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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본 한국역사 -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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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하는 역사,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역사
 

이제 역사라는 것은 예전처럼 논문집 속에 갇힌 뜻 모를 한자어의 나열이 아니다. 의정부와 육조 체제 외우기는 더더욱 아니다. 역사책은 눈길을 끌 만큼 예쁘게 포장되고, 그 내용도 일반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큼 쉽게 표현되고 있다. 학계 내에서의 전문화와 대중화의 갈등은 비중 있는 담론이 되었고, 어느 것도 소흘히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는 듯하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이야 늘 긴장하면서 역사를 대할 것이다. 역사를 읽는 비전문적인 독자들도 긴장해보는 것이 어떨까. 특정한 시대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역사라는 것 자체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여기 《뜻으로 보는 한국 역사》에서 그 관심의 출발점을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내가 누구이며 장차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지나온 이력을 살펴봐야 한다. 이리저리 수천 갈래로 난 가지 사이로 굵은 줄기 하나가 보일 것이다. 그 줄기가 바로 오늘날의 나이며, 또한 내일의 나이다.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정체성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알고자 한다면 그 나라의 지나온 역사를 되새겨보아야 한다. 역시나 수만 갈래의 가지가 있을 것이고, 굵은 줄기가 있을 것이다. 그 줄기가, 곧 함석헌 선생이 말하는 ‘하나’이며, ‘뜻’일 것이다.  

역사에서의 ‘하나’ 찾기. 이는 곧 우리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이며, 또한 기나긴 시간 동안 있어온 인간의 활동 속에서 지금까지 이어져온 그 어떤 절대적인 것을 찾는 작업이다. 우리 민족의 형성과 그 지나온 길을 골똘히 살펴 민족적 자존심과 고유한 가치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더 넓게 본다면 이 ‘하나’는 지구의 역사가 어떠한 발전 과정을 거쳤으며, 인류에게 진정한 진보란 무엇인가를 구하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향해 몸을 내던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역사 속에서 ‘하나’를 찾기 위해서 먼저 역사를 바라보는 잣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사관이다. 함석헌 선생이 삼은 잣대는 바로 종교적 사관이었다. 기독교의 편에서 역사를 해석했기에 찾아낸 ‘하나’는 바로 ‘아가페’였다. 기독교적 사관에서 본 역사의 궁극은 바로 ‘아가페’의 실현이요, 에반젤린과 같이 ‘아가페’를 만나는 데에 최후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한국 역사는 ‘아가페’를 실현하는 길에 있는 ‘고난의 역사’가 되는 셈이다. 언젠가 오실 님을 기다리며 거리에 나앉은 거렁뱅이 여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이다.

쉽사리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얼핏 보이는 지내온 윤곽만을 그려보아도 한국 역사는 고난만이 가득한 역사이다. 그나마도 좁은 땅덩어리는 국력이 약하면 오히려 불리한 지정학적 위치를 가졌고, 그 좁은 틀 밖으로 뛰쳐나가기는커녕 외침을 허다하게 받았으며, 찬란한 문화라고 하나 세계사에 크게 남을 만한 것도 없다. 함석헌 선생은 이러한 한국 역사의 고난에 대해서 그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즉, 한국 역사에 있어서 고난은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하며, 더욱 강하게 하는 것, 더욱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 시대를 이끌어갈 자격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한민족의 험난한 과거사는 벅찬 미래와 짝하여 영광이 되는 순간이다. 한민족의 장구한 역사의 굴곡과 오늘날의 처지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있을까.  

그러나 고난의 역사는 한국 역사, 혹은 세계 역사의 속성일 뿐이지 한국 역사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함석헌 선생은 세계 역사 또한 고난의 역사라 하고 있다. 또한 고난을 내리는 주체가 하느님이며, 그 고난을 시험받는 객체가 지나치게 유기체화한 한민족의 역사라는 데서 종교적 사관이 지닌 불편함이 드러난다. 이순신, 임경업 등등의 죽음을 종교적 시각에서 바라본 나머지, 그들은 하느님의 뜻으로 나타나 임무를 수행하고, 뜻한 시기에 죽음을 맞이한 뜻있는 위인들이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고려 북벌론의 좌절, 몽고의 침입, 이성계의 집권, 조선의 양란, 조선후기의 붕당정치 등 고난과 실패가 있었던 썰물의 시기들은 대체로 북벌론이 좌절되거나 외침을 받은 때이다. 반면 성했던 밀물의 시기들은 만주땅으로의 확장을 꾀하거나 부분적인 확장을 이룬 때이다. 영토를 확장하는 것은 당연히 나라의 힘이 공고해지는 때에 있기 마련이므로 성한 시기라고 할 수 있겠으나, 결과론적으로만 보아 성쇠를 따진 한계가 있다.

고난을 견디어 비로소 맞게 되는 새 시대의 영도자. 이것이 바로 고난의 역사를 겪은 한민족에게 주어진 미래의 사명이요, 영광이라고 한다. 즉, 아가페의 실현자, 정의, 진리, 사랑의 승리를 가능케 하는 자이다. 언제일까 손을 꼽아보면 온 만큼이나 더 걸리지 않을까. 힘이나 기술이 아니라 도덕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세계는 힘이 지배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 혹은 하나의 관리 체제가 되어야 한다. 그 관리 체제에서 물질이 아닌 정신을 받들어야 하고, 그러고 나서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장점이자 힘인 착함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밀물과 썰물로 나눈 팽창과 축소라는 해석과 미래에 주어질 우리의 사명은 언뜻 맞지 않아 보인다. 만주벌판의 정복자와 아가페의 실현자는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러한 불편함이 있어도 이 책은 큰 뜻을 지니고 있다. 그 뜻은 선생이 《성서조선》에 글을 싣던 때와 제목을 바꾸어 책을 펴내던 때의 시대적 배경을 함께 살펴봐야 비로소 확연해진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그리고 혼란스러웠던 해방정국, 뒤이은 군사독재 시절. 또다시 고난과 핍박에 내몰린 우리 민족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위로였고 사명감이었으며 민족적 자존심이었다. 바로 민족의식의 고취였다.

이러한 시기에 함석헌 선생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에 대한 객관적이고 세세한 고증이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였을 것이다. 고난당하는 우리 민족의 정체는 무엇이며 대체 우리에게 나아갈 길은 무엇일지 찾아보아야 했을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현재의 삶 한가운데에서 역사를 둘러보았으며, 방관자가 아닌 이 땅에 난 이로서 얻어낸 것이 고난의 역사였다. 그 고난으로 얼룩진 역사 속에는 왜곡이나 과장보다는 침울할 만큼 안타까움과 한탄이 서려 있다. 이 내용은 우리 민족에게 우울감을 고취하거나, 열등감에 빠지게도 하지 않는다. 함석헌 선생은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의 연속인 고난의 역사를 통해 고난은 극복해야 할 것이고, 극복한 뒤에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소리치고 있다. 또한 어리석을 정도로 지켜져 온 착함을 잃지 말고 사랑을 베푸는 민족이 되자고 소리치고 있다. 고난을 당하더라고 최고의 가치를 잊지 말자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1950, 60년대를 살고 있던 이들에게 고난은 극복해야 할 것이고, 그 뒤에는 우리의 사명이 있다는 말은 힘이요, 희망이었음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속에는 함석헌 선생의 이러한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실의에 빠진 많은 이들에게 읽히려는 뜻은 형식과도 맞물렸다. 즉, 어려운 한자어를 피하고 될 수 있는 한 우리말을 살려서 썼다. 그런데도 그 쓰임이 부자연스럽지 않고, 뜻이 통하는 데도 무리가 없다. 이 점은 역사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새겨야 할 것이다.

함석헌 선생의 말대로 역사가의 본분은 고증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통해 앞으로도 거울로 삼을 ‘하나’를 찾는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하나’를 찾는 일이 역사라는 학문의 궁극적인 역할이라 할 수 있겠다. 그 ‘하나’의 뜻을 밝혀 오늘과 닿게 해야 한다. 또한 앞서 말했듯 여러 사람이 만날 수 있게 그들의 말로 풀어 써야 한다. 그 뜻을 자신만만하게 밝히는 역사가보다 사실의 재조합과 해석의 답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역사가가 더 많다는 사실에 대한 함석헌 선생의 탄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겨들어야 할 일침이다. 이 책은 비록 종교적 사관에 치우쳐 써서 다른 잣대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논박거리를 제공하지만, 자신의 잣대로 뜻을 풀어 밖으로 널리 알렸다는 데 큰 뜻이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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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에 꽂힌 책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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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에 꽂힌 책의 어제와 오늘, 내일
 

  책에 흥미를 붙이면서 욕심도 생기더라. 탐나는 책이 생기는가 하면 꼭 보지도 않을 책을 사기도 한다. 욕심은 책뿐만 아니라 책꽂이에도 마찬가지다. 좀 두께가 있고 길이도 방 한면을 채울 만한 나무판 여러 개와 벽돌을 이용해 만든 책꽂이가 갖고 싶었다. 아니 여전히 갖고 싶다. 여러 사정상 아직 원하는 책꽂이를 갖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만한 책꽂이가 들어갈 만한 방이 아니라는 슬픈 현실. 두 번째 이유는 그 책꽂이에 꽂을 만큼 책이 많지 않다는 안타까운 현실. 읽은 책과 안 읽은 책 모두 합해 지금 내 방에 있는 책은 겨우 사백몇십 권밖에 안 되니 그보다 두세배는 더 있어야 그런대로 모양이 날 텐데 말이다. 읽지도 않을 거면서 무턱대고 책만 끌어 모으는 것도 좀 우습겠고.

   어릴 적에서부터 지금까지 보았던 책들을 곰곰이 떠올려보면 이십여 년 동안에 책의 꼴이 참 많이 변했다 싶다. 책의 장정에서부터 인쇄, 종이, 판형 등등 질적으로 나아졌고 다양해졌다. 이 짧은 시기에도 이러한데, 책이 만들어진 처음의 시간부터 지금까지는 얼마나 많은 변모가 있었을까. 이 책에서는 서양에서 책을 보관하던 방식으로 접근하여 책의 꼴과 그 사회성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책을 탐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그 내용을 담고 있는 껍질에도 역사가 있고 여러 의미의 변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책에 대해 새로운 시각이 생길지도 모르지 않는가? 책을 읽는 또 다른 묘미를 느낄지도 모르지. 
 
 
 
   "우리가 지금 만나는 책의 꼴은 중세에 이르러서야 나타난다. 그 전에는 그저 두루마리에 썼을 뿐이다. 두루마리들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묶은 것이 바로 책의 전신인 코덱스이다. 이 코덱스를 만들고 읽는 층은 주로 수도원의 성직자였고, 따라서 책의 종수나 부수는 극히 적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주로 필사를 했기 때문에 책은 매우 귀중했다. 이러한 책의 조건은 보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과 같이 책을 세워서 책등만 보이게 꽂은 것이 아니라, 책상 위나 선반에 눕혀 보관했다. 흔히 책을 읽고나서 휙 던져두듯이 그렇게.
   인쇄술이 발달하고, 독자 대상이 수도원을 벗어나면서 책의 종수나 부수가 많아졌다. 소량생산에서 대량생산으로 책이 만들어지면서 서점과 도서관이 생겨났고, 개인 서재도 생겨났다. 개인 서재처럼 책을 적게 보관하는 경우는 역시나 눕혀 놓거나 궤짝에 넣어두었다. 그러나 도서관에서는 많은 책을 효과적으로 보관하는 방법과 함께 읽는 공간도 마련할 필요가 생겼다. 또한 도난을 걱정해야 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책은 세로로 책장에 꽂히게 되었는데, 아직은 책등이 밖으로 나온 게 아니라 손때가 묻은 배면이 밖으로 나왔다. 왜냐하면 도난을 막기 위해 책의 두꺼운 앞장이나 뒷장을 사슬에 묶어놓았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와 책이 폭발적으로 많아지면서 도서관은 좀더 건축학적으로 설계되었다. 책의 효율적 보관과 함께 좋은 독서환경이 중요해졌다. 때문에 창문의 배치, 책장의 배치, 공간의 활용, 전기의 활용 등을 골똘히 연구했다."
 
 
  
   책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 이제는 읽는 책과 읽지 않는 책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사료로써 의미를 더 많이 가지게 되는 책들은 독서가 아니라 보관용으로 어딘가에 둘 것이다. 앞으로 계속 쏟아져 나올 책들을 그려보면,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신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디스크 한 장에 수십 권의 책에 든 내용을 넣고, 컴퓨터로 클릭만 하면 원하는 쪽이 나온다. 그러면 내가 바라는 덩치 큰 책꽂이는 필요가 없어지는 걸까? 아담한 시디 장만 있으면 되는 건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책의 미래를 그려볼 때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추가되었다. 책의 수량도 책의 미래에 영향을 주겠구나. 사회에 나도는 책의 수량에 따라서 책을 보관하는 방식과 형태가 달라졌듯이 말이다.

   한 가지 드는 궁금함과 아쉬움. 동양에서 책은 어떤 형태로 발전했을까? 옮긴이 역시 후기에서 잠깐 밝혔지만, 동양에서의 책의 역사도 서양 못지않게 흥미로웠을 성싶다. 또한 미래에 대한 반짝하는 아이디어를 줄지도 모른다.   

   다른 얘기인데, 서양 중세기에 대한 기술은 주제가 무엇이건 간에 암울하고 답답하다. 그래서 안 읽히는지도 모르겠다. 공학적인 설명이 주된 내용인지라 이 역시 나에게는 좀 답답한 면이 있었다. 보다 옛날 분위기를 내기 위해 종이와 서체 등을 가려 선택한 듯하다. 그럴 의도였다면 충분히 전달한 셈이기는 하다. 책을 손으로 만지는 느낌이 좋고 무엇보다 가벼워서 좋다. 하지만 서체나 인쇄 상태는 읽는 입장에서 보면 그리 좋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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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 - 레이 황의 중국사 평설
레이 황 지음, 권중달 옮김 / 푸른역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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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중국 역사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E. H. 카가 한 너무나도 유명한 말이다. 대학교에 들어와 청년사에서 나온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이 말에 밑줄을 그었다. 스스로 깨달았다기보다는 다른 이들이 중요하다고 했으므로. 새삼스러울 게 없는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만큼 너무나도 중요한 말이기도 하다. 역사를 공부하려는 이들은 자연스레 가지는 생각이 아닐까. 하지만 역사를 그저 대하드라마의 재료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어느 학문이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역사는 특히나 서산의 마애불처럼 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과거의 한 지점을 바라보는 지금의 시대, 처지, 종교, 생각 등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사관이 필요하고 역사의 진실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닐까. 또한 저자가 말했듯 당시대의 역사가들은 그들의 도덕적 잣대로 사건을 결론짓고, 호칭하고 평가하지만 오늘날의 잣대로 보면 오히려 상반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저자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강조하는 거시적 관점은 사관이라고 볼 수는 없겠다. 이는 단지 방법론이다. 이를테면 멀리서 보느냐 가까이서 보느냐에 따라 그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보이던 것이 숨는 일은 있겠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잣대가 될 수는 없으리라. 레이 황 역시 거시적 관점으로 중국 역사의 각 단면을 보았지만, 해석하는 잣대는 경제적인 발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중국이 자본주의로의 진입이 더디어진 이유로부터 출발하여 고대에서 원나라까지를 살펴본 것이다. 중국 역대 왕조들의 가장 큰 허점을 큰 중국 대륙을 지배하는 방식의 문제였다. 드넓은 중국 대륙을 지방분권이 아니라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 관료체제로 통치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이 요지다. 또한 수치를 기본으로 하는 기구화, 제도화로써가 아닌 황제의 도덕이 선정이 표준이 된 것도 문제였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여 아래로 진리나 제도, 원칙 따위를 일방적으로 내리다 보니 경제 제도마저 현실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이는 각 왕조가 몰락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고, 더 나아가 중국 경제가 뒤쳐지게 된 숨은 이유였다. 저자는 오늘날 가장 중요한 작업은 재정과 조세수입을 상업화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한편, 멀리서, 혹은 나중에 보면 상처가 보이지 않는 수도 있으니, 거시적 관점으로 본 위진남북조와 당의 말기가 그랬다. 기존의 좁은 시각에서 보면 위진남북조 시기는 그저 아래위로 갈라진 혼란의 시기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지고, 북방민족이 한화되고, 불교를 통한 상아의 융합이 가능해진 시기다. 수나라로 재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시기다. 마찬가지로 당이 몰락한 이유가 현종의 실정과 안사의 난이 아니라 변화한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 체제에 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이러한 관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만일 자동차가 몇 번 교통사고를 낸 다음이 아니라면, 도로가 어떻게 계획되어야 하고, 또 신호등은 어떻게 설치되어야 할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얼핏 함석헌의 ‘고난의 역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저자가 말하는 자신의 서술태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네 가지로 정리해서 밝히고 있다. 첫째,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에서 논의를 이끌어낸다. 둘째, 일개인이나 특정 사건에 역사적인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셋째, 사건이 일어난 전후시대와 그 사건을 둘러싼 동서남북의 사회, 지리, 문화까지 두루 살핀다. 넷째, 거시사관은 국제성을 띠고 있다. 물론, 셋째나 넷째 요건을 이 책에만 두고 본다면 부족한 감이 있다. 첫째는 학술적인 글쓰기와 대중적인 글쓰기의 다른 점을 경쾌하게 말한 것이 아닐까. 두 가지의 글쓰기가 모두 같은 알맹이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알맹이에 다가가는 방식과 경로의 차이가 글쓰기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연구 자체에 의미를 두는 역사학 연구에 대해서도 경계를 표시한다. “역사연구가 자칫 희석화된 지식의 양산이나 개인적 취향이나 주관을 만족시키는 수준에 그친다면, 그것은 이미 학문으로서의 생명력을 잃은 것이다.”

맨 앞의 명제를 다시 한 번 떠올리자.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각장마다 있는 옮긴이의 요약글이 친절하고, 소단락의 제목이 좋다. 체제와 편집 또한 깔끔하고 안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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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 푸른역사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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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를 누가 죽였을까
 

상황 재연의 지매가 크다. 재미라... 조선후기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죽은 한 나라 왕자의 이야기를 재미라고 할 수 있을까. 처가의 당론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죽음을 외면한 뿐만 아니라 살기 위해 《한중록》을 써서 사실을 왜곡까지 해야 했던 혜경궁 홍씨의 이야기를 그저 재미라고만 할 수 있을까.

조선은 대체로 신권이 강했으며, 왕권과 신권이 강하고 약함을 번갈아 해왔다. 조선후기 붕당정치로 대표되는 신권의 강력함은 ‘택군’을 넘어서 자신의 군주를 세울 수도 있게 되었다. 그것은 왕정도 아니고, 공화정도 아니다. 다만 다수가 행하는 독재였다. 신권의 비정상적인 강대함은 결국 한 가문의 세도로 치닫게 되었다. 영정조시대에 탕평책을 폈다 하나 이는 역설적으로 오죽 심했으면 왕이 신하들 사이를 화해시키려 했겠는가 말이다.

영조의 탕평책은 그 자신이 지닌 약점으로 인해 쉽게 성공할 수 없었고, 급기야는 아들을 고립시키게 만들었다. 결국 사도세자를 죽게 한 것은 비정상적으로 강대해진 당론싸움과 자식마저 희생해야 했던 권력이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탕평책도 실패하고 말았다. 사도세자의 고립과 탕평책의 실패는 다음 국왕이었던 정조에게 고스란히 넘겨졌다.  

읽는 재미는 크다. 맨 앞에 말한 상황 재연의 재미가 있다. 역사적 사실을 조목조목 설명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허구적 요소를 섞어놓아 오히려 흥미를 유발한다. 이러한 허구적 상상력도 역사를 연구하는 이에게는 필요하며, 대중적인 역사서를 쓸 때에는 당연히 필요하다. 읽는 이로 하여금 궁금증을 갖게 하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있다. 꼴이나 편집에 좀더 멋을 부려봄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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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의 나라
박광용 지음 / 푸른역사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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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과 대동을 향한 노력
 

이 책이 출간된 1998년 4월은 김대중 씨가 그렇게도 바라던 대통령이 되어 첫발을 내딛던 때이다. 누구든 대통령이 되면 가장 먼저 큰 목소리로 부르짖는 것이 바로 통합이다. 여야의 통합, 영호남의 통합, 남북의 통합, 빈부의 통합, 전 국민의 통합... 여기 조선 후기의 통합정책에 대한 역사적인 예가 있다. 당시 대통령이 이 책을 보았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이 당시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으로 기억은 한다.

저자는 영조와 정조의 시대에 행해진 탕평정치를 설명하기 위해 당시의 정치 상황을 조목조목 짚어본다. 붕당론, 군주론, 인물론, 탕평론 등으로 크게 넷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처지에서 각각을 끈기를 가지고 읽기란 인내를 요한다. 각 당파에 얽힌 인물들의 계보와 특징을 설명하는 인물론에서는 더욱 참아야 한다. 때문에 중간은 지루하다. 많은 사건들을 다루었으나 세세하게 앞뒤 설명을 하지 않은 이유도 있다. 지면상 제약도 있었겠다.

마지막에 다룬 탕평론만을 두고 보자. 이때의 탕평정치를 보는 견해는 세 가지가 있다. 자본주의 도입 전 단계의 절대군주제라는 절대군주제지향론, 군자당에 의한 통일되는 단계가 탕평이라는 성리학긍정론, 피지배층이 급격히 성장한 민중사학론 등이다. 이것들 말고도 탕평정치는 결국 시파와 벽파의 당쟁으로 대표되는 또 다른 당파싸움이었다는 시벽당쟁론이 있다. 저자는 이 견해는 당치도 않은 오류라고 못 박았다. 이는 식민통치 합리화론이라는 것이다. 우습게도 이 시벽파당쟁론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내용이 아니던가? 고등학교 때 이 시파와 벽파를 이렇게 외우라고 배웠다. 이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바라보는 데에 다름이 있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눈‘시’울이 뜨겁다 하여 시파, 완‘벽’하게 죽였다 하여 벽파라고 외웠던 것이다.

어쨌든 위의 세 가지 견해는 각각 한계를 가진다. 절대군주제지향론은 서구의 모델에 따라야 하는가라는 반발이 있다. 세계적 보편성과 우리의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리학긍정론에 대해서는, 주자학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자성리학을 근대적 개혁사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무리가 따른다. 민중사학론으로 보자면 당시의 상황을 혁명을 통해 타도되어야 할 것으로 파악했다는 불편함이 있다고 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전근대 사회 통합의 역사 체험이 지닌 고유성과 보편성의 실체를 밝혀야 한다. 이러한 통합 노력은 바로 18세기 탕평정치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정치보다는 통치를 찾는 식민사관적인 후진국정치론은 타파해야 한다.” 즉 영정조의 탕평정치는 조선 사회 자체의 개혁과 통합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성리학적 정치론을 넘어서려는 근본주의 정신에 입각한 정치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과 통합 정신을 오늘날의 한국 정치에서 본받아야 하며, 오늘날의 개혁은 사회 자체의 개혁이 아닌 한정된 개혁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질타하고 있다.

영조와, 특히 정조가 추구한 탕평정치의 구상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과는 약간 다르다. 단지 붕당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화합을 꾀한 것이 아니다. 정치 원칙을 새로이 창조하여 군주권을 강화하여 조선 사회를 개혁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해야 할 것은 당연 붕당간의 화합이었을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하지 않았던가.

저자는 이러한 당시의 탕평정치에서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여덟 가지 정치원칙도 친절히 제시하고 있다. 이는 학문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원칙을 창조하여 정치의 탕평을 이루어 사회의 대동으로 함께 가야 하고, 여론 수렴과 인재 등용의 방식을 잘 살피며, 정치 이념에 대해 시비론보다 우열론을 따라 세계화론과 자기정체성론을 잘 구별하여야 한다. 이로써 제대로 된 통치자론과 민중사상을 세우고 진정 한국 사회에 맞는 역사발전론을 세워야 한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사회 개혁과 남북통일로 가는 올바른 길인 셈이다.

아쉬움이 남는다. 진정한 탕평정치와 대동사회를 향한 노력이었다. 단지 노력으로 끝났다는 데 한계가 있다. 결과와 함께 과정도 중요하지만 성공하지 못한 역사이므로 그것은 베낄 설계도는 있을지언정 다 지어진 집을 볼 기회를 얻지 못한 것과 같다.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군권이 신권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 한계가 아니었을까? 때문에 제도화로까지 갈 수가 없었고 정조가 죽은 후 본격적인 세도정치로 왜곡되지 않았는가. 이는 어쩌면 당시 사회가 이미 왕조정치로 이끌 수는 없는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는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을 상정하는 일이 무의미한 줄은 알지만, 만약 외세의 힘이 없었다면 군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을까? 그럴 기미는 찾을 수가 없다. 때문에 군주권의 강화를 통한 탕평정치는 한계를 안고 시작한 제한된 시간 속의 개혁이 아닐까? 바로 전근대적 개혁이라는 한계 말이다.

이 책에서의 소단락 나누기는 오히려 불편하다. 왠일인지 쉰다[休]는 생각보다는 답답하다는 느낌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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