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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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에서는 직선제 개헌 운동과 양김의 분열, 6월 민주항쟁과 6.29선언.. 그리고 노태우 당선까지의 주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직선제로의 개헌을 요구하는 움직임들이 보이자 전두환은, 개헌 문제는 서울 올림픽이 끝난뒤 89년에 가서 논의하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대학 교수들의 양심선언이 잇달았고, 학생들은 분신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저항했다. 이런 움직임들은 '1천만명 개헌 서명운동'으로 모아졌다. 재야인사들과 각종 시민단체가 동참했지만, 전두환의 4.13호헌조치라는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부천서 성고문'사건은 5공의 부도덕성을 여실히 드러내줬다. 권인숙은 위장취업을 위해 주민 등록증을 위조했다는 혐의로 경기도 부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조사받는 과정에서 담당 형사 문귀동으로부터 성고문을 당했다. 권인숙은 문귀동을 고소했는데, 검찰은 그런 행위가 없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5공과 그 나팔수 노릇을 하던 언론들은 "운동권이 마침내 성까지 혁명의 도구로 삼고 있다"고 역공을 가했다. 정말 치졸하고 비윤리적이고 몰상식하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보도지침을 뿌려댔다. 사건 발생 3년만에 문귀동은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전두환 정권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다 사퇴하게 된 고려대 총장 김준엽도 전두환의 치적이라 평가하는 것이 바로 88올림픽 개최와 물가안정이었다.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 이른바 '3저호황'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 불릴 정도로 이 시기, 증권 부동산 관광 등의 붐을 일으켰다. 이를 통해 중산계층이 육성되었는지는 모르지만, 86, 88 국제대회를 앞두고 빈민들과 소시민들은 강제 철거 당해 거리로 내몰렸다.

 

사람들로 하여금 저녁 시간에 올림픽 TV중계를 보게 하려고 시계 바늘을 1시간 앞당겨 생활하게 한 '서머타임'의 실시는 정말 엽기적 정책이었다.

 

전두환은 6월 항쟁 당시에 병력 파견 계획을 결정했었다고 한다. 미국은 반대했다. 전두환은 결국 올림픽 개최를 앞둔 시점에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것을 염려해 군부개입 시도를 포기했다. 6월 항쟁에 참여했던 중산층은 직후의 노동자대투쟁에 등을 돌리고 거리를 뒀다.

 

6.29선언은 어느 면에서는 노태우 자신이 표현한 대로 국민에 대한 항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다른 면에서는 항복을 가장한 권력 연장의 합리적이고 계산된 행동이었던 것 같다.  

 

대선 직전에 발생한 KAL858기 폭파사건은 소련과 중국이 88올림픽에 참가하기로 하자 고립감을 느낀 북한이 내부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저지를 사건이라고 결론이 났지만, 암튼 이것이 노태우에게는 엄청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 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당선 직후 노태우는 5공과의 적당한 거리두기를 실천했는데, 5공 청문회도 그 과정 중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5공 비리를 추궁하던 10여 명의 야당의원들이 5공 비리와 관계되어 있는 재벌들로부터 억대의 뇌물을 받아 쳐먹었다는 사실..;; 짜고 치는 고스톱에 국민들이 놀아난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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