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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ㅣ 밀란 쿤데라 전집 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평점 :
시선 속에 갇힌 정체성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쓴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이다. 체코에서 태어난 밀란 쿤데라는 사회주의를 비판하다가 출판 금지 조치를 받으면서 1975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1989년 공산 통치가 끝나고 체코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본국에 임시 귀국하여 꾸준하게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그 중 『정체성』은 1997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정체성』은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연인이 있는 여자가 알지 못하는 남자로부터 연애편지를 받는다는 흥미진진한 사건으로 시작하지만,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실재인지 혼란스러운 결말에 이르면 해석이 난감해지기 쉽다. 거듭 읽어야 다양한 키워드가 품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정체성’과 ‘시선’은 그 중 주제와 가장 가까운 키워드로 볼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줄곧 시선을 강조한다. “우리 발걸음 하나하나가 통제되고 녹화되는 이 세계, 커다란 백화점에서는 카메라가 우리를 감시하고, 사람들끼리 쉴 새 없이 부딪치고, 심지어 섹스를 한 뒤에도 다음 날 연구소 직원이나 설문 조사원으로부터 받는 질문을 피할 수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감시에서 벗어나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을까?” CCTV 같은 기계뿐 아니라 사회제도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평생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졌다. 현대인에게 타인의 시선은 정체성을 형성하는 필연적인 요소인 셈이다.
변하지 않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정체성이 유지되는 동안은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 샹탈은 두 번 그런 시기를 맞는다. 첫 번째는 전 남편과 수년간 결혼 생활을 지속한 과거이고, 두 번째는 이혼하고 장마르크라는 연인을 만나 동거하는 현재이다. 그러나 정체성이 오랫동안 변하지 않으면 삶은 매뉴얼화되고 사람은 권태에 빠진다. “그녀는 모험도 없고 모험에 대한 욕망도 없는 상태의 행복을 음미했다.” 모르는 남자에게 연애편지를 받으며 새로운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샹탈의 권태는 깨지고, 정체성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연인인 장마르크는 샹탈을 과거의 존재로 되돌리고 싶어 한다. 샹탈의 변화는 곧 장마르크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시선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타인의 시선이 변하지 않는 일이 가능할까. 샹탈의 변화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현대사회의 또 다른 특징인 관계의 단절을 이 책에서는 가족의 해체(부부), 연대의 상실(친구), 무관심(직업)으로 차례차례 짚어준다. 관계가 단절되면 기존의 시선을 상실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선을 획득한다. 그 과정에서 정체성이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너무나 빠르게 쏟아지는 불특정 다수의 시선 앞에서 샹탈은 정체성이 흔들리다 못해 급기야 자신의 이름마저 잊어버리고 만다. 살아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실종자”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체성이 지나치게 오랜 시간 고정되는 것만큼이나 급격한 변화 역시 존재를 죽음과 같은 권태로 이끈다.
꿈에서 깨어난 샹탈은 장마르크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접촉을 거부한 채 오직 보기만 할 거라고. 신뢰할 수 있는 타인의 시선을 붙잡으려는 샹탈의 두려움은, 정체성을 찾으러 애쓰는 현대인들의 절박함과 닮아 있다. 마지막에 샹탈과 장마르크를 들여다보는 ‘나’는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여 틀 안에 가두는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듯하다.
상징을 약간만 덜어줬다면 읽기가 편했을 듯싶지만, 복잡한 결을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성찰이 분명히 소설 속에 존재한다. 특히 체코에서 프랑스로, 사회주의에서 민주주의로, 큰 변화를 경험한 밀란 쿤데라이기에 그가 말하는 ‘정체성’은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 서사로만 보면 연애소설로 끝났을 이야기에, 이토록 복잡한 미로를 얹어 깊은 사색으로 이끄는 밀란 쿤데라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