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과 개방 - 1976~1982년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
조영남 지음 / 민음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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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뚱의 사망이후 화궈펑의 과도체제 속에서 덩샤오핑이 권력을 장악해가는 4~5년간에 중국 공산당내에서 중요한 문건이 작성된다. '역사결의'라는 것인데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이를 작성하기 위해 4000여명의 전국 고위간부가 참여하는 '4000인토론'이 진행된 것을 비롯해 수차례에 걸친 논의와 토론을 거듭해 1981년 6월 공산당 11기 6중전회에서 통과됐다.

이 역사결의의 문혁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영도자(마오)가 잘못 발동하고 반혁명 집단(린뱌오와 4인방)에 의해 악용됐다. 그 결과 문혁은 공산당과 국가, 전 인민에 엄중한 재난을 초래한 '내란'일 뿐이었다.' 다만 마오의 잘못을 말할 때는 동시에 마오의 정확한 면과 업적도 지적돼야 공정한 평가라는 점을 명기했다. 또 역사결의는 마오 사상이 막스레닌주의의 보편적 원리와 중국 혁명의 구체적 실천이 결합한 산물이고, 중국 공산당의 집단지혜의 결정이며 장기간의 역사적 검증을 거쳐 형성된 과학적 이론이라고 평가했다.

이 역사결의를 통해 중국공산당이 직면한 두가지 난제가 해결됐다. 하나는 마오쩌뚱과 마오사상에 대한 평가고 다른 하나는 문혁에 대한 평가다. 이를 통해 공산당은 마오를 '위대한 영도자'로 여전히 존경할 수 있게 됐고 마오 사상을 공산당의 지도이념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마오 사상을 폐기함으로써 초래될 정치적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 공산당의 단결과 통합을 한단계 높일 수 있었다. 이는 1956년 소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스탈린 시대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소련공산당 지도부가 분열되고 당의 대중적 신뢰가 실추된 것과는 아주 대조되는 성공적 결과였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1976~1982년)>(조영남)의 한 대목을 대충 요약한 건데 음미해볼만하다. 전 지도자의 과오를 수습하는 방식에서 소련과 대조적인 행보가 인상적이다. 이런 점이 중국의 저력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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