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 당시 기업·금융 구조조정을 주도했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28일 정부의 경제위기 대응 방식에 대해 “초기 진화에 실패한 남대문 화재와 비슷해질까 우려된다”며 “정부는 필요하다면 ‘극약 처방’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전 부총리는 이날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금융경제연구원 주최로 열린 강연에서 “시장 실패가 발생하면 지체없이 정부가 개입해야 하며, 사회적 논란을 두려워 해 시간을 끌면 사태가 악화된다”며 “시장의 불확실성을 단호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전 부총리는 “현재의 경제위기는 앞으로 2~3개월이 중요하며, 정책 대응에 실패하면 경제파국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이 전 부총리가 공식 행사에 강사로 나선 것은 2005년 3월 경제부총리에서 물러난 이후 3년여 만이다. 오랜만에 입을 뗀 이 전 부총리는 할 말이 많았던 듯 거침없이 경제 현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풀어놨다. 특히 이명박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과 경제정책에 대한 ‘쓴소리’를 쏟아냈다.

 이 전 부총리는 현재의 경제위기 상황에 대한 대처가 쉽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는 “(현재의 경제위기는) 대기업의 과다차입과 과잉투자에서 비롯된 97년 외환위기 때와는 달라 도덕적 해이를 일으키지 않는 신속한 대처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전 부총리는 “현재의 경제위기는 (정부의) 안이한 상황판단과 정책의 신뢰상실에 따른 ‘진행형 위기’ ”라며 정부의 안이한 대응이 화를 키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위기상황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 부처 간 자기 업무챙기기, 책임 떠넘기기 등이 시장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국민들의 위기의식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는 “경제가 위기상황에 직면할수록 서민생활 안정과 실업문제에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둬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감세보다는 재정 지출 확대가 바람직하다”면서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는 신중해야 하며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 전 부총리는 과거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경기침체기에 대규모 SOC 투자에 나섰다가 재정적자만 늘린 사례를 들기도 했다.

 이 전 부총리는 정부가 경제위기 진행상황을 실시간으로 점검할 수 있는 통합대책기구인 ‘워 룸’(War Room)을 한시적으로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원화가 돼 있어 경제위기 관리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금융감독 조직을 개편할 시간이 없는 만큼 금융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을 한 사람이 맡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이 전 부총리는 중국 고전 <한비자>에 나오는 ‘일이 적던 시절의 수단을 복잡한 시대에 쓰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준비가 아니다’(處多事之時 用寡事之器 非智者備也)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명분과 이념 편향을 지양하고, 과감한 발상의 전환을 통해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대안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전 부총리는 외환위기 직후 초대 금융감독위원장을 맡아 기업·금융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해 외환위기 조기 극복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 정부의 위기대응 능력에 비판이 일고 있는 가운데 열린 이날 강연에는 200여명의 청중이 참석해 강연장을 가득 메웠다. 

2008-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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