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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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타자의 자리 바꾸기


단속사회에서는 '노동자를 꿈꾸지 않는 사회'를 소비만 중요시하고 노동을 경시하는 사회에서 연장된 학교 교육의 결과로 보았다. 사회 속의 개인보다 개인이 속한 사회를 살펴본 것이다.


단속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뽑으라면 발견이라 하겠다. “반경 10마일의 산책 가능한 거리 안에 있는 경치와 인간의 칠십 평생,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말이다. 발견하는 과정은 여행뿐 아니라 사람과 사회에도 적용된다. 발견이 실종되고 확인만 되풀이하는 현대사회는 마치 고인 물처럼 느껴진다.


발견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나와 타자간의 접촉이 필요하다. 접촉은 하되 나는 특정한 한 주체로서 존재해야 하며, 타자에게 전적으로 빨려들어가지 않아야 한다. 단속사회에서 만남은 다만 내적 성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의 확장이라 말한다. ‘가 되는 과정의 연속이 곧 진정한 관계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만남에서 타자를 도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자리 바꾸기, 즉 고통의 공감이 이루어질 때 단절은 사라질 것이다.


저자는 곁을 주는 말하기 방식으로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러나 객관성을 해치는 듯한 다소 감정적인 어조나 산만한 구성이 좋은 소재에 비해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수많은 사례와 단상으로 인해 이 책은 읽어볼 만한 것이 되었다. 단, 분석보다 공감하며 읽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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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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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나를 세운다


같은 현상일지라도 어떤 언어를 매개로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데, 모멸감에서는 '노동자를 꿈꾸지 않는 사회'를 자기 정체성이 박약한 개인이 허위의식에서 자존감을 찾으려는 편견으로 보았다. 개인이 속한 사회보다 사회가 속한 개인에게 더 집중한 것이다. 


모멸감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꼽으라면 비교라 하겠다. 침팬지 실험에서 침팬지도 실수한 것을 들키면 화를 낸다는 에피소드는, 모멸감의 근원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깨닫게 해준다. 사회적 동물은 내가 아닌 타자를 의식할 수밖에 없으며, 타자가 있기에 비교를 하게 된다. 비교는 필연적으로 우위를 정하고, 타자보다 잘나 보이고 싶은 적어도 못나 보이고 싶지 않은 상대적 욕망이 모멸감으로 이어진다.


결국 모멸감이란 타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타자가 반드시 한 가지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타자보다 잘나 보이고 싶은 욕망 외에 잘 보이고 싶은 욕망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와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타자에게 나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자존감으로 이어지며, 그 노력이 나를 성장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한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말이다.


그렇다면 타자와 모멸감을 주고받지 않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모멸감은 구조적 차원의 접근으로서의 사회운동과 문화적 차원의 접근으로서의 가치의 다원화를 제시한다. 또한 개인의 내면적인 힘을 키울 것을 당부한다.


여기에서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은 다시 한 번 드러난다. 서두에서는 수치심과 모욕감과 모멸감의 개념을 구분하여 알려주는 것으로, 해당 언어가 가리키는 현상 또한 이해시켰다. 마지막에는 자존심의 뜻을 알려주는 것으로, 자존의 각성과 타인과의 품위 있는 관계 형성을 촉구했다. 이렇듯 모멸감에서는 세밀한 언어의 사용이 빛난다. 언어뿐 아니라 그림과 음악의 힘까지 빌린 것도 큰 특징이랄 수 있는데, 소재가 감정이니만큼 매우 효과적이면서 신선한 방법이었다.


 모멸감에서 인용한 더글러스 스톤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기 어렵다. 감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고, 스스로 위장을 잘한다. 우리가 편치 않게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잘 다룰 수 있는 감정으로 스스로를 위장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독서가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나를 표현하는 언어를 알지 못하면 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며, 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타인의 언어에 휘둘리고 말기 때문이다. 감수성 또한 마찬가지다. 감수성이 무디다는 것은 바로 자신에게 무디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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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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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청객이 문을 두드린다

 

달과 6펜스의 작가 서머셋 모옴의 작품 중 <>라는 단편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국의 섬에서 선교사가 창녀를 선교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선교사는 창녀를 본국으로 송환 신청하고, 창녀는 감화원에 수감되지 않기 위해 매달리지만 거절당한다. 벼랑 끝에서 창녀는 회개한다. 매일 선교사는 창녀를 찾아가 새벽까지 기도한다. 본국으로 가는 배가 도착한 날, 선교사는 창녀를 겁탈하고 자살한다. 창녀는 그동안 자신을 몰아세운 이들을 경멸하며 비웃는다.


<>에서는 두 불청객이 등장한다. 선교사에게는 성적 본능이 그것이다. 창녀에게는 윤리라는 문명이 그것이다. 두 불청객이 각각 문을 두드리고, 선교사는 지금껏 휘둘러왔던 문명의 힘이 도리어 자신을 겨누자 자살한다. 창녀는 문명의 힘에 기대어 마음의 안정을 얻지만, 결국 선교사에게 큰 상처를 받는다. 이국의 섬에서 문명은 속절없이 본능에 패배한다. 만약 도시였다면 문명이 승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도시에서, 그것도 당대 문화의 중심지 파리에서 끊임없이 문명을 거부하며 본능의 승리를 일구어낸 이가 있다.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다.


주식중개인으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던 스트릭랜드는 하루아침에 부인과 자식들과 집을 버리고 파리로 떠난다. 비록 그림을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였지만, 비난받기에 늦은 나이는 아니었다. 미친 거냐고, 양심도 없냐고, 헛수고일 거라고 던지는 말에 스트릭랜드는 답한다

나도 나 자신을 어찌할 수가 없단 말이오. 사람이 물에 빠지면 수영을 잘하고 못하고가 무슨 상관이겠소. 어떻게든 물에서 나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고 말 거요.


스트릭랜드는 편안하게 타성에 젖어 정주하기 마련인 마흔일곱의 나이에 물에서 빠져나온다. 그 어떤 비난도 스트릭랜드를 막지 못했다. 심지어 굶주림이나 병고도 소용없었다. 스트릭랜드는 문명이 요구하는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 그동안 억눌러왔던 본성을 좇기에 바빴다.


본성(本性)을 사전에서 찾으면 사람의 본디의 성질. 타고난 성질.”이라고 정의한다. 사람의 성질에서 문명을 걷어내면 스트릭랜드가 될법하다. 그럼 스트릭랜드의 본성이 좇은 예술이란 무엇일까.


얼핏 예술이란 말은 어렵게 들린다. 복잡한 가전제품 설명서처럼 대중이 쉽게 이해하기에 버거워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달과 6펜스에서 화자는 말한다

예술을 마치 예술가들만 이해할 수 있는 기술로 보는 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예술은 감정의 표현이며, 감정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 말대로라면 예술이란, 사람에게 감정을 느끼게 하는 모든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유명한 그림이나 소설을 보고 감동하지 못한 사람이 특별한 요리나 기계를 보고 감동할 수도 있는 법이다. 수학이나 과학도 극에 달하면 예술이 된다고 한다. 물론 아무나 감동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스트로브가 말하듯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지식과 섬세함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을까.


최초의 그림은 동굴벽화였다. 아직 예술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대에 이미 예술이 존재했다. 감정은 사람의 기본적인 본성이기에,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면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예술가의 본성을 지녔기 때문에 예술을 좇은 것이 아니다. 본성을 좇았기 때문에 예술가가 되었다.


예술가라고 모두 스트릭랜드처럼 괴팍하지는 않다. 소설가 조정래는 매일 꾸준히 글을 쓰고 평범한 가정생활을 꾸렸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을 쓰기 위해 마라톤을 하고 윤리적 발언을 한다. 예술가들의 삶에도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오직 하나,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점이다. 성실한 주식중개인이 아닌 막돼먹은 스트릭랜드를 동경한다면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타히티 섬에서 비로소 문명의 제약에서 벗어난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스트릭랜드는 동그란 구멍을 막고 있는 사각 마개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구멍의 모양이 너무도 다양했기에 그 어떤 모양의 마개도 그리 어긋나지는 않았다.

 누구나 문명의 틀에 맞추어 산 경험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음악가가 본성인 사람이 대기업에 입사하는 건 동그란 마개를 사각 구멍에 끼워 넣는 꼴이다. 그는 언젠가 스트릭랜드처럼 물에서 뛰쳐나오거나 아니면 익사해 버릴 것이다. 누가 시켜서 예술을 할 수 없듯이 누가 시켜서 인생을 살 수 없다.


불안하니까 사람이다에서 레오 버스카글리아는 산다는 것은 죽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고,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절망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위험은 아무것도 감수하지 않는 일이다.”라고 했다. 인생에서 위험을 감수할 만한 일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아닐 것이다


난 과거 따윈 생각하지 않네. 중요한 건 영원한 현재뿐이지.

행복하냐고 묻는 화자에게 스트릭랜드는 대답한다

행복하네.

본성이 시키는 일을 하다 보면 그 끝에 예술이 있고, 행복이 있으리라 믿는다.


의사 쿠트라는 스트릭랜드의 마지막 걸작을 본 소감을 이렇게 말한다

그림 속의 나무들은 야자수나 바니안나무, 불꽃나무, 아보카도같이 내가 매일 보는 것들이라서 그 후로는 그것들이 새삼 다르게 보입디다. 마치 그 나무들이 영혼이나 신비한 수수께끼라도 품고 있는 듯 말이오.


늘 보던 것을 예전과 다르게 보이게 하는 것이 예술의 힘이라면 달과 6펜스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지, 발밑의 6펜스를 보느라 하늘의 달을 못 보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만든다.


불청객이 문을 두드린다. 어떤 불청객에게 문을 열어 줄지는 나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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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 완결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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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이 잊혀진다면 앞당겨질 미래


5, 혹독한 추위가 끝나지 않았다. 제주는 아직 노란 꽃소식이 없는데, 영동은 몇 남지 않은 침엽수가 불에 타 붉은 꽃을 피웠다. 하얗게 굳은 눈이 채 녹기도 전에 황사가 들이닥쳤고, 길이며 집이며 사람들 머리에는 누르뎅뎅한 먼지가 쌓였다. 서해안은 봄에 낙타가 산다는 말이 생겼다. 가뭄은 이제 남의 나라 일이 아니었다. 그런 봄이라도 어서 오기만을 바라지만, 아직 겨울은 끝나지 않았다. 작년보다 또 늦었다. 10년 전에 비하면 훨씬 늦었다.


본래 한국의 봄은 3월부터라 하였다. 눈꽃이 바스러지고 새싹이 젖은 흙을 들어 올리면 화려한 꽃무리가 천지를 뒤덮는다 하였다. 천년목이 숨 쉬는 푸른 숲은 공기마저 파랗게 물드는 것 같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산에서도 하늘에서도 파란 색을 찾기 어려웠다. 옛날에는 어디서나 보았다던 은하수를 이제는 외국의, 그것도 외딴 오지에 가야만 볼 수 있었다. 거금을 들여 은하수를 보러 떠난 이들은 우주의 신비보다 숲의 신비에 더 감화되어 돌아왔다.


월든이라는 호수가 있어. 낮에 거기서 낚시를 하는 거야. 강꼬치고기가 물장구치는 소리, 개똥지빠귀가 지저귀는 소리, 다람쥐가 가랑잎을 밟는 소리에 내내 가슴이 뛰었어. 너도밤나무 내음이 향긋해서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어. 다락방 창문을 연 것처럼 무성한 잎사귀들 사이로 빼꼼 보이는 하늘이, 그 파란색에 눈이 시려 눈물이 났어.


그들은 집으로 돌아와 나무를 키우기 시작했다. 기후와 토양이 이미 그것들이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음에도 그들은 어렵게 묘목을 구해 심었다. 그 현상을 월든효과라 부르기도 했다. 비단 한국에서만의 일이 아니었다. 다만 월든효과는 그곳에 다녀온 이들에게만 유효했으며, 그 수가 너무 적었고, 가보지 않은 이들에게 전염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반향이 될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월든효과는 사람들 입에 조금씩 늘 오르내렸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과거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그리 말했다. 그들의 답은 언제나 쉬웠다. 인간의 탐욕이 세상을 망쳤어.

지금이 어때서. 미래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그리 말했다. 그들의 답도 언제나 쉬웠다. 인간의 정열이 세상을 구했어.


그들이 말하는 세상과 그들이 말하는 세상이 서로 달랐으며, 그 사이에 월든이 있었다. 문명사회 가운데 간신히 숨 쉬고 있는 원시림은 꽤 상징적이었다.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월든을 긍정할 수 없으며, ‘월든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미래를 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분명 무언가를 잃어버렸으며, 원인은 우리의 역사 한가운데에 있었다. 과거 월든에 살았다는 소로우의 저작 <월든>이 지금도 종종 논쟁거리가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월든>은 비단 사회현상이나 자연현상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인간이었다. 소로우는 진정한 를 찾아 선행이든 악행이든 사회에 맞추지 말 것을 요구했다


각자는 자기 자신의 일에 열중하며, 타고난 천성에 따라 고유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자기가 그리던 바의 생활을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보통 때는 생각지도 못한 성공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때 그는 과거를 뒤로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을 것이다. 새롭고 보편적이며 보다 자유로운 법칙이 그의 주변과 내부에 확립되기 시작할 것이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므로, 결국 진정한 를 찾는 일은 곧 자연과 진정한 문명을 찾는 일이나 다름없다.


월든효과가 효과로 그친 이유는, 그들이 자신을 바꾸기에 앞서 주위부터 바꾸려 들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흉내만 내고, 내면으로 진정으로 월든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든을 가슴에 품은 이들이 존재하는 건 큰 위안이다. 마스크로 얼굴을 둘러싸고도 호흡기질환과 눈병을 달고 사는 지금, 봄이 더 이상 그립지만은 않은 지금, 10년 전 과거만 해도 감지덕지라 부르는 지금, 바로 지금 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면 말이다.


설사 늦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를 찾는 일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당신의 인생이 아무리 비천하더라도 그것을 똑바로 맞이해서 살아나가라. 그것을 피한다든가 욕하지는 마라.


지금 상황이 어떠하든 나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늦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여전히 월든<월든>이 생생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6월 짧은 봄이 지나면, 7월 혹독한 더위가 시작된다. 여름은 길고, 가을은 짧다. 겨울은 길고, 봄은 짧다. 내가 진정한 를 찾기 전까지 이 고난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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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랄라
말랄라 유사프자이.크리스티나 램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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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홀로 자라지 않는다

 

1985년 풀 한포기 없는 사막으로 보내진 스무 살 신부는 그곳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20년 뒤 사막은 숲이 되었고, 이제 그녀의 아들과 많은 사람들이 나무를 심는다. “사막을 피해 돌아가서는 숲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사막에 나무를 심었더니, 그것이 숲으로 가는 길이 됐지요.” 마오우쑤 사막에 숲을 세운 인위쩐의 이야기다.


2013712일 열여섯 살 생일을 맞은 소녀가 뉴욕 유엔 본부 연단에 섰다. “우리가 책과 펜을 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책과 펜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한 명의 어린이가, 한 사람의 교사가, 한 권의 책이, 한 자루의 펜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탈레반에게 총격을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에도 교육받을 권리를 외친 말랄라의 이야기다. 2014년 말랄라는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된다.


사람들은 소녀를 영웅이라 불렀다. 마치 그녀가 특별한 것처럼, 불모지에 홀로 자라난 나무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소녀는 영웅이 아니다. <나는 말랄라>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루는 막냇동생 아탈이 정원을 마구 파헤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뭘 하는 거야?” 내가 물었다. “무덤을 파는 거야.” 동생이 대답했다뉴스 속보마다 죽이고 죽는 소식으로 가득했으니 아탈이 관과 무덤을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한다.


우리 파슈툰은 신발을 좋아하지만 신발 수선공은 대우하지 않는다. 육체노동자는 우리 사회에 대단히 큰 기여를 하지만 인정은 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 중 상당수가 탈레반에 가담하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마침내 사회적 지위와 힘을 누릴 수 있으므로.

아이들은 보고 들은 것을 배운다.


저는 세상 모든 아이들의 교육받을 권리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탈레반과 모든 테러리스트들의 아들·딸들도 교육받기를 원합니다. 저는 저에게 총을 쏜 탈레반원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저의 손에 총이 있고 그가 제 앞에 있다 하더라도 저는 그를 쏘지 않을 겁니다. 이것은 마호메트와 예수 그리스도, 부처님께 배운 연민입니다. 마틴 루서 킹과 넬슨 만델라, 간디와 테레사로부터 배운 비폭력의 철학입니다. 저의 부모로부터 배운 용서입니다.

아이들은 보고 들으며 어른이 된다.


말랄라는 평범한 아이였다. 아름다운 고향 스와트에서 나고 자랐고, 코란을 읽으며 성장했다. 아이답게 실수도 하고, 친구와 싸우기도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그리했듯이 아버지로부터 교육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 모든 파키스탄 문제의 근원이라고, 남녀노소가 모두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자연스럽게 배움을 갈망했다. 이미 어릴 때 파키스탄에서는 남자와 여자에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아버지의 지지 위에 계속된 교육은 말랄라의 의문을 바꾸었다. 여자는 어디까지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가 아니라 여자는 어떻게 해야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로. 그리고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이제 말랄라가 교육받을 권리에 대해 세상에 당당하게 외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영웅은 설 자리가 없다. 가족과 친구를 사랑하는 소녀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 것이 전부이다. 아버지라는 토지 위에 교육이라는 물을 마시고, 비로소 거센 바람에 튼튼한 뿌리를 내리듯 자연스럽게 말랄라는 말랄라가 되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말랄라의 평범함이 고맙고 사랑스럽다. 그녀의 말처럼 세상을 변화시킬 유일한 해결책은 교육이라는 걸, 그녀의 삶이 보여주었다.


인위쩐은 사막에 나무를 심기 전에 풀씨를 뿌렸다. 나무는 홀로 모래폭풍을 이기지 못했다. 풀이 자라 나무를 지켜주었고, 나무가 자라 풀을 지켜주었다. 말랄라 역시 홀로 자라지 않았다. 말랄라를 지지하는 수많은 이들이 풀씨처럼 그녀를 지켰다. 그리고 이제 말랄라가 그들을 지킨다. 나무 한 그루는 숲이라 하지 않지만, 숲은 한 그루의 나무에서 시작한다. 언젠가 말랄라도 숲을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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