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 어린이 경제동화 1
보도 섀퍼 지음, 김준광 옮김, 신지원 그림 / 을파소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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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돈 쓰는 방법을 가르친다?
 

어릴 적 명절날 어른들로부터 받은 돈은 여지없이 엄마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필요할 때 준다느니, 애들은 아직 큰돈을 만지면 안 된다느니, 니가 쓸 데가 뭐가 있냐느니 하면서 돈을 가로채간다. 이러한 부모들의 돈에 대한 생각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로 물려진다.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를 편집한 이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이 책의 일차 타겟은 아이들이 아니라 아빠들이었다. 적절한 타겟 선정이었다. 몰론 아이들이 읽을 책이라고 해서 아이들이 구매 독자인 것은 아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함직한 내용이지만 실은 먼저 어른들이 봐야 할 내용이다. 어른들이 돈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아이들이 아무리 이 책을 읽는다 해도 자기 돈을 잘 관리하기는 힘들 것이다. 우선 뺐어가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두번째 타겟은 엄마였다. 이렇듯 어른들을 주소비층으로 놓고 마케팅을 한 것은 결국 아이들이 이 책을 집어들지는 않을 것이며,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부모와 아이들 대다수가 돈에 대해서 쫓지 말아야 할 것, 혹은 어릴 때는 신경 쓰지 말아야 할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서 비롯되는 양반 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물질적인 것에 대한 배타성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돈이란 아이건 어른이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통의 장치이다. 그러므로 돈을 어떻게 써야 하고, 또 돈은 어떻게 벌어야 하고,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잘 깨우쳐야 한다. 그래야 돈과 직업에 대한 그릇된 사고를 덜 가지게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경제적인 관념을 주려고 한 이 책의 시도는 적절하며, 하나의 시도가 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의, 혹은 나의 정서와 여전히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돈을 어떻게 버느냐하는 문제에 대한 설명이다. 돈이란 무엇인가. 돈, 즉 화폐란 어떤 무형, 유형의 어떤 재화의 가치를 사회적인 약속에 의해 제도화해놓은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며, 전시대를 통해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은 존재해왔다. 임금노동자에게 돈이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받은 대가이다. 돈을 버는 방법 역시 노동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 시대의 돈벌기를 가르친다. 즉 돈이 돈을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물론 노동을 통한 돈벌기도 보여주고 있지만, 그 또한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지 노동을 통한 돈벌기는 아니다. 무엇보다 주식에 투자하는 방법을 가장 효과적인 돈벌기라고 말하고 있다. 주식 투자의 방법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려다보니 껍데기만 보여줄 수밖에 없어 오히려 비현실적인 방법이 되고 말았다.

  경제적인 사고를 어릴 때부터 길러주어야 한다는 ‘을파소’의 편집 방향에 필요성을 동감하며 앞으로 나올 이러한 책들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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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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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할 수 있었나
 

사랑의 정열은 상대방이 사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인지 묻지 않고,
또 어떤 핑계나 도피도 용납하지 않는다.
일단 시작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끝을 맺으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거역할 수 없는 존재의 명령, ‘세상과 오성의 법칙보다 강한 명령’이다.

헝가리 작가, 우리에겐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20세기 유럽 문단의 귀중한 발견이라고 칭송되는 산도르 마라이의 작품이다. 이에 앞서 『열정』이 출간되어 있다. 『유언』은 『열정』에 앞서 쓰여진 작품으로, 인간 본성에 관한 깊은 통찰과 성찰을 바탕으로 하여 심도 깊은 고민을 제시하고 있다. 『열정』에 비해 『유언』은 끝까지 읽는데 다소 인내심이 필요하다.

난 이제껏 누군가를 좇아다녀본 적이 없다. 누가 좋다고 치근덕거려본 적도 없다. 그러나 최근에 딱 한 번 있다. 아마도 내게 삶을 즐기는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아무리 여유를 가질 수 있다고 해도,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에 대해서까지 즐거운 기분이 들리는 만무하다.

처음이야 삶의 여유이고, 또한 내 감정을 이제는 솔직히 드러내보자고 결심한 저의가 있었지만 두번째까지야 여유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은 바로 직업상 이 책 [유언]을 몇 번이고 되읽으면서 새로운 고민을 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제사글로도 쓴 바로 '세상과 오성의 법칙보다 강한 명령' 때문이다. 이것은 이성과는 아주 대별되는 그 무엇이 아닐까. 열정, 감정 등등의 이리저리 재서 행동하는 그 무엇과는 확연히 다른 무엇이 아닐까.

그랬다. 나는 여전히 남아 있는 내 감정의 찌꺼기를 말끔히 소진해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내 생활이 더 이상 이러 저리 휘둘리는 걸 원치 않았는지 모른다. 결국은 ‘일단 시작했으면 끝을 보아야만 한다’는 명제에 충실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남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내 감정에 충실했고, 또한 진실했으므로 나는 내 할 일을 다한 것이나 다름없다.

‘내 감정에 충실한 것이 가장 진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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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 - 레이 황의 중국사 평설
레이 황 지음, 권중달 옮김 / 푸른역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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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중국 역사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E. H. 카가 한 너무나도 유명한 말이다. 대학교에 들어와 청년사에서 나온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이 말에 밑줄을 그었다. 스스로 깨달았다기보다는 다른 이들이 중요하다고 했으므로. 새삼스러울 게 없는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만큼 너무나도 중요한 말이기도 하다. 역사를 공부하려는 이들은 자연스레 가지는 생각이 아닐까. 하지만 역사를 그저 대하드라마의 재료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어느 학문이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역사는 특히나 서산의 마애불처럼 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과거의 한 지점을 바라보는 지금의 시대, 처지, 종교, 생각 등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사관이 필요하고 역사의 진실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닐까. 또한 저자가 말했듯 당시대의 역사가들은 그들의 도덕적 잣대로 사건을 결론짓고, 호칭하고 평가하지만 오늘날의 잣대로 보면 오히려 상반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저자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강조하는 거시적 관점은 사관이라고 볼 수는 없겠다. 이는 단지 방법론이다. 이를테면 멀리서 보느냐 가까이서 보느냐에 따라 그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보이던 것이 숨는 일은 있겠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잣대가 될 수는 없으리라. 레이 황 역시 거시적 관점으로 중국 역사의 각 단면을 보았지만, 해석하는 잣대는 경제적인 발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중국이 자본주의로의 진입이 더디어진 이유로부터 출발하여 고대에서 원나라까지를 살펴본 것이다. 중국 역대 왕조들의 가장 큰 허점을 큰 중국 대륙을 지배하는 방식의 문제였다. 드넓은 중국 대륙을 지방분권이 아니라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 관료체제로 통치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이 요지다. 또한 수치를 기본으로 하는 기구화, 제도화로써가 아닌 황제의 도덕이 선정이 표준이 된 것도 문제였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여 아래로 진리나 제도, 원칙 따위를 일방적으로 내리다 보니 경제 제도마저 현실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이는 각 왕조가 몰락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고, 더 나아가 중국 경제가 뒤쳐지게 된 숨은 이유였다. 저자는 오늘날 가장 중요한 작업은 재정과 조세수입을 상업화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한편, 멀리서, 혹은 나중에 보면 상처가 보이지 않는 수도 있으니, 거시적 관점으로 본 위진남북조와 당의 말기가 그랬다. 기존의 좁은 시각에서 보면 위진남북조 시기는 그저 아래위로 갈라진 혼란의 시기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지고, 북방민족이 한화되고, 불교를 통한 상아의 융합이 가능해진 시기다. 수나라로 재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시기다. 마찬가지로 당이 몰락한 이유가 현종의 실정과 안사의 난이 아니라 변화한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 체제에 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이러한 관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만일 자동차가 몇 번 교통사고를 낸 다음이 아니라면, 도로가 어떻게 계획되어야 하고, 또 신호등은 어떻게 설치되어야 할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얼핏 함석헌의 ‘고난의 역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저자가 말하는 자신의 서술태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네 가지로 정리해서 밝히고 있다. 첫째,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에서 논의를 이끌어낸다. 둘째, 일개인이나 특정 사건에 역사적인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셋째, 사건이 일어난 전후시대와 그 사건을 둘러싼 동서남북의 사회, 지리, 문화까지 두루 살핀다. 넷째, 거시사관은 국제성을 띠고 있다. 물론, 셋째나 넷째 요건을 이 책에만 두고 본다면 부족한 감이 있다. 첫째는 학술적인 글쓰기와 대중적인 글쓰기의 다른 점을 경쾌하게 말한 것이 아닐까. 두 가지의 글쓰기가 모두 같은 알맹이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알맹이에 다가가는 방식과 경로의 차이가 글쓰기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연구 자체에 의미를 두는 역사학 연구에 대해서도 경계를 표시한다. “역사연구가 자칫 희석화된 지식의 양산이나 개인적 취향이나 주관을 만족시키는 수준에 그친다면, 그것은 이미 학문으로서의 생명력을 잃은 것이다.”

맨 앞의 명제를 다시 한 번 떠올리자.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각장마다 있는 옮긴이의 요약글이 친절하고, 소단락의 제목이 좋다. 체제와 편집 또한 깔끔하고 안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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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 푸른역사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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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를 누가 죽였을까
 

상황 재연의 지매가 크다. 재미라... 조선후기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죽은 한 나라 왕자의 이야기를 재미라고 할 수 있을까. 처가의 당론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죽음을 외면한 뿐만 아니라 살기 위해 《한중록》을 써서 사실을 왜곡까지 해야 했던 혜경궁 홍씨의 이야기를 그저 재미라고만 할 수 있을까.

조선은 대체로 신권이 강했으며, 왕권과 신권이 강하고 약함을 번갈아 해왔다. 조선후기 붕당정치로 대표되는 신권의 강력함은 ‘택군’을 넘어서 자신의 군주를 세울 수도 있게 되었다. 그것은 왕정도 아니고, 공화정도 아니다. 다만 다수가 행하는 독재였다. 신권의 비정상적인 강대함은 결국 한 가문의 세도로 치닫게 되었다. 영정조시대에 탕평책을 폈다 하나 이는 역설적으로 오죽 심했으면 왕이 신하들 사이를 화해시키려 했겠는가 말이다.

영조의 탕평책은 그 자신이 지닌 약점으로 인해 쉽게 성공할 수 없었고, 급기야는 아들을 고립시키게 만들었다. 결국 사도세자를 죽게 한 것은 비정상적으로 강대해진 당론싸움과 자식마저 희생해야 했던 권력이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탕평책도 실패하고 말았다. 사도세자의 고립과 탕평책의 실패는 다음 국왕이었던 정조에게 고스란히 넘겨졌다.  

읽는 재미는 크다. 맨 앞에 말한 상황 재연의 재미가 있다. 역사적 사실을 조목조목 설명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허구적 요소를 섞어놓아 오히려 흥미를 유발한다. 이러한 허구적 상상력도 역사를 연구하는 이에게는 필요하며, 대중적인 역사서를 쓸 때에는 당연히 필요하다. 읽는 이로 하여금 궁금증을 갖게 하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있다. 꼴이나 편집에 좀더 멋을 부려봄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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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사회와 그 적들 - 김소진 첫번째 소설집
김소진 지음 / 솔출판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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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거이 바로 사람이야"
 

처음으로 읽은 김소진의 소설집이다. 낯선 우리말을 많이 써서 텍스트로 삼은 적이 있다던 어느 국문학도의 짧은 기억을 선입견으로 하고 펼쳤다. 역시나 낯선 말들이 쉼없이 튀어나왔고, 때문에 눈에 가시가 박히는 듯 거북스러운 면이 있었다. 몇 개의 문장을 읽고 나서야 각각의 문장들의 정확한 뜻은 모르고 대충 흐름을 알게 될 정도이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이런 말들을 일부러 찾아내어 쓸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그 낯선 말들은 대부분 동작이나 꼴을 묘사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다른 말로 대체가 가능할 것도 같지만 그렇게 해놓으면 천편일률이 될 터. 비슷한 뜻을 지녔지만 상황에 따라 약간씩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말의 묘미를 살리고, 그에 맞는 표현을 찾아주기 위해서는 일부러라도 낯선 말을 뒤질 필요가 있겠다. 발그레하다, 빨갛다, 붉다, 새빨갛다, 벌겋다 등등처럼 말이다.

대개 ‘나’를 화자로 하는 경우 ‘나’가 보는 외부에 대한 서술과 ‘나’가 생각하는 내부에 대한 서술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3인칭 시점에서도 있겠지만 특히나 1인칭 시점에서는 내부의 관념에 대한 서술이 많은 듯하다. 소설에서 말이다. 딱히 어떠해야 한다는 형식이 없는 게 소설이지만 이야깃거리 없이 주절주절 제 생각만 남의 입을 빌어 늘어놓는다면 무슨 재미일까. 차라리 수필로 엮는 편이 더 정직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이 한 권에서 실린 소설들은 관념적이거나 설명조가 아니어서 좋다. 작가의 다른 소설들에서는 어떤 형식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닥 재미있다고는 말 못하겠다.

“웬 쥐였나고? 글쎄 모르지. 그러다 보니 맹랑 헷것이 눈에 끼었는지두.” 김윤식 선생의 해설을 얻어다가 이해하자면 〈쥐잡기〉에 나온 아버지의 이 말이 당시 작가의 고민의 실마리가 아니었을까.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오히려 적은 최하층민들이 되고야 마는 딜레마가 열린 사회의 불편함이 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적들을 위한 것이 더 이상 이데올로기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 그리하여 또 다른 권력을 만드는 이데올로기야말로 남이냐 북이냐의 갈림길에 선 아버지에게는 헷것에 다름이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가 실상 모든 인간을 위할 수는 없다는 뼈아픈 결론. 과학조차도 해명하기 힘든. 그래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뇌까림. “기거이 바로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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