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가들 -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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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 김두식 교수의 <법률가들-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창비). 본문만 6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책이지만 일제와 해방공간은 내 관심영역이기도 한데다, 책이 워낙 흥미진진해서 이틀만에 읽었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무렵까지를 주된 배경으로 한국 법조계의 형성과정을 정리한 역작이다. 저자는 책을 쓰기 위해 해방공간의 자료를 읽으면 읽을수록 "과연 그 시대에 훌륭한 판검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에 부딪혔다고 한다.
한국의 법조계의 일그러짐은 이 시대에 주조된 탓이 큰데, 이 영향을 벗어난 법조인들은 이 책을 읽어보면 실로 극히 일부에 불과해 보인다. 독후감은 아니고 이 책에서 흥미로운 대목들이 있어 정리해둔다.
1. 우선 대동콘체른인데, 일제 때 민족변호사로 이름을 날렸던 허헌이 일제의 탄압으로 변호사 업무까지 그만둔 시절 허헌의 집에 세를 들어 살던 '금광왕' 이종만이 금광개발로 잭팟을 터뜨리게 되자 함께 동업하게 된다. 대동광업주식회사를 모기업으로 출판사와 학교사업, 농업사업까지 손을 댄 대동콘체른이 만들어졌다.
"일하는 사람은 다 같이 잘 살자" "노자(勞資)협조, 농촌이상화" 등으로 요약되는 대동이념 하에서 이뤄진 '진보 재벌'은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합법적인 민족운동 존립이 불가능한 당시 상황에서 이뤄진 뜻깊은 실험이었다.
(조선희의 <세여자>에 허헌이 광산에 뛰어드는 대목이 잠깐 나오긴 하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내용은 처음으로 접하는 것이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2. 일제 말기에 '단파 라디오'와 이를 청취하는 그룹이 당시 언론통제하에 있던 조선인들에게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전황을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당시 경성방송국 직원들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해외정보 수집 네트워크가 결성돼 '미국의 소리', '조선임시정부 우리말방송' 등을 청취해 최신 전황과 김구, 이승만 등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이 내용들은 좌우를 망라한 국내 지도자들에게 일종의 '정보보고' 혹은 '유비통신'으로 유포됐다. 진원지를 찾는데 혈안이 된 조선총독부는 단파라디오를 관리하던 경성방송국 직원들을 잡아 들였고 이 과정에서 허헌과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홍익범 등이 체포된다.
3. 1946년에 발생한 남로당 계열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지금까지도 진상을 알기 어려운 사건으로 꼽힌다. 이 사건은 남로당과 좌익이 해방공간에서 세를 잃어가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고문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의혹이 여전하다. 그런데 당시 이 사건을 수사한 김홍섭 검사가 법정에서 남긴 논고가 이 책에 수록돼 있다.(당시 <자유신문>보도 재인용)

"소감을 간단히 말하면 유감스럽다고 하겠다. 내가 취조한 중 특히 박낙종은 오십평생 중 30년의 투쟁사를 가진 혁명투사였으므로 만강의 감사를 드리는 한편 많은 감회를 느꼈으며, 사회여론은 이번 사건으로 말미암아 좌우익이 일층 소원하여지는 감상을 주는데, 이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민족구성원의 일인으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 사건은 법률가 입장으로는 형사사건이나 돌이켜 시민의 한사람으로 볼 때는 조선의 기근이요 민족적 비극으로 본다. 나는 김창선이 공판정에서 죽고 싶다 말할 적에 2000년전에 일어난 예수를 은 30량에 잡아준 가룟 유다의 비극을 상기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어느 한 사람의 죄가 아니라 운명의 소치요 공산당 자체가 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애 장난을 잘못 감독한 것이라고 본다."
검사는 피고인 박낙종(조선정판사 사장)의 독립운동 경력에 경의를 표하는 한편, 이 사건은 인쇄공 김창선의 단독범행이고 남로당은 관련성이 없다고 보는 듯한 뉘앙스를 흘린다. 김홍섭은 이 사건 수사를 계기로 검사직에 회의를 느껴 법조계를 잠시 떠나 뚝섬에서 농사를 짓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김병로 당시 대법원장의 간청으로 법조계에 복귀한 김홍섭은 청렴강직함과 구도자적 생활로 법조계와 신앙계의 모범이 돼 '사도법관'으로 불렸다고 한다.
조선정판사 사건은 재판과정에서 검찰이 고문이 있었던 점을 법정에서 인정할 정도로 수사과정에 문제가 많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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