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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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읽고 11살 아들에게 물었다.

「 돈을 내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법을 제정해도 괜찮을까? 」

아들이 답했다.

「 물론이지! 아빠. 요즘은 사람보다 무기의 질이 국가의 군사력을 결정한다고. 돈으로 무기를 살 수 있으니 좋고 말고. 단 많은 돈을 내게 해야 해. 」

평소 볼 수 없었던 아들의 논리적인 면모에 놀라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 오, 굉장히 그럴싸한 발상인데? 그런데 그 법을 제정했을 때 문제는 없을까? 」

아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의 물꼬를 트려 했으나 실패했다. 내 도움으로 그 제도가 불공평과 불공정의 문제를 야기 할 수 있다는 데 가까스로 공감했으나 갸우뚱거리는 머리를 멈추지 못했다. 내가 모든 남성이 군대에 가는 의무를 지는 까닭은 군사력을 증진하는 것 너머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을 때 아들은 자리를 떠났다. 욕심이었다.

멈추지 못하고 아내에게 다가가 바버라 해리스의 사례를 말해주었다.

매년 수십만 명에 이르는 아이들이 마약 중독자에게서 태어난다. 이 아기 중 많은 수가 학대나 방임으로 고통받는다. 바바라 해리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장기반 해결책을 제시했다. 마약 중독 여성이 불임시술을 받거나 장기간 피임하면 현금 300달러를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 바바라 해리스의 해결책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어. 그런데 해리스의 접근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았다고 해. 불임 시술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것에 시장의 논리가 끼어들면 안된다는 거지. 시장의 논리가 끼어들면 자녀를 가지는 의미가 퇴색된다는 게 주요 논지야 」

아내는 빠르게 대답했다.

「 아니, 그럼 어쩌자는 거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아이의 목숨은 중요하지 않은 건가? 그렇게 따지면 많은 아이를 낳았을 때 많은 복지 혜택을 주는 것도 시장의 논리인가? 너무 편한 의견 아니야? 」

아내의 말에 담긴 함의가 가볍지 않다.

2

합리성을 기치로 내세운 경제학적 사고 방식이 곳곳에 침투해 승전보를 울린다. 뉴욕시가 공중권 을 사고 팔게 해 도시의 유연성을 증가시킨 소식이 인상 깊다. 도시 중심가의 교통 혼잡을 줄이기 위해 특정 시간대에 차량 통행료를 부과하는 제도를 도입하니 교통이 원활해졌고 시민들의 불만도 줄었다.

시장의 방법을 택하지 않은 전장에서 패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선한 마음으로 어린이 노동을 전면 금지 시켰더니 어린이의 삶이 더 고통스러워졌다는 뉴스다. 시장이 행하던 순기능을 없앴기에 아이들이 소득을 거둘 수 있는 합법적 수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승전보에 힘입은 몇몇 경제학자는 공리의 합으로 사안의 옳고 그름을 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리의 합을 고려하지 않은 과거의 관행을 "불필요한 관행"이라 말하고 불필요한 관행을 따르는 사람들을 비교육의 희생양으로 생각하며 안타까워한다.

경제학자의 사고 방식은 내 행동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난 아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규범을 크게 강조하지 않는다. 아들이 뾰족한 말을 뱉었을 때 남을 존중하지 않는 말투를 사용하는 건 잘못이라고 혼내는 한편 「 그렇게 행동해서 네게 어떤 이득이 있니? 그렇게 행동하면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어 」 라고 더한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유심히 보니 여러 곳에서 공리주의의 깃발이 펄럭인다. 괜찮을까?

3

비싼 요금을 감내하면 놀이 기구를 빨리 탈 수 있다. 2022년 브라질 축구 대표팀이 한국에 방문해 한국 축구 대표팀과 경기를 했다. 당시 브라질 선수들은 에버랜드에 들려 여러 놀이기구를 즐기기도 했다. 에버랜가 제공하는 우선 탑승권 요금제에 감사한다. 에버랜드는 큰 광고 효과를 얻었고 브라질 선수들은 기다림 없이 놀이기구를 즐겼다. 브라질 선수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나 역시 즐거웠다. 경제학자들이 좋아할 예시다.

미국의 샌디에고·미니애폴리스·휴스턴을 비롯한 여러 도시가 카풀차로로 빨리 통근할 수 있는 권리를 최대 100$에 팔고 있다. 명절 귀경 길에서 10m 나아가기도 버거울 때 버스 차로로 빠르고 당당히 달리는 벤츠를 상상하니 기분이 나쁘다. 부자와 빈자가 체감하는 돈의 효용 곡선은 다르기에 부자와 빈자에게 100$는 같지 않다. 따라서 부자는 빈자보다 적은 비용으로 카풀차로를 이용하는 것이고 이건 불공정하다.

뉴욕시 퍼블릭시어터는 여름마다 센트럴파크에서 무료 야외공연을 연다. 인기가 많은 공연이기에 입장권을 받으려면 긴 줄을 기다려야 한다. 이 수요를 포착해 대리 줄서기 사업이 등장했다. 경제학자는 대리 줄서기 사업의 출연을 나쁘게 보지 않으며 심지어 암표를 긍정하는 경제학자도 있다. 대리 줄서기와 암표는 효율적으로 자원을 분배한다. 거래가 성립했기에 효용 또한 증가했다. 공연의 이득이 공급자가 아닌 이가 가져간다는 게 맘에 걸리지만 이는 애초에 뉴욕시가 공연에 요금을 적절하게 책정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경제학자에게 대리 줄서기와 암표의 출연은 재화에 바르지 않은 가격표가 매겨졌다는 증거다.

하지만 뉴욕시가 야외공연에 암표가 발생하지 않을 만한 가격을 매기면 본래 뉴욕시가 전파하고자 했던 메시지 -뉴욕시에 거주하는 모두가 야외공연을 볼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가 완전히 훼손된다. 과거에는 동승자 없이 카풀차로로 달리면 벌금을 내야 했다. 이제 카풀차로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살 수 있기에 벌금이 요금이 되었다. 벌금의 요금화로 카풀차로 제도에 담고자 했던 원래 취지 -교통 체증과 대기오염을 줄인다- 가 훼손되었다.

경제학자는 가치를 가장 높게 책정한 이에게 재화가 돌아간 사실을 말하며 시장의 우수함을 말한다. 하지만 부자는 재화의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하기 때문에 최고 가격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부자'기 때문에 최고 가격을 지불했을 수도 있다.

재화를 분배하는 방식은 여러가지다. 가격을 부여하는 방법도 그중 하나고 각자의 방식은 장단점을 가진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재화를 분배하는 방식이 재화의 성격을 규정할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선착순으로 분배하던 재화에 가격표를 매겨버리면, 그 재화는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다.

4

적지 않은 교회가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어린이에게 달란트를 상품으로 준다. 어린이는 매년 열리는 달란트 시장에서 달란트를 문구·장난감·과자와 교환할 수 있다.

내가 5학년 때 일이다. 집사 한 분이 교회에 안 나왔던 아이가 교회에 오면 자기 돈 1000원을 쥐어줬다. 다른 몇몇 집사가 분개해 이를 공론화했고 1000원을 쥐어주던 집사는 속상한 가슴을 만지며 교회를 떠났다. 자본주의의 세가 더 커진 요즘에도 돈으로 아이를 전도하는 방법은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11살 아들은 명절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러 가는 게 마뜩잖다. 3시간 동안 차를 타는 건 힘들고 도착한 곳엔 또래 친척도 없기에 심심하다. 내가 아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면 용돈을 넉넉하게 받으니 감당하라"고 말하는 걸 아내가 듣자 다그쳤다.

「 철아.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

오늘날 도덕 규범의 기반은 과거처럼 견고하지 않기에 "옳고 그름"을 강조하는 것보다 행동의 "이익"을 강조해 타인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게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달란트를 주는 것은 허용되나 돈을 직접 주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이유는 뭔가? 달란트에는 교회가 강조하는 유일신의 은혜란 개념이 내포되어 있으나 "돈"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는 것을 이익으로 치환해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에 아내가 거북함을 표현한 까닭은 무엇인가? 금전적 동기가 바람직한 동기를 밀어낸다는 걸 아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조부모의 집으로 기꺼이 가게 하는 방법으로 "용돈"을 들이미는 것은 떠올리기 편한 방법이다. 도덕을 말하며 아들을 설득하는 방법은 지난하다. 앞서 언급했던 바바라 해리스가 마약 중동자가 임신하는 걸 막기 위해 금전 이득을 제공했던 방법 외의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하지만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이 어딘지 잊어선 안된다. 아들이 자신을 이 땅에 있게 만든 우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보답했으면 하고 바라는 내 기대는 인센티브로 채울 수 없다. 도덕을 이득으로 대체해 가르치려는 시도는 도덕이 내포하는 긍정적 효과를 제거한다. 도덕이 시장 경제로 대체되면 도덕 규범을 곱씹고 행동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삶에 대한 바른 태도를 함양할 수 없다. 인간 사회에는 제도와 법으로 채울 수 없는 구멍이 허다하다. 그 구멍을 채우며 인간이 다툼을 최소화하며 진보케 하는 윤활유는 더 많은 이득을 얻으려는 욕심이 아니라 더 높은 '덕'을 성취하려는 염원이다. 이 염원을 이득으로 대체하면 당장의 문제는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후에 당도한 사회는 우리가 본디 원한 것과 다를 것이다.

5

경제학자는 선물 교환을 선호하지 않는다. 선물을 받는 이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알고 있으므로 선물보다 돈을 주는 것이 효용을 극대화 한다. 상대방이 지불한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가치와 비교해본다면 선물 교환은 가치를 훼손시킨다. 경제학은 사회 관행을 같은 방식으로 검토한 후, 사회 관행이 효용을 방해하는 비이성적 장애물이고 원칙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역기능적 제도"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경제학이 생각하는 효용은 단지 "경제학적 효용"일 뿐이다.

매년 가을이면 아버지는 산에 올라 송이 버섯을 캐 장모님와 우리 가족에게 배달한다. 아내와 장모님은 그 송이버섯을 좋아하고 매년 기다린다. 송이가 풍기는 향에는 산이 감춘 송이를 찾아내는 아버지의 솜씨와 산을 오르는 고됨을 감내하는 당신의 정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향기는 돈으로 대체될 수 없다. 마음을 전하는 데는 돈보다 송이가 더 바람직하다.

개인의 투표 효용은 0에 수렴하기에 투표를 경제학으로 평가하면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이다. 허나 난 투표를 하고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 투표장에 나가는 경제학적으로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길 바란다. 투표는 효용을 넘어서 책임과 신념의 범주에 있고 투표가 민주 시민으로서의 덕을 상기시키고 길러주기 때문이다.

경제학자가 비합리적이라 치부하는 관습을 열어보면 이득으로 치환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관습의 결과만을 얻기 위해 시장의 방법을 적용하면 관습이 내포하는 긍정적 효과가 제거된다. 가치를 최대화하는 재화의 선택지는 다양하고 시간과 장소와 목적에 맞게 사려 깊게 선택해야 한다. 돈은 숫자로 쉽게 환원 가능한 경제학적 효용만을 최대화할 뿐이다. 비합리적인 관습이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나 모든 관습과 규범이 이성의 대척점에 있는 건 아니다.

6

돈이 적절한 방법으로 사용되면 좋은 결과를 만든다. 시장 경제로 얻은 인류의 번영은 말할 필요도 없고 덕을 상기시키는 수단으로 돈이 잘 동작하는 예시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드라마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서 주인공이 약속 시간에 늦자 홀러 판사는 여러 자선 단체의 계좌번호가 적힌 종이를 보여주며 양심에 따라 기부하라고 한다. 효과적인 꾸짖음이다. 단순한 사과로 잘못을 넘기지 못하게 했으며 자신의 권위도 세우는 한편 사회에 좋은 일도 했다.

공리주의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에 걸렸을 때 심하게 아프거나 죽을 가능성이 큰 사람과 직업상 더 위험한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먼저 백신을 맞게 한 선택의 기반은 공리주의다. 이 방식을 택했을 때 백신 하나하나가 잠재적 고통과 불행을 최대한 완화하므로 각 백신의 '선'을 극대화할 수 있음은 분명하다.

허나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를 숙고 없이 '돈'과 '이득'을 적용하려 한다면 그 결과는 좋지 않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예시는 그중 일부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샌델은 재화의 속성을 깊이 파악해 경제학적 방법을 적용해도 될지 않을지 토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옳은 말이다.

이 책은 평소 내가 아들을 훈육하는 방식을 돌아보게 했다. 아들이 "8만원 내고 신호 위반하면 안되?" 라고 물었을 때 "8만원은 비싼 돈이야!" 라고 답하는데 그쳤다. 이제 '벌금' 과 '요금' 의 개념을 알려 줄 수 있다. 의도적으로 신호를 위반하면 우린 8만원과 함께 '덕'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며 그 행동은 조금씩 우리 마음에 남게 되고 그 행동을 한 자신은 더 이상 과거의 자신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 줄 수 있다.

나와 자식이 자신과 타인의 삶과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대해 바른 태도를 가지길 바란다. 이 바람을 실현하려면 이득을 따져 행동의 좋고 나쁨을 구별하는 능력 뿐만 아니라 도덕적 가치 판단을 통해 행동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감수성도 길러야 한다.

내가 잊고 있었던 이 당연한 사실을 알려 준, 오랜만에 글을 쓰고 싶게 만들어 준 샌델에게 깊은 감사를 보낸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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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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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와 타나토노트는 고전으로 불릴 수 있는 명작이다. 그는 참신했고 치밀했다. 베르나르식 소설이 가지고 있는 참신함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난 더 이상 그의 글에서 예전의 치밀함과 성실함을 찾을 수 없다. 제3인류는 베르나르란 왕국이 퇴색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충 떠올려봐도 비판할 거리가 참 많다.

  1. 무리한 설정, 그것을 애써 설명하려 하지만 실패함.
  2. 무리한 설정에 의해 탄생된 '멍청하고 전혀 매력이 없는' 주인공들
  3.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의 행동들
  4. 헐리우드적 클리쉐들(뜬금없는 추격신, 스트립 댄스, 적절한 타이밍의 사건들, 서양인이 세계를 구한다!)
  5. 개연성 없음, 반복되는 우연들(소설가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우연을 다루는 솜씨이다.)
  6. 뜬금없는 한국 찬양.
  7. 등등등...

위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글을 쓰는 것은 내 필력으론 무리이다. 때문에 1과 2에 집중해 제3인류에 대해 비판해본다.


베르나르가 진화를 들고 왔다.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 빠진 고리를 찾았던 그는 제3인류에선 인간 이후의 인류와 인간 이전의 인류를 창조했다. 생물의 크기가 그것의 생존력에 영향을 줄 것이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그는 거인, 인간, 초소형 인간으로 이어지는 '인류 라인업'을 제시한다. 이것이 제3인류의 기본 설정이다. 설정을 비판할 수는 없다.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가 이 설정에 ‘그럴듯함’을 부여하기 위해 여느 때처럼 과학이란 방법론을 가져왔고, 그것이 실패했다는 것에 있다.


설정은 설정일 뿐이다. 설정은 소설가가 마련한 장치며, 소설 속 작은 세계다. 때문에 작가는 기독교의 신처럼 "설정이 있으라"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이것에 과학이란 이름을 붙이고 설정에 대해 근거를 제시하려고 한다면, 대충하면 안된다. 철저해야 한다. 그것이 베르나르급 작가라면, 초판으로 20쇄를 찍는 작가라면, 더욱 철저해야 한다.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인간 이전의 인류, '거인' 설정을 보자. 주인공의 아버지는 남극을 탐험하다 거인 화석과 거인이 그린 벽화를 발견한다. 화석과 벽화를 본 아버지는 이전에 거인이 지구를 지배했다고 믿게 된다. 베르나르는 독자가 주인공 아버지의 입장에서 거인 화석과 벽화를 보게 함으로써 독자가 이 설정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전 지구를 지배했다는 거인들의 화석이 왜 오직 이 남극에만 존재하는거지?"


질문이 생겼던 것이다. 거인의 화석이 왜 남극에서만 발견될까? 라는 질문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질문이고, 예측 가능한 쉬운 질문이다. 그러나 그곳의 그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고고학자인 그들은 과학적 근거로 벽화의 내용에 설득력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신화들과 미스터리들을 꺼낸다. 그 누구도 질문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 질문 하지 않을까? 우린 답을 알고 있다. 베르나르가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베르나르의 대답이 신화와 미스테리말곤 없기 때문이다. 베르나르가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설정을 했기에, 주요 인물의 질문하는 입을 막은 것이다. 그것 때문에 주요 인물들이 멍청해져버렸다. 독자는 그들에게서 학자의 매서운 눈빛을 느낄 수 없다. (그 학자는 벽화 근처에서 다이너마이트도 주저 없이 터트린다.)


주인공 다비드를 잠시 살펴보자. 1권 162페이지를 보면 피그미족이 인류의 미래라고 주장하는 다비드와 그것에 반대하는 콩고 가이드의 대화를 볼 수 있다. 잠깐 보자.

  • 내가 보기에 피그미들은 미래의 인류를 대표하고 있어요

  • 피그미들이 미래의 인류를 대표한다고요? (중략) 당신은 모든 것을 뒤집어서 생각하고 있어요, 세상을 거꾸로 이해하고 있단 말입니다. (중략) 스마트폰이 없어요! 성도 없고 그저 이름만 있죠. (중략) 그들은 말귀를 도통 못 알아듣죠. (중략) 그들은 거울을 보면 환장을 해요. 거울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는 자들이죠. (중략) 그들은 거울 단계를 넘지 못한 아이들일 뿐이라고요!

  • 그렇다면 미래는 아이들의 것일지도 모르죠

  • 피그미 사회는 여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요. 수효도 여자가 더 많아요. (중략) 유아들은 사망률이 높아요. 피그미들의 수명은 아주 짧아서 40세를 넘기는 경우가 드물죠. 정말이지 진화했다고 말할 수가 없는 인간들이라고요. 하물며 미래의 인류라니, 그건 말도 안 돼요! (중략) 커지는 것이 미래에요. 모든 전문가들이 그 점에 동의하고 있어요

  • 자연은 때때로 전문가들의 허를 찌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 모두의 견해가 일치하는 경우에도 말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틀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해서 그들이 옳은 것은 아니다> 라고 했죠.

  • 아무튼 이러고저러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미래의 인간은 당연히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아름답고 더 건강할 겁니다. 그건 분명해요!

  • 피그미들이 이곳의 풍토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들이 에이즈에도 저항력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어요. 그러지 않은가요?

  • 이미 대답했는데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군요. 그들은 병원에 가지 않고 죽기 때문에 무슨 병을 앓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요.

이것은 기묘한 대화이다. 피그미들을 욕하는 가이들의 말도 신뢰가지 않지만, 다비드의 말버릇은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가이드는 그나마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며 자신의 의견을 다비드에게 피력하고 있다. 그런데 다비드는 어떤가? 그는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단순히 이렇게 말한다. "미래는 아이들의 것일지도 모르죠", "틀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해서 그들이 옳은 것은 아니죠". 다비드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타인을 설득시키려면 저런 '잠언'을 내뱉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의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상대방의 말은 귓등으로 들어야 한다. 저렇게 '정신승리'를 외치는 주인공에게서 난 어떤 매력도 느낄 수 없다.


1권 353페이지를 보면 오로르를 초소형인간(제3인류) 창조 프로젝트에 끌어들이기 위해 다비드가 오로르를 설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매우 참혹한 대화다.

  • 오비츠 대령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은 어떤 반동 세력에게도 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 내자는 거에요. 

  • 더 작은 인류, 그리고 더 여성적인 인류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죠? 

  • 오비츠 대령은 그들이 훌륭한 전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키가 아주 작고 저항력이 강해서 정상적인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침투해서 작전을 벌일 수 있는 특수 요원들 말이에요.(중략) 

- 그들이 미니 첩보원들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다 한들, 그래서 얻을 게 뭐가 있죠?

  • 그 프로젝트는 이란과 연결되어 있어요. 자파르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거에요. 우리가 첩보원들을 보내 그들의 군사 시설을 파괴할 수 있다면 늙은 수염쟁이들의 독재에 맞서 투쟁하는 민주적인 대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거에요. 

  • 난 이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요. (중략) 문제가 되는 것은 핵무기나 이란이 아니라 인구 과잉이라구요. 

  • 당신이 그렇게 냉소적으로 나오다니, 뜻밖이군요. 

  • 이건 냉소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에요. (중략) 아무튼 그들이 죽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에요. 

  • 지금은 그렇게 말해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당신이 이성의 편에 서도록 만들 거예요.

이토록 생각없는 인물간의 대화를 보는 것 만으로 가슴이 아픈데, 그 인물들이 선한 역할을 담당하는 주인공이라는 것이 더욱 슬프다. 게다가 다비드는 대화 말미에 "당신이 이성의 편에 서도록 만들거에요"라며 또다시 정신승리를 시전하고 있다. 신념은 굳건한데,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진 머리가 다비드에겐 없다. 오직 믿음과 신념으로만 똘똘 뭉쳐진 주인공인 것이다.


그런데 이 대화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베르나르는 자신이 만든 주인공 다비드가 하늘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자, 다비드가 가진 신념이란 굉장히 무서운 신념이다. 그가 오로르에게 제안하는 것은 유전공학을 이용해 초소형 인간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초소형 인간을 첩보원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끔찍한 생각이다. 인류를 걱정하는 주인공이라면 이것이 생명윤리에 어긋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제3인류가 이후에 어떤 상황을 만들것인지 조금이라도 생각해야 한다.(전생에 그가 만든 인간이 거인을 멸종시켰는데, 어떻게 그와 비슷한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다비드는 이런 생각을 깊게 하지 않는다.


더욱 무서운 것은 다비드가 그녀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다비드는 이란이란 거대 악을 막아야 한다며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달라고 그녀를 설득한다. 이거, 위험하다. 거대 악을 설정하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남을 설득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찾을 수 없을 때나 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우리가 욕하는 정치인들이나 사용하는 방식이다. 베르나르는 이런 인물을 선한 주인공의 자리에 놓는 것은 피했어야 했다.(악역으론 어울린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초소형 인간을 만들고, 그들을 첩보원으로 만들고, 그들을 이란 사태의 현장에 투입하려면 대략 20년은 걸릴 것이다. 이것은 너무 늦다. 너무도 늦다. 윤리적 문제를 떠나서 실용적으로 살펴도 고개를 젓게 하는 방안이다. (물론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들은 초소형 인간을 만드는데 성공하고, 다행히 그들의 발달 속도가 인간보다 10배정도 빨라 몇년 안에 초소형 인간을 이란에 투입하지만, 다비드가 오로르를 설득하는 시점에서 다비드와 오로르는 초소형 인간의 발달 속도가 인간보다 10배 빠른지 알 수 없었다 -오! 만들고 보니 발달 속도가 10배 빠르네? 만세! - )


그렇다면 우리들의 똑똑한 주인공들이라면 질문해야 한다. 하지만 오로르는, 다비드는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을 할 수도 없다. 왜냐? 베르나르가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는 자신이 수습할 수 없는 설정을 가져왔고, 그냥 가져만 놓는 것이 아니라 무리하게 그것을 이야기 속에 녹이려 했다.


질문하지 않는 인물들, 생각하지 않는 인물들, 자신만의 신념만이 가득한 인물에게서 난 전혀 매력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의 비정상적 결정을 옹호할 수단을


"이것은 운명이에요, 징후에요!"


라는 말로만 베르나르가 대신한다면, 맙소사, 왕국이 무너지고 있다.


베르나르는 인류를 걱정하기 전에 갈수록 지능이 퇴화되는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해 더 많이 걱정해야 한다. 베르나르는 그들에게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고, 질문하는 능력을 고양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일단 본인의 지능을 진화시켜야 한다. 이제 인류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시라. 지구의 멸망보다 당신의 소설이 더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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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장소에서 언더그라운드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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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컬트 종교(이후 컬트)는 아픈 현실을 먹고 자라기에 현실이 어두울 수록 컬트는 확장된다. 어두운 현실에 대한 자각은 저세계, 유토피아에 대한 바람으로 이어진다. 이 경우 컬트에게 세계의 종말은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종말이란 유토피아의 도래이며 세계의 모순을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쉬운 해결책 -리셋 버튼- 이다.


1995년 3월 일본에 지하철 테러가 일어났다. 몇명이 지하철에 사린 가스를 뿌린 것이다. 조사 결과 범인들은 옴진리교에 소속된 사람들로 밝혀 졌고, 옴진리교란 컬트 종교가 일본을 넘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사린 가스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 한다. 그것들을 묶은 것이 바로 언더 그라운드다. 하루키는 그것에 멈추지 않고 사린 가스 살포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옴진리교 교인들의 인터뷰들을 묶어 책으로 냈는데, 그것이 언더 그라운드 2편 약속된 장소에서다.


언더 그라운드 1,2편을 읽어 봤다. 1편은 마지막까지 읽지 못했다. 피해자들의 삶에 그 사건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사건 후에 그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읽는 것은 날 몹시 아프게 만들었다. 피해자의 마음에 다가가 공감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허나 2편 -약속된 장소에서- 는 달랐다. 이건... 재미있었다. 비극적인 실제 사건에서 재미를 느낀다는 것이 그들에게 미안하긴 했으나 분명 재미있었다. 그리고 하루키의 인터뷰에 응답한 그들은 무언가로 보편화될 수 있는, 시사점이 있는 특징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는 선한 동기를 마음에 아로새긴 선한 사람이었다. 그들 모두는 현 세계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평범한 이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가 아닌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세계는 무엇인가? 이 세계의 모순은 무엇 때문인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이러한 특성은 철학자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컬트 종교에 귀의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8명의 이들은 후자였다. 그들은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리지 않고 지도자가 내린 해답, 자신의 삶에 첫번째로 주어진 그 해답을 철저히 믿었다. 그들은 해답에 반하는 관찰들이 사린 가스 사건 전에 이미 나타났음에도 해답을 수정하거나 폐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세계는 해답을 아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로 구분되어진 이분법의 닫힌 세계가 되어 버렸으며 그 세계 외의 것들은 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허나, 그들을 비웃을 수 있을까? 저것은 많은 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아니던가? 그들은 어쩌면 운이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다 선택한 첫번째 종교가 하필이면 옴진리교였던 것이다. 하필이면 첫번째 믿음의 지도자가 사이코였던 것이다. 한편, 그들은 운이 좋은 사람일수도 있다. 왜냐면 자신이 믿고 있는 것과 반대되는 외면할 수 없는 증거-사린가스 사건-가 그들 눈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증거를 마주하고 옴진리교에서 빠져 나온 사람이 있다. 그 이후 옴진리교에서의 생활을 쓰고, 그 위험성을 책으로 남긴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몇명은 아사하라가 그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몇명은 자신이 잠시 맛보았던 그 유토피아의 세계에 영원히 머물고 싶어 했다.


한편 8명 모두는 가족을 등지고 출가해 옴진리교 공동체 안에서 생활했던 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 만난 그 공동체 안에서는 어떠한 기쁨과 행복이 분명히 있었다고. 그들은 사그라진 아름다움이 못내 아쉽다.


하루키의 결론 처럼 현실에 발을 딛지 않은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결국 실패로 끝날지도 모르겠다. 우린 위를 바라 보지만 땅을 딛고 서있을 수밖에 없다. 이 땅의 모순이란 숙명이기에 벗어 던질 수 없다. 리셋 시킬 수 없다. 우린 그것을 안고 살아가야 하며 삶 가운데 모순의 아주 일부분만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

책을 다 읽은 지금, 이 명백한 사실에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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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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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는 말은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선언이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본질이 존재에 우선한다. 망치를 예로 들어보자.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한 도구로서 생겨났다. 이때 망치라는 존재는 '못을 박기 위한 도구' 라는 본질 또는 목적 이후에 오는 것이다. 때문에 망치의 경우 본질이 존재에 앞선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도구는 본질이 존재에 앞선다 할 수 있다. 그 도구들에는 본질이 있으며, 본질에 어긋나는 도구의 쓰임은 비극을 발생시킨다.


우린 태어나 인간답게 살아라, ~ 해야만 한다. 넌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등등의 말을 종종 들었다. 이런 모든 잠언들은 인간의 존재 이전의 본질을 전제하고 있는 잠언들이다. 이것은 목표와 표적이 정해진 삶이다. 이 경우 개개인 인간의 삶은 인간의 본질로 규정되어진 것을 재현하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실존주의는 이것에 반기를 든다. 그래서 (인간의)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고 말한 것이다.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고 했을때, 인간은 이미 주어진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즉, 이경우 인간은 인간의 본질을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이것은 표적이 정해지지 않은 삶,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삶이다.


실존주의는 스스로의 본질을 스스로 규정하고 재현이 아닌 창조의 삶을 사는 개인을 주체라 명명한다. 실존주의 이전의 윤리학이나 종교가 인간에게 요구했던 것이 '성인'이라면 실존주의는 인간에게 주체로 서라고 명한다.


실존주의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허용 한다. 이것은 개인에게 도덕을 창조할 수 있는 권리를 준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과연 무한대의 자유이다. 그리고 실존주의 아래 사는 한 개인은 이 무한대의 자유와 함께 무한대의 책임감을 느낀다. 스스로의 행동은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선택으로 온 것이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주의는 윤리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윤리학적 특징이란 것이 '~을 금하는 것'에 대한 논의라 했을때 실존주의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 실존주의는 ~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존주의는 윤리학으로 동작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실존주의에 근거를 둔 윤리학이 가능하기는 할까? 어떤 사람이 살인을 했다 했을때 실존주의 아래에서 우린 그를 법으로 심판할 수는 있겠으나 그를 도덕적으로 욕할 수는 없다. 왜냐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자유 속에서 살인자는 다른 이를 살인하는 자유를 선택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진다고 했을때 실존주의자는 그를 도덕적으로 욕할 수 없을 것이다.


샤르트르는 이에 대한 응답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의 응답이 과연 재미 있다. 샤르트르의 응답은 이러 하다.

우리의 책임은 어느 사람이 상상할지도 모르는 그런 것보다는 훨씬 중대한 것이다. 왜나면 그것은 전인류를 앙가제 하기 때문이다.
... 나는 나 자신과 모든 사람에 대해서 책임이 있으며, 내가 선택하는 어떤 인간의 개념을 창조한다. 인간은 자신을 결정할 뿐 아니라 전 인류를 선택하는 입법자가 된다.

샤르트르는 무한한 자유를 허용하며, 그것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질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난 이렇게 선택의 결과로서 동반되는 책임의 무게감을 상기시키는 이 방법이 앞선 문제를 해결하는 그럴듯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오늘날 발생하는 커다란 범죄는 윤리와 도덕의 결핍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과잉에서 오기 때문이며, 또한 책임 전가에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커다란 범죄의 기반은 어떤 신념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 신념은 스스로에서 온것이 아니라 외부의 명령 -종교, 또는 민족주의- 에서 온 것이다. 이런 범죄를 일으킨 범죄자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신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실존주의하에선 저렇게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난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사회가 올 수 있으리라 낙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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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 빨간책방에서 함께 읽고 나눈 이야기
이동진.김중혁 지음 / 예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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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이란 사람에 대해 안것은 오래 전이지만 그가 이렇게 훌륭한 인물인지 알게 된지는 오래 되지 않았다. Otvn의 비밀 독서단을 통해 만난 이동진이란 존재는 책읽기에 잠시 지쳐있던 내게 소중한 활력소가 되었다. 그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겸손했고, 달변이 아닌듯한 말투를 가지고 있었으나 매체를 통해 만난 그 누구보다 훌륭한 말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인간적인 매력에 더해 그의 책 해석 또한 매우 다채롭고 풍부했다.


이런 그를 더 만나보고 싶어 팟케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 중 내가 이미 읽었던 책을 다룬 에피소드를 모두 들어 보았다. 머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그리고 이 책,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을 샀다. 그리고 이 2차 창작물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이 책에 소개된 책들 중 읽어보지 않은 책을 모두 읽었다. 그 후에야 이 2차 창작물을 읽을 수 있었다.


책을 구입하기 잘했다. 팟케스트 속에서는 그들의 이야기 속도에 내 이해 속도를 동기화 시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책은 다르다. 내 독해 속도에 그들의 이야기 속도를 동기화 시킬 수 있다. 거기에 시간이란 여백을 가질 수 있기에 그들이 나누는 책을 직접 찾아보며 읽을 수도 있었다.


긴 시간을 두고 책을 모두 읽은 후 느낀 감상의 첫번째는 이 책의 진정한 가치가 이동진과 김중혁의 책 해석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동진과 김중혁의 책 해석은 인터넷의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만한 해석이다. 요즘은 수 많은 서평 책이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책 해석'이란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동진과 김중혁의 해석이 다른 서평보다 우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 뚜렷한 근거는 찾기 힘들다. 이 책의 진짜 가치는 이동진과 김중혁의 책 해석에 있지 않다.


그 수많은 서평보다 이 책이 구별되는 까닭은 이 책이 한명이 아닌 두명의 대화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어떻게 대화하는지, 어떻게 나누는지, 어떻게 상대의 의견을 긍정하고 때로는 부정하는지, 그리고 그 동안 어떻게 그들이 책 뿐 아니라 서로를 더욱 깊이 발견하고 있는지. 이것들이 책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하나의 책을 읽고 서로 나누는 과정의 이상은 이것이 아닐까? 사담으로 흘러가지 않고 책이 마련한 길을 끝까지 따라가면서 나와 다른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보지 못한 내용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이해를 더욱 풍요롭게 하며, 나아가 마침내 나와 얘기를 나누는 상대를 더 깊이 발견하는 것. 거기에 우리는 간절히 가닿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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