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국내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7일 1300원을 돌파했고, 주식시장에서 코스피지수가 1300선으로 곤두박질쳤다. 금융시장의 불안은 점차 실물경제로 옮겨 붙으면서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여건)을 약화시키고 있다. 외환시장은 1997년 외환위기의 악몽이 되살아날 정도로 패닉(공황)상태를 보이고 있다. 정부는 외환보유액을 풀며 환율방어에 나서고 있지만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6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외환보유액이 계속 줄어들게 되면 국제수지 적자와 맞물려 대외신인도가 뿌리째 흔들리게 되고 이럴 경우 진짜 위기를 맞을 수 있다”며 “외환보유액은 손대지 않는 것이 국익에 맞다”고 말했다. 외환당국이 외환보유액을 풀어 시장 개입에 나서는 것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박 전 총재는 또 “세계경제는 15년에 걸친 호황이 끝났고 앞으로 최소 4~5년은 경기가 극도로 침체될 것”이라먀 “정부는 성장주의 정책 대신 긴축경제 체제로 전환해 사회 안전망 확충 등 민생 경제 안정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세계 금융시장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오고 있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사태가 미국의 금융위기를 초래하고 다시 세계로 파급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패러다임 변화의 변곡점에 서 있습니다. 지난 15년간의 호황은 끝났고, 앞으로 최소 4~5년간은 장기침체 시대가 올 것입니다. 장기호황은 신자유주의 체체 아래서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의 질서에 의한 효율 극대화, 중국,·인도·남미 등 거대 저임금 경제권의 부상에 힘입은 것입니다. 이 시기는 고성장, 저물가, 저금리, 고유동성, 고물가, 고주택 가격, 고원자재 가격 등 자산 버블(버블)로 특정지워지는 ‘고원(高原)경기’였습니다. 그러나 중국 경제가 고비용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데다 세계적인 자산 및 원자재 가격거품이 붕괴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가장 취약한 서브 프라임 모기지에서 곪아터진 것입니다.”

-금융위기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십니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파장을 몰고 온 이유는 우선 미국 부동산의 80%가 은행 대출인데다 은행 대출을 기반으로 이중, 삼중의 채권이 발행되면서 파생상품시장을 부풀게 했다는 점, 금융감독 기능이 취약한 점 등이 겹쳤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태는 미국 부동산거품 붕괴→미국의 금융위기→미 금융위기의 세계적 파급→세계 실물경제의 장기침체로 진행될 것입니다. 금융위기는 지금 한창 깊은 터널을 통과하고 있고, 완전히 벗어나려면 앞으로 1~2년이 더 걸릴 것입니다. 게다가 세계 실물경제의 침체는 시작 단계입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위기상황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앞으로 세계 경제질서는 저성장, 고물가, 고금리, 저유동성, 저자산가격 시대가 될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7% 성장약속을 했지만 처음부터 실현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고용문제와 민생경제는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 지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성장 정책을 밀어 붙인다면 경제위기는 더욱 증폭될 것이고, 민생도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정부는 경기부양과 경제체질 강화, 민생경제 안정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는 등 외환시장이 극도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2400억달러의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는 한국의 신인도는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정부가 환율을 방치한다고 해도 오르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올라가다가 멈추게 될 것입니다. 외환보유액이 계속 줄어들게 되면 국제수지 적자와 맞물려 대외신인도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 때는 정말 큰 위기로 치달을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환율이 뛰고 외환이 부족하니까 정부가 외환보유액에 손을 대고 있지만 이래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쉽지 않고 자칫 큰 위기 부를 위험이 큽니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외환보유액에 손대지 말아야 합니다. 국가신인도가 흔들리지 않는다면 환율 상승은 거의 한계점에 왔습니다. 그러나 신인도가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정부는 미봉책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대신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통을 감내하며 위기대응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 7%성장이라는 강박관념에 매달려 있으면 안됩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오는 9일 기준금리를 결정해야 하는데 이런 위기상황에서 금리정책은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까.
 “금리에 대해서 구체적인 얘기를 하거나 주문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상황에선 고금리 기조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가안정, 국제수지 균형회복, 원화가치 안정을 위해 고금리 기조가 유지돼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한·중·일 재무장관회의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하기 보다는 물밑에서 추진하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제의는 옳다고 봅니다. 한·중·일 3개국이 금융협조를 해 위기에 공동대응하는 것은 매우 유효하고, 성사된다면 아주 좋은 일입니다. 중앙은행 차원에서는 일본, 중국과 협조관계가 구축돼 있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니까 정부차원에서 추진하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미국도 금융위기를 겪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도 심각한 상황입니다.
 미국같은 금융위기로 치달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부동산 가격은 거래가 잘 안될 뿐 아직도 보합수준이고, 미국보다는 은행대출 비율이 낮습니다. 앞으로 금리가 오를 경우 가계에 압박이 오면서 소비침체→경기침체→민생고통의 악순환이 예상됩니다. 고통은 견뎌내야 하고, 정부와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내핍체제가 필요합니다. 정부가 건설경기가 나쁘다고 경기부양을 통해 해결하겠다고 한다면 부동산 투기의 악순환 사이클이 되풀이 될 우려가 큽니다. 집 값의 안정에 정부와 건설업체가 적응해야지 건설업체의 필요에 국민 경제를 맞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금융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정책기조는 어느 쪽으로 지향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저금리, 고환율, 적자재정 정책은 물가상승과 국제수지 악화를 초래하고, 국민경제도 어렵게 할 것입니다. 경제체질 강화와 민생경제 안정에 중점을 둔다면 고금리, 국제수지 개선, 환율안정, 건전재정 물가안정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정부는 종부세 완화 등 감세정책, 수도권 규제완화 등 양극화를 부추길 정책은 유보하고 사회안전망은 강화해야 합니다. 국내외 경제여건의 악화는 일과성이 아니라 장기적이고도 지속적인 흐름입니다. ‘소나기’가 아니라 기나긴 ‘장마’입니다. 정부가 현실을 좀 더 냉철히 보고 국민에게 내핍을 호소하고,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가장 고통받는 소외계층에 대한 안전망 강화 등 민생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펴야 합니다.”

-정부의 감세정책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내핍체제로 전환해야 할 시기에 정부가 감세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것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국민의 2%에 불과한 집 부자들을 위해 종부세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국민정서와 경제정의에도 맞지 않습니다. 국내에서 빈부격차는 소득격차가 아니라 자산격차에서 초래됩니다. 상위 1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이지만 자산은 4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종부세는 이런 자산격차 축소에 유효한 정책인 것인데 정부가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되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미국식 금융모델이 몰락했고, 신자유주의도 실패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단기적 수익을 극대화하고 전 세계의 돈을 긁어 모아 이중 삼중으로 부풀려 이득을 내는 체제입니다. 하지만 한번 부실이 시작되면 승수효과에 의해 위기가 증폭되는 구조입니다. 미국의 금융시스템을 그대로 도입하면 안됩니다. 금융시장 개편과정에서 이런 문제를 충분히 정부가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특징인 무한경쟁속의 적자생존, 단기수익 극대화 모델이 성장을 효율화하는 측면은 분명히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빈부격차 확대와 양극화를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경제질서로 대체되기는 어려워 경제개방을 확대하면서도 양극화를 해소하려는 노력을 병행해야 합니다.”

박승 누구인가

 1936년생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청와대 경제수석, 건설부 장관, 대한주택공사 이사장, 한국은행 총재 등 학계와 금융계, 정부를 넘나들며 한국 경제의 발전과 호흡을 같이 해왔다. 서울대를 졸업한 뒤 1961년 한국은행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한은 해외유학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2년 한은 총재로 재직할 당시에는 특유의 ‘뚝심’으로 통화신용 정책의 독립성을 확보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리공고 재학시절 매일 8㎞를 뛰어서 통학했을 정도로 어려운 성장기를 보낸 때문인지 설렁탕 집을 즐겨 찾는 소탈한 성격이다. 한은 입행 초기 건물에 불이 나자 불을 끄기 위해 물양동이를 들고 건물 지붕에 올라갔던 일은 아직도 한은 직원들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2008-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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