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한국전쟁’들 - 평화를 위한 비주얼 히스토리
푸른역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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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자들은 펜기자와 사진기자로 나뉘는데, 대개의 펜기자들은 사진을 활자 만큼 중시하지는 않는다. 사진은 활자 기사를 뒷받침하는 재료 정도로만 인식된다. (나 역시 그랬다) 1990년대 이후 컬러인쇄가 늘어나고 지면에 비주얼이 강조되면서 사진의 중요성이 커지긴 했으나 이런 관념은 여전하다. 아마 펜기자 뿐 아니라 학자들도 사진보다는 문서자료를 중시해왔을 것이다.
강성현 교수의 <작은 '한국전쟁들'>(푸른역사)은 이런 통념에서 벗어난 의미있는 시도다. 저자는 NARA로 불리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잠자고 있는 수만장의 사진과 영상자료를 활용해 한국전쟁을 '비주얼 히스토리'로 엮어냈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1948년 5월1일 제주 '오라리 방화사건'이다. '폭도'들이 오라리 마을을 공격해 방화하고 주민을 학살했던 것으로 알려진 오라리 방화사건은 제주도에 대한 군경의 무력진압을 본격화하는 신호탄이 됐다.
당시 미군이 제작한 <한국의 메이데이 : 제주도> 영상을 보면 자수한 '폭도 살인범'과 그들의 '살인무기'가 활자가 풍기는 흉포함에 비해 얼마나 초라하고 빈약한지를 보여준다. 영상은 또 오라리 마을에서 (폭도들의 방화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과 마을로 진입하는 경찰기동대 모습을 교차 편집해 보여준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을 비행기를 띄워 촬영했을 정도니 꽤나 공들인 영상물인 셈이다. 이 영상물은 주한미군 제24군단에 배속된 123통신사진파견대가 제작했다고 한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사흘전인 4월28일 김익렬 국방경비대 9연대장과 무장대 대장 김달삼간의 '평화협정'을 무력화시켰다. 오라리 사건을 미군이 공들여 영상으로 제작한 것은 군의 강경진압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제주의 비극은 기획된 혐의가 짙다.

책 46쪽의 스틸 사진속 2명의 '폭도'들은 과연 폭도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구부정하고 초췌한 모습이다. 활자가 실상과 얼마나 동떨어질 수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실제로 오라리 사건은 1989년 <제주신문> 취재결과 경찰의 사주를 받은 우익 청년단이 마을에 불을 질러 일어난 사건인 것으로 확인됐으니 이 두 사람은 폭도 누명을 쓴 민간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전쟁 뿐 아니라 당국의 공식 발표로 작성된 전쟁사에는 수많은 진실이 가려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귀환포로들의 사연도 흥미롭다. 한국전쟁에서 '포로'라고 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기습석방 조치로 풀려난 '반공포로'들만을 떠올리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북한에 억류돼 있던 7862명의 귀환포로들은 1953년 8월5일부터 9월7일까지 판문점 자유의 문을 통과해 남쪽으로 내려왔다.귀환포로들은 내려오자마자 입고 있던 상하의를 다 벗어던지고 팬티만 입은 채 태극기를 흔들었다. 북에 있는 동안 '빨간물'이 들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한 안간힘이다.

그런데 이 포로들은 전원 서울과 인천을 거쳐 LST(상륙함)을 타고 한반도 남쪽 섬으로 향했다고 한다. 한산도 아래에 있는 용초도(현재 이름은 용호도)란 곳이다. 본래 이곳에는 거제도에서 이송돼온 북한군 포로들이 수용돼 있었다.
귀환포로들은 이곳에서 갑을병으로 분류된다. 갑과 병은 재복무나 제대 조치된 반면, 을종은 처단됐다고 한다. 즉결처형 됐다는 설도 있다. 천신만고 끝에 조국으로 귀환한 포로들이 사상 검증대 앞에서 다시 발가벗겨졌고, 더러는 빨갱이로 몰려 죽어간 것이다.

강성현 교수가 2015년 현지에서 만난 주민(당시엔 인근 섬으로 소개됐던)들은 용초도에서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들리기도 했고, 밤이 되면 총소리가 들렸다고 회고했다. (물론 남한으로 돌아간 귀환포로들만 고초를 겪은 것은 아니다. 북한으로 돌아간 인민군 포로, 중국으로 돌아간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귀환포로들이 용초도에 갇혀 있던 사실을 아는 이들은 대체 얼마나 될까. 귀환포로 문제는 한국전쟁의 또다른 흑점이다. 지옥섬에 갇힌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사실을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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