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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불청객이 문을 두드린다
『달과 6펜스』의 작가 서머셋 모옴의 작품 중 <비>라는 단편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국의 섬에서 선교사가 창녀를 선교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선교사는 창녀를 본국으로 송환 신청하고, 창녀는 감화원에 수감되지 않기 위해 매달리지만 거절당한다. 벼랑 끝에서 창녀는 회개한다. 매일 선교사는 창녀를 찾아가 새벽까지 기도한다. 본국으로 가는 배가 도착한 날, 선교사는 창녀를 겁탈하고 자살한다. 창녀는 그동안 자신을 몰아세운 이들을 경멸하며 비웃는다.
<비>에서는 두 불청객이 등장한다. 선교사에게는 성적 본능이 그것이다. 창녀에게는 윤리라는 문명이 그것이다. 두 불청객이 각각 문을 두드리고, 선교사는 지금껏 휘둘러왔던 문명의 힘이 도리어 자신을 겨누자 자살한다. 창녀는 문명의 힘에 기대어 마음의 안정을 얻지만, 결국 선교사에게 큰 상처를 받는다. 이국의 섬에서 문명은 속절없이 본능에 패배한다. 만약 도시였다면 문명이 승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도시에서, 그것도 당대 문화의 중심지 파리에서 끊임없이 문명을 거부하며 본능의 승리를 일구어낸 이가 있다.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다.
주식중개인으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던 스트릭랜드는 하루아침에 부인과 자식들과 집을 버리고 파리로 떠난다. 비록 그림을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였지만, 비난받기에 늦은 나이는 아니었다. 미친 거냐고, 양심도 없냐고, 헛수고일 거라고 던지는 말에 스트릭랜드는 답한다.
나도 나 자신을 어찌할 수가 없단 말이오. 사람이 물에 빠지면 수영을 잘하고 못하고가 무슨 상관이겠소. 어떻게든 물에서 나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고 말 거요.
스트릭랜드는 편안하게 타성에 젖어 정주하기 마련인 마흔일곱의 나이에 물에서 빠져나온다. 그 어떤 비난도 스트릭랜드를 막지 못했다. 심지어 굶주림이나 병고도 소용없었다. 스트릭랜드는 문명이 요구하는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 그동안 억눌러왔던 본성을 좇기에 바빴다.
본성(本性)을 사전에서 찾으면 “사람의 본디의 성질. 타고난 성질.”이라고 정의한다. 사람의 성질에서 문명을 걷어내면 스트릭랜드가 될법하다. 그럼 스트릭랜드의 본성이 좇은 예술이란 무엇일까.
얼핏 예술이란 말은 어렵게 들린다. 복잡한 가전제품 설명서처럼 대중이 쉽게 이해하기에 버거워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달과 6펜스』에서 화자는 말한다.
예술을 마치 예술가들만 이해할 수 있는 기술로 보는 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예술은 감정의 표현이며, 감정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 말대로라면 예술이란, 사람에게 감정을 느끼게 하는 모든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유명한 그림이나 소설을 보고 감동하지 못한 사람이 특별한 요리나 기계를 보고 감동할 수도 있는 법이다. 수학이나 과학도 극에 달하면 예술이 된다고 한다. 물론 아무나 감동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스트로브가 말하듯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지식과 섬세함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을까.
최초의 그림은 동굴벽화였다. 아직 예술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대에 이미 예술이 존재했다. 감정은 사람의 기본적인 본성이기에,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면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예술가의 본성을 지녔기 때문에 예술을 좇은 것이 아니다. 본성을 좇았기 때문에 예술가가 되었다.
예술가라고 모두 스트릭랜드처럼 괴팍하지는 않다. 소설가 조정래는 매일 꾸준히 글을 쓰고 평범한 가정생활을 꾸렸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을 쓰기 위해 마라톤을 하고 윤리적 발언을 한다. 예술가들의 삶에도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오직 하나,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점이다. 성실한 주식중개인이 아닌 막돼먹은 스트릭랜드를 동경한다면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타히티 섬에서 비로소 문명의 제약에서 벗어난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스트릭랜드는 동그란 구멍을 막고 있는 사각 마개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구멍의 모양이 너무도 다양했기에 그 어떤 모양의 마개도 그리 어긋나지는 않았다.
누구나 문명의 틀에 맞추어 산 경험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음악가가 본성인 사람이 대기업에 입사하는 건 동그란 마개를 사각 구멍에 끼워 넣는 꼴이다. 그는 언젠가 스트릭랜드처럼 물에서 뛰쳐나오거나 아니면 익사해 버릴 것이다. 누가 시켜서 예술을 할 수 없듯이 누가 시켜서 인생을 살 수 없다.
『불안하니까 사람이다』에서 레오 버스카글리아는 “산다는 것은 죽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고,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절망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위험은 아무것도 감수하지 않는 일이다.”라고 했다. 인생에서 위험을 감수할 만한 일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아닐 것이다.
난 과거 따윈 생각하지 않네. 중요한 건 영원한 현재뿐이지.
행복하냐고 묻는 화자에게 스트릭랜드는 대답한다.
행복하네.
본성이 시키는 일을 하다 보면 그 끝에 예술이 있고, 행복이 있으리라 믿는다.
의사 쿠트라는 스트릭랜드의 마지막 걸작을 본 소감을 이렇게 말한다.
그림 속의 나무들은 야자수나 바니안나무, 불꽃나무, 아보카도같이 내가 매일 보는 것들이라서 그 후로는 그것들이 새삼 다르게 보입디다. 마치 그 나무들이 영혼이나 신비한 수수께끼라도 품고 있는 듯 말이오.
늘 보던 것을 예전과 다르게 보이게 하는 것이 예술의 힘이라면 『달과 6펜스』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지, 발밑의 6펜스를 보느라 하늘의 달을 못 보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만든다.
불청객이 문을 두드린다. 어떤 불청객에게 문을 열어 줄지는 나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