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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옷을 입으렴
이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겨울의 끝일까, 봄의 시작일까.. 알수없는 짓누름이 꽤 오랫동안 나의 심장을 조이듯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 짓누름은 나의 달콤한 밤 잠을 빼앗아 갔고, 미소를 훔쳐 갔으며,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샘을 한없이 풍요롭게 만들었어요. 어두컴컴한 암흑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 쯔음, 이도우님의 소설을 집어 들었습니다. 성장소설. 딱히 와닿지 않음에, 타인의 성장기를 무료하고 무표정히 무감정스럽게 읽어 내려가지 않을까, 감흥 없이, 내게 와닿지 않음에, 실망하지 않을까, 책을 집어들고 표지를 한참을 바라보며 잠시 잡념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無'스러움으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소설은, 참 많은 혼란과 깊이 숨겨두었던 나의 추억을 몽글몽글 띄워 올려줍니다.
같은 나이, 같은 학교, 하지만 다른 성격, 다른 현실의 수안 과 둘녕, 외가집에 객식구처럼 맡겨져 자란 둘녕은 늘 마음 한구석에 '불편함'과 '미안함'이 자리잡고 있었겠지요, 그에비해 수안은 녹록치는 않은 가정이지만, 두 부모와 동생이란 포근한, 어쩌면 둘녕에 비해, 둘녕이 가지지 못한 것을 '소유'함에 있어, 둘녕의 마음 깊이 자리한 , 공허함과 외로움을 몰랐을지도요. 늘 자신보다, 수안이를 생각하고, 위로해주며, 심장의 한부분처럼 그녀에게 헌신적인 둘녕이, 그러나 수안이는 알수없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 소녀 같았습니다. 오롯이 둘녕이만이 자신을 이해하는 유일한 친구라 생각했으니, 그 아이에게 모든걸 , 기댈수 밖에 없었고요.
사랑하는 고둘녕.
네가 스웨터를 짜고 있을 땐,
나는 곁에서 같이 아늑해져.
넌 털실을 짜고
난 시간을 허비하지.
넌 물레를 돌릴 테고
난 딸기잼을 휘젓겠지.
축복할께, 내 사촌
언제나 마법 같은 손길 지니기를.
수안.
- 380 쪽
현실과, 과거, 그리고 추억의 반복되는 시간속에서, 저는 둘녕이의 시선과 생각,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함께 수없이 반복하고, 따라 읽으며, 가슴 한켠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과, 슬픔이 느껴져요. 두 소녀는 사촌지간 이면서도 그 두사람의 지독한 우정을 이야기 하는 이 소설에는, 두 소녀를 수많은 거미줄처럼 엉켜있는 또다른 주변인물들의 소소한 삶이 녹아있습니다. 둘녕이는 끊임없이 수안이를 이해하려 했지만 어쩌면 결국 성인이 되어서도 그녀(수안)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하고 자책함으로 마음 속 깊이 트라우마가 생겼던 것이 아닐지..
둘녕이의 시선에서 시작되고 끝이 나는 , 그러니까 현실과 과거가 반복되는 이야기에는 , 소소한 추억을 떠올려주는 소품들과 배경들이 등장을 하기도 합니다. 저에게도 꽤 쏠쏠하게 사용되었던 '알보칠' , 그리고 안티푸라민, 종이인형, 간장 계란밥 등, 옹기종기 아이들과 함께 했던 놀이들과, 날계란에 간장과 마아가린을 넣어 슥슥 비벼 먹었던, 철없던, 그 시절도 기억이 나고요, 직접 만든 종이 인형에, 여러가지 옷을 그려서 오리고 입혀주며, 아기자기한 놀이도 좋아했던, 까마득한 추억들이 몽글몽글 하게 피어 납니다.
하지만 , 이 소설 이야기는, 마냥 소소하고 달콤하며, 옛 추억을 아삭아삭 베어 무는 짜릿함만을 주지는 않습니다. 둘녕이와 수안이의 주변을 돌아보면, 꽤나 가슴 아린, 그리고 아픈, 시큰한 울컥함의 상처를 깊숙히 안고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도 짙은 잔향처럼 주위를 맴돌고 있으니까요, 각자의 깊게 베여있는 상처와, 마음과는 다르게 전해져 버린 오해와 상처, 그리고 미안함. 분명 이 많은 이야기들을 텍스트로 전해주고 있음에도, 그 모든 텍스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담겨 있을뿐, 결국 내뱉어 표현하지 못함에 내면의 텍스트로 남아 버린 것이였을테지요,
하지만 그 순간 조용히, 이상하리만치 평온하게 잦아들던 내 마음이 지금도 느껴진다. 공기는 잔잔히 흐르고 소년은 그대로 내게 눈부셨다. 비로소 나는 소년이 지난날 내 첫사랑이었음을 깨달았다.(381쪽)
그 시절 그 아이는, 어쩌면 세상에 없는 언어로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가는 꼭꼭 숨어있는 말들을 찾아 배우고 싶었나 봅니다. 늘 쓰던 흔한 언어로는 말이 되어 나오지 않을 때 , 이미 죽은 언어라는 사어(死語)를 배우고 싶은 마음일 때, 살다보면 나도 그런 마음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 어떤 언어로도 내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말입니다. 하지만 말도 글도 쉽게 만들거나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럴 때면 나는 그냥 침묵합니다. (110쪽)
꽤나, 아프게 여운이 많이 남는 성장소설 <잠옷을 입으렴> . 책을 덮은후, 알수없는 시큰한 울림이,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제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나는, 그 시절, 그 시간, 그 기억 속에서 ,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주었고, 누군가에게서 첫사랑의 아련함을 느꼈고, 또한 가족에게는 무심코 가시와 같은 날카로운 말의 내뱉음으로써, 나도 모르게 , 아픔을 주었던건 아닐까, 하고 .. 지난 오래된 기억과 추억들을 곱씹고, 또 곱씹어 봅니다. 오묘한 텍스트의 표현과 , 오묘한 느낌의 스토리 , 오즈의 마법 속, 오즈의 나라에 스며 들어온 듯, 꽤나 깊이 빨려들어 읽어 내려간 이도우님 소설은 정말 , 참 텍스트의 표현과 느낌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