 김영하의 절정은 아직 오직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 정도면 훌륭하다 싶다. 책을 읽는데는 한두 시간이면 족하지만, 주인공 '김병수'의 아포리즘을 읽는데는 하룻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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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진 2013년 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주제는 '물질에 관한 추천도서'였고 독자 대상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가장 큰 비중으로 양낙흥 교수의 <깨끗한 부자 가난한 성자>를 추천했습니다. 저는 사실, IVP에 있을 때부터 이 책에 대한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물론 이 책은 좋은 책입니다. 특히 이 책은 2012년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국내부분 우수상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세계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첫 번째로 읽어야 할 책으론 '적당'할 듯 싶었습니다. 다만 저의 사적 불만을, 다른 두 권의 책으로 만회하고자 했습니다. 자끄 엘륄과 김찬호의 책입니다. 서평에선 적은 비중으로 소개했지만, 저의 '사심'은 이 책들에 좀 더 있답니다.


물질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

깨끗한 부자 가난한 성자 (양낙흥 지음|IVP 펴냄|2012년 6월)
하나님이냐 돈이냐 (자끄 엘륄 지음|양명수 옮김|대장간 펴냄|개정2판, 2010년 5월)
돈의 인문학 (김찬호 지음|문학과지성사 펴냄|2011년 1월)


요즘 나의 고민은 욕망의 문제다. 무엇을 더 가질 것이며 더 소비할 것인가에 대한 욕망도 있지만, 살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바둥대는 욕망도 있다. 옳지 않은 방법인 것을 알면서도 더 가지려는 욕망이 있고, 살아남기 위한 욕망 앞에서 잠시 모른 척하는 가치가 있다. 지금 내 문제는 후자의 경우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상관없이, 그 욕망에 우리의 삶이 압도되는 순간, 우리 존재에 존엄을 부여하던 가치의 몰락을 경험한다. 가치가 몰락할 때 우리 존재는 비루하다.

욕망의 대척점에 가치가 있다. 가치란 우리 존재의 쓸모를 결정짓는 그 무엇이며, 삶의 목표가 되는 그 어떤 의미로 정의된다. 성서는 가치와 욕망의 문제를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재물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한다. 성서는 '부(富), 돈, 재물'이란 뜻을 가진 맘몬을 ‘우상’으로 정의했다.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가치를 수용하는 선한 욕망은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간혹 그런 사례들이 있지 않은가. 현실 속에서 가치와 욕망의 문제는 혼재되어 있다. 특히 우리의 여린 마음은, 그것을 쉬이 구별하기 힘들다(구별하지 '못하는' 것인지, 구별하지 '않는' 것인지조차 구별하기 힘들다!).

이때 우리가 읽어야 할 책이 있다. 2012년 출간된 양낙흥 교수의 <깨끗한 부자 가난한 성자>(IVP)를 첫 번째로 권하고 싶다. 2000년대 들어 한국교회를 뜨겁게 달궜던 ‘청부론-청빈론’ 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십여 년이 훌쩍 지났다. 두 논쟁 모두, 저마다의 이름은 퇴색했으나 그 명분과 논점은 여전히 타협하지 않고, 그 진영에 머물러 있다. '깨끗한 부자'로 표현되는 청부론은, 부의 윤리적 획득과 이웃을 위한 선행을 강조한다. 반면 청빈론은 자발적 영성적 가난을 추구하며 단순한 삶과 나눔을 강조한다.


이 책은 청부론과 청빈론 모두 좋은 동기에서 시작한 담론이며 성경적 요소가 ‘일부’ 있으나, 심각한 위험성 또한 내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청부론은 번영신학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며 자칫 번영신학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반면 청빈론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부를 일체 부인하는 극단적 금욕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저자는 번영신학이 한국교회의 몰락을 야기한 주된 원인이라고 강고한 어조로 비판하되, 금욕적 청빈론이 아닌 향유하는 청빈적 삶을 강조한다(번영신학의 위험성에 대해선 행크 해네그래프의 <바벨탑에 갇힌 복음>을 보라).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의 텍스트를 인용하여 '누림은 그리스도인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는 축제 혹은 잔치의 순간이 있으며 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것은 때로 하나님의 선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수님은 부자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초청에 기꺼이 응하시고 그들의 집에서 잔치를 즐기셨다. 물론 누림의 권리보다 우선되는 것은 절제의 미덕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고 권면했다.

이 책의 부제는 '성경에서 찾은 자족, 향유, 나눔의 원리'다. 대체로 유익하고 일독할 만한 '좋은 책'이다. 허나 한 가지 아쉬운 점과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고, 감히 비판해본다. 아쉬운 점은 이 책의 주된 텍스트는 성경 외에 주로 개혁주의적 칼빈주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다. 아마 숱한 반론은 그 논거에서 시작할 것이다. 
  부족한 점은, 좀 더 거시적 안목에서 물질 세계를 성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학자는 목회적 상황을, 목회자는 성도가 처한 현실적 정황을 보다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결국 기독교인의 실존은 교회를 거점으로 하되, 현실에 거한다. 교회가 아닌 현실에서 그 실존의 고뇌는 갈음된다. 결국 세상이 문제다!

다음 두 권의 책을 더불어 읽기를 권한다. 하나는 자끄 엘륄의 <하나님이냐 돈이냐>(대장간)다. 엘륄은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의 핵심에 가난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돈(맘몬)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선, 그 권세의 속성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금욕의 삶으로 도피하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어 그것을 지배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세상의 공고하고 폭력적인 체제’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거저 주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찬호 교수의 <돈의 인문학>(문학과지성사)을 권한다. '돈은 개인과 사회를 묶어주는 사회 시스템'이다. 돈은 '외부 세계에 있는 객관적인 제도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마음과 존재에 심층적으로 얽혀 있는 에너지'다. 현대에 이르러 돈의 권력은 점점 막강해진다. 이 책은, 돈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묻고, 성찰할 것을 제안한다. 인문학, 즉 인간다움의 가치는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함의로 주어져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돈의 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가. 


궁금하다면, 이 책 다음으론 당신의 욕망을 읽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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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리뷰할 책 후보를 골랐다. 가급적 '좋은 책'만 리뷰할 생각이다. 

<불혹의 문장들>은 기실 '불혹'을 위한 책으로 한정하기엔 아까운 책이다. 하지만 나와 함께 늙어가는 '벗'에게, 편지 형식으로 서평을 쓰려고 한다. 언젠가 IVP 북뉴스에 연재할 때 종종 썼던 방식이다. <도쿄 산책자>는 기존 강상중 교수의 책보단 사실 별로다(뭔가 과도한 의욕으로 '기획'된 책은 대체로 그러하다). 그럼에도 강상중이므로, 평균 이상의 책이다. <남성과잉시대>의 부제는 "'지워져버린 소녀'들의 진실과 도래할 인류의 재앙"이다. 흥미롭도다. 한윤형의 청년 세대 다음으로 '잉여'가 될 유력한 후보는 '남성'이다. 잉여는 과잉의 산물이므로. 고로 '남성잉여시대'를 준비하는 각오로 이 책을 읽는다. <나라는 여자>는 매혹적인 위로의 책이다. 아내를 위해 읽고, 아내를 위해 쓰고 싶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는 5.18 즈음에 쓰고 싶다. 요즘 워낙 소설을 안 읽어 유독 문학이 고프다. 또한 공선옥을 워낙 좋아했던 터라, 기대가 크다. <협동의 경제학>은 주류경제학을 극복할 새로운 사회적 경제학 원론 수준을 욕심내는 책이다. '협동조합 시대'를 원한다면 공부해야 할 책. 서평은 쓰지 못하더라도 공부는 해 볼 작정이다. 

물론 관계자의 상황상 실제 서평까지 쓰게 될 책이 얼마나 될지는 며느리도 모른다는 소문이 유력하게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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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2013년 5월호)_“독서선집”


'공부의 길'을 숙고하다

공부하는 삶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지음│이재만 옮김│유유│2012)

청춘의 커리큘럼 (이계삼 지음│한티재│2013)




기독교는 흔히 책의 종교라 불린다. 기독교인은 '그 책의 사람들'이어야 마땅하다. 식민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은 '그 책'의 예언을 소망으로 삼아 험난한 세월을 견뎌냈고, 마침내 이 땅에 오신 예수로 말미암아 초대교회는 그 책을 완성하고 확장하였다. 

  ‘그 책’은 모든 사람에게로, 모든 학문적 영역으로, 모든 사회의 환희와 고통 속으로 확장되어야 마땅하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계승자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는 그 확장을, 지성인에게 주어진 고귀한 소명으로, 공부하는 삶이라는 격조 높은 제목으로 소개하고 권면한다.  


  먼저, 이 책의 치명적 단점 몇 가지를 지적하고 넘어가자. 역자 이재만은 이 책의 내용 일부가 ‘시대에 뒤진 듯한’ 예스런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지성인은 남성으로 상정하고 아내의 역할은 남편의 공부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르티양주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버지니아 울프(1882‐1941)나, 이 책이 쓰이고 널리 읽힌 시기에 성장한 한나 아렌트(1906‐1975) 등을 떠올리면, 이 책의 전제는 예스럽다 못해 가부장적 독선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딜레탕티슴(dilettantism, 향락적 문예도락)’을 가치 없는 것으로 배제하며, 대부분의 소설은 정신에 해롭다고 단정짓는 것도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세르티양주가 말한 ‘책을 다루는 방식’에서, 이 책을 사용하는 방법을 차용할 수 있다. 즉 이 책은 공부라는 우리의 목표에 대한 하나의 출발점으로선 매우 훌륭하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책 문제에서 핵심이다. 책은 신호, 자극제, 조력자, 기폭제다. 책은 대체물도 아니고 속박하는 사슬도 아니다. 우리의 사유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 책을 읽을 때 저자는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246쪽)
 
  이 책은 지성인에게 주어진 소명으로서의 공부를 다루고 있다. 지성인이란 ‘지적인 일에 일생을 바치려는 사람’이며, ‘지적 소명’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제1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제1본성은, 진리가 드러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진심으로 우리의 전부를 바칠 때, 진리는 우리에게 자신을 허락한다. 따라서 공부하는 삶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순결한 진심과 곧은 의지이다. 
  지적 소명은, 어떤 지적 성취에 만족할 수 없다. ‘위대한 사유는 심장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적 소명은 도덕적 덕목 속에서 그 가치를 입증한다. ‘참된 것과 선한 것은 같은 토양에서’ 자라며, 순결한 영혼이 순수한 사유를 담보하며, 마침내 신과 함께 진리에 동참한다.

  세르티양주는 무엇보다 공부하는 자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고 다독인다. 모든 여건이 척박하더라도 자신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공부하는 삶은 시작된다. 비범한 재능이 아니라 끈질기고 집요한 노력이 요구된다. 공부하는 사람은 마치 정성을 들여 착실히 일하는 노동자와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루에 ‘두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열정적인 고독’과 ‘고요한 확실성’을 쏟아부을 수 있는 ‘두 시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단언한다. 

  이 책은 독자를 설득하지 않는다. 세심한 격려로 우리의 가슴을 북돋기도 하고, 때로는 단호한 어조로 여러 세심한 규칙을 요구하기도 한다. 소리 내어 읽고 싶은 단단한 문체로 실천적 적용을 모색한다. 텍스트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공부하는 삶을 향한 불끈 솟는 결연한 의지에 이르게 된다. 바로 그때, 세르티양주는 거듭하여 공부의 목표를 되새긴다.


읽기와 공부가 정신과 삶이 되게 하라.(203쪽)


  이 책의 부제는 “배우고 익히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이다. 좋은 책이고, 공부하는 삶에 대한 충만한 자극으로 그득한 책이다. 앞서 지적한 몇 가지 문제를 제외하고, 저자가 제시하는 여러 사례를 지금의 상황에 맞게 적절히 변용한다면 대단히 유용한 실용서가 될 것이다. 이만큼 품위 있는 실용서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또 있다. 공부하는 삶이 지향하는 목표가 너무 막연하다. 정신과 삶이 되는 공부는, 그래서 과연 무엇을 이루는 것인가. 세르티양주의 시대가 아닌, 우리의 시대에 공부는 과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 모름지기 소명이란 훨씬 구체적인, 담대한 그 무엇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공부하는 삶’ 너머 ‘공부의 길’

성서적 가치는, 갇힌 진리가 아닌 세상으로 확장된 진리로서 실천되어야 한다. 공부하는 삶은 그 길을 찾는 것이며 그 길은 이 땅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공부의 길은, 깊은 사유이되 구체적인 실천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청춘의 커리큘럼》의 부제는 ‘고민하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공부의 길’이다. 저자 이계삼은 11년간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일하다가 퇴직 후, 밀양 송전탑 반대대책위 일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의 대부분은 ‘밀성고 2학년 4반 교실’에서 썼다고 한다.


그때 아이들은 숨죽여 공부를 하고 있었고, 가끔 나는 아이들의 무구한 얼굴들을 바라보곤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세상사의 격랑들을 생각하며, 그들이 견뎌 내야 할 세파의 고통을 생각하며 마음 저리곤 했다. 이제 이 책을 그 아이들과 그의 친구들에게 바치고자 한다.(8‐9쪽)


  저자는 '청년들이 이 가망 없는 대학과 취업의 좁다란 울타리를 걷어차고, 드넓은 들판을 질주하는 그날을 기다린다'고 썼다. 이 책은 E. F. 슈마허와 웬델 베리, 하워드 진, 도로시 데이, 다카기 진자브로 등을 통해 공부의 이유를 찾고 대중문화, 민주주의, 핵 문제, 전쟁과 평화, 문학, 교육, 철학, 영성 등의 분야에 있어 공부의 길을 탐구한다. 무엇보다 ‘자식 같은 제자’를 향한 ‘아비 같은 스승’의 마음이 담겨 있다. 


  세르티양주와 이계삼의 공통점은, 치열한 고독이라는 전제, 그리고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걸음을 더 멀리 내딛는다’는 각오를 가졌다는 것이다. 세르티양주가 공부의 자세와 방법을 다루고 있다면, 이계삼은 그 공부가 성스러운 독방이 아닌 거친 광야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디, 세르티양주에게 한껏 자극받은 공부에 대한 충만한 결의가, 이계삼이 교직을 내려놓고 뛰어든 그 광야 같은 세상에서 단단한 걸음으로 펼쳐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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