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난마 한국경제’ ‘나쁜 사마리아인들’ 등의 저서를 통해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주술’에 사로잡혀 활력을 잃고 있는 한국 경제를 비판해온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했다. 장 교수는 국내 체류 중 여러 차례의 강연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문제점과 한국 경제의 대안에 대한 소신을 피력하고 있다. 최근 국방부는 지난해 출간돼 10만부 넘게 팔린 장 교수의 저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불온서적’ 목록에 올려놓기도 했다. 
 장교수는 지난 21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공기업 선진화, 한·미 쇠고기 협상 등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과 올해 정기국회에서 비준이 추진되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는 “미국에게 쇠고기 시장을 내주면서까지 한·미 FTA 비준을 할 필요가 없다”며 “한·미 FTA 비준은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규제완화는 독감 걸린 환자에게 ‘해열제’를 주는 격”이라며 “대기업을 위한 규제완화는 중소기업에게는 반기업정책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해서는 “기업들은 노동자의 양보만 기대하지 말고 고용안전판을 마련해야 하며, 정부는 사회복지를 대폭 확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이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파문, 고환율 정책 등 정책 난맥상이 적지 않았습니다.
 “쇠고기 협상 자체도 잘못이었지만 그보다는 쇠고기를 양보해가면서까지 얻어내려 했던 한·미 FTA 비준이 그렇게 중요한 지를 묻고 싶습니다. 한·미 FTA는 시기상조인데 이를 위해 더 큰 양보를 한 쇠고기 협상은 설상가상의 결과를 초래한 셈이죠. 환율은 이익보는 이가 있으면 손해보는 사람들도 있고, 수출이 늘어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률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한국 경제의 최근 상황을 보면 내수기반이 무너지고 있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대기업은 ‘고용없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반면 중소기업은 고사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예전 우리 기업들은 공격적 투자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활력이 크게 떨어져 있습니다. 외환위기 이전 대기업의 부채비율이 평균 350~400%였고, 외환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이 200%로 낮추라고 했는데 지금은 평균 100%대로 150%대인 미국·영국 등보다도 낮습니다. 빚이 적다는 것은 그만큼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은행들도 과거에는 기업대출이 90%대였지만 지금은 기업대출 비중이 40%에도 못미칩니다. 노동시장이 불안지면서 취업자들의 직업 선택도 보수적이 되기 마련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공대가지 말고 의대에 진학하라고 합니다. 대기업 다니다 외환위기 때 해고돼 자영업자가 된 경험 때문에 자녀들에게 리스크(위험)를 지우기 싫어 하는 것이지요. 이런 점들이 한국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MB노믹스’의 골간은 규제완화와 감세인데 이는 ‘대기업 편중 정책’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외환위기 이전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가 ‘한국은 공장을 설립하려면 200~300개의 인·허가를 받아야 하는데도 연간 경제성장률이 8~9%나 되는 불가사의한 나라‘라고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달리 보면 한국의 기업들은 돈을 벌 수 있겠다 싶으면 인·허가가 300개가 되더라도 감수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업들이 규제 때문에 투자를 못한다지만 실제로는 자본시장 개방으로 금융환경이 불안해졌고, 인수·합병(M&A) 공포감이 커졌기 때문에 공격적인 투자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규제완화는 단순한 ‘해열제’일 뿐 입니다. 독감환자가 해열제 먹는다고 낫지 않습니다. 정부가 규제완화로 친기업 정책을 편다고 하는데 은행에게 맘대로 대출하라고 하면 중소기업에게는 돈을 빌려주지 않습니다. 금융규제 완화가 중소기업에게는 반 기업정책이 되는 셈이죠. 19세기 유럽에서 노동운동을 탄압했는데 그 때문에 사회주의가 정권을 잡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노동운동 탄압이 결과적으로는 반기업 정책이 된 셈입니다. 이런 역사의 교훈을 잘 새겨야 합니다.”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공기업 민영화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나쁜 사마리아인’에도 썼지만 공기업 민영화 과정에서 헐값매각 문제, 매각과정에서의 부패 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또 공기업을 제 값받고 팔려면 개혁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개혁이 가능하다면 굳이 매각할 필요가 없겠지요. 정부는 민영화 대상 국책은행으로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이 선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시중은행들이 주택담보대출에 매달리는 바람에 산업은행의 기업금융 서비스, 기업은행의 중소기업 지원이 더 절실해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민영화를 해서는 안됩니다.”
 -올 정기국회에서 한·미 FTA 비준안이 처리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한·미 FTA에서 가장 문제는 투자자-국가 소송 조항입니다. 기업이 규제 때문에 손실을 봤다고 생각하면 국가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지요. 미국 기업들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조항을 활용해 멕시코나 캐나다를 상대로 소송을 많이 했고, 해당국의 환경규제가 타격을 입기도 했습니다. 호주는 미국과의 FTA협상 때 투자자-국가 소송조항을 제외시켰습니다. 정부가 2006년 한·미 FTA를 추진할 때 장밋빛 전망을 제시했지만 FTA의 영향은 장기적으로 나타나는 만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오바마가 승리할 경우 반드시 자동차 부문에서 재협상하자고 요구할 것이라는 점도 우려스럽습니다. 한·미 FTA비준은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그간 여러 저서에서 재벌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스웨덴식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사회복지를 확충하고, 노동권 보호를 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국내 진보학계에선 이를 현실성이 없는 제안이라는 비판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당시에는 현실성없던 정책들이 결국 실현된 예가 적지 않습니다. 영국에서는 100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 투표권을 도입하자고 주장하면 잡혀갔습니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되기 전엔 테러리스트로 분류된 인물입니다. 30년대 스웨덴에서 노·사·정 대타협이 있었지만 20년대까지만 해도 스웨덴은 노사불안이 극심했습니다. 내가 이런 제안을 한 것은 2003년 외국계 자본인 소버린의 공격으로 SK글로벌의 경영권이 위협받으면서 기업들의 적대적 M&A에 대한 공포감이 커졌고, 또 참여정부가 막 들어서던 때였는데 지금 보면 당시보다는 실현 가능성이 낮아 보입니다. 더구나 요즘은 재벌들이 잇따라 금융업에 진출하면서 제조업 대신 금융업으로 편히 먹고 살려는 흐름이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국내 비정규직 문제는 더이상 방치하기 힘든 수준인 것 같습니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중요한 것이 사회복지의 대폭적인 확충입니다. 유럽에서도 비정규직 비율이 높아지고 있지만 사회복지가 발달해 있어 한국만큼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직업전환을 위한 재교육과 재취업 알선 시스템이 잘 돼 있어 걱정을 덜 하게 되는 것이죠. 반면 한국에서는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에 따라 인생이 갈리게 됩니다. 기업들은 노동자들의 양보만 기대하지 말고, 고용 안전판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라나는 세대들이 직업선택을 더 진취적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자동차에 브레이크라는 안전장치가 있어야 속도를 120~130㎞까지 낼 수 있는 이치입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부실에 따른 금융위기가 전세계적인 동반 침체를 초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서브프라임 사태 초기에 29년 대공황이후 최대위기라는 말이 나올 때 ‘설마’했는데 그 예측이 맞아 들어가고 있습니다. 2차 대전이후 오일쇼크를 제외하면 미국과 일본, 유럽의 경기가 동시에 침체한 적이 없었습니다. 금융의 과도한 성장으로 금융과 실물경제간 조화가 깨진 것이 서브프라임 사태의 핵심입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을 지낸 폴 볼커같은 이들이 ‘금융자본주의 실패’를 거론할 정도입니다. 금융의 과도한 성장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아졌고, 금융에 대한 규제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장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국방부의 ‘불온서적’ 리스트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경제노선에서는 노무현 정부나 이명박 정부나 비슷한 것 같은데 사회분위기는 더 경직돼 있는 것 같습니다. 내 책을 보면 마샬플랜처럼 미국을 칭찬한 내용도 많은데 반미 서적이라고 규정한 것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총평을 하신다면···.
 “진정한 실용주의를 했으면 합니다. 싱가포르는 외국인 투자유치 정책을 적극적으로 쓰는 자유무역 국가지만 국민총생산(GDP)의 22%를 공기업이 맡고 있고 전 토지의 국유화에다 강제 저축제도까지 시행하는 나라입니다. 극단적인 자유시장 정책과 공산주의 정책을 적절히 섞어쓰며 경제를 훌륭히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고정관념이 너무 많아 어떤 것은 ‘반시장’이고 어떤 것은 ‘반미’, ‘반기업’이라며 꺼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리면서 정책을 펴면 실용주의는 불가능합니다.”

장하준 누구인가

 1963년 서울에서 났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영국으로 유학,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만 27세인 90년부터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2003년 유럽진보정치경제학회가 주는 뮈르달상을, 2005년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주는 레온티예프상을 최연소로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발돋움했다.2005년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진단한 ‘쾌도난마 한국 경제’는 국내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밖에 ‘사다리 걷어차기’ ‘개혁의 덫’ ‘국가의 역할’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등의 저서가 국내에 출간돼 있다.

2008-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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