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손수건 - 미선이와 효순이에게 보내는 이용남의 포토에세이
이용남 지음 / 민중의소리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넘기던 손과 눈이 딱 멈춰버렸다. 100쪽 한 여자아이의 사진에서 멍하니 한참을 있었다. 그리곤 눈물 한 방울이 똑 사진 위로 떨어졌다. 미군에게 아버지를 잃은 한 소녀의 앙다문 입매와 어딘가를 쏘아보는 눈빛. 속으로 씹어 삼키고 있을 열 살짜리 해미의 슬픔과 증오와 상처가 고스란히 전해져 가슴에 금이 간 듯했다. 사진으로 봐도 이러한데...

 

사진집은 지난 5월 24일 음독자살을 기도한 사진작가 이용남 씨가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며 낸 책이다. 그의 음독자살 기도를 두고 주변의 어떤 이들은 ‘무모했다, 감정적이다’라고 했다지만, 그는 과연 온전한 가슴을 지녔을까.


내가 책에서 본 사진들의 피사체는 나보다 먼저 사진작가가 봤을 것이다. 파인더를 통해 피사체를 보며 초점을 맞추고 구도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파인더에서 눈을 떼고 다른 위치에서 다른 각도로 피사체를 보며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사진은 곧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의 시선이 닿은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잊고서 사진을 보아왔다. 사진 속에는 사진가의 의도와 감정이 들어 있는 것이다.

 

도로변에 뒹구는 찌그러진 피 묻은 신발을 보며,
미군 트레일러에 찌그러진 자동차를 보며,
사고로 일그러진 운전자의 얼굴을 보며,
증오와 슬픔에 찬 아이의 눈매를 보며,
썩어버린 논바닥의 악취를 맡으며,
터져 나온 골수와 문드러진 종아리를 보고서
어찌 부서져 내리지 않은 온전한 가슴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가슴에 들러붙은 악몽을 농약으로라도 씻어내고 싶지 않았을까.

 

사진작가 이용남 씨가 책의 머리말에 쓴 한 구절이 확대되었다.
“나도 아름다운 사진을 찍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느림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1995년 4월
평점 :
품절


어떤 몹쓸 인간이 책에다 밑줄을 그어놓았다. 꽤 오래전에 나온 책이라 남산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어떤 대출자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죄다 밑줄을 그어놓았다. 덕분에 신경을 크게 쓰지 않고 읽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스스로 중요한 부분을 찾는 즐거움을 빼앗아버렸으니 그는 분명 몹쓸 인간이다.

 

읽는 내내 제목과 내용을 합치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일상사를 애기하듯 툭툭 내던져진 글 속에서 느림이라는 뼈대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쩌면 애초에 느림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몹쓸 인간이 밑줄을 그어놓은 부분만 훑고 지나가는 게 쿤데라가 느림에 대해 무얼 말하려 하는지 유추해보기에는 더 편할 성싶었다. 그것들은 시장통에서 간간히 들리는 잠언처럼 약간은 부유하고 있는 상태다.

 

18세기의 느림에서 나오는 여유와, 20세기의 빠름에서 나오는 갖가지 증상들을 대비시켜놓았다는 것은 ‘아마도’ 틀림없다. 그 20세기의 증상들은 베르크, 벵상, 체코 학자 등을 통해 대표되는데, 이야기의 끝으로 갈수록 그들을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조롱한다. 속도에서 얻어지는 양적 획득을 자랑하듯이. 속도와 양적 획득은 쿤데라가 표현한 춤꾼에 다름 아니다.

 

속도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은 바로 느림과 기억 사이, 빠름과 망각 사이에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는 정의다.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정도에 정비례한다. 즉, 기억에 골똘하면 할수록 걸음은 느려지고, 망각하려 하면 할수록 점점 빨라지려 한다는 것이다. 이를 거꾸로 놓고 보자면, 느려지면 느려질수록 기억이 잘 나고 과거에 머물러 있게 되고,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훨씬 빨리 잊혀지고 과거는 금세 지나가버린다. 빠른 속도에서는 그 속도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야 하므로 뭐든 빨리 잊혀질 거 같긴 하다.

 

난 속도감을 즐기지 않는다. 난 느릿느릿 가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지난 일을 빨리 잊어버리지 못한다. 추억이라 이름이 붙여져버린 기억들은 자꾸 끄집어내어 반추하며 기억에서 신경으로 신경에서 감정으로 전이시키곤 한다. 그렇다고 느림을 거부하고 싶지도 않다. 또한 추억을 반추하며 쓸데없이 손발을 저려하는 일도 썩 내키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뛴다. 너무 빠르지 않으면서도 뜀박질로 긴장하는 내 육체에 온 신경이 집중하도록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이팅, 파브 - 지금보다 강한 나를 만드는 셀프 리더십
신완선 지음 / 흐름출판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난 자기경영(경제경영에 가까운 자기계발 - 내 맘대로 붙인 용어다)류의 책을 잘 안 읽는 편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너무나도 절박하게들 말하는 통에 숨이 턱턱 막히기도 한다. 특히나 시간을 쪼개 쓰는 법이나 무슨 무슨 기술에 관한 책은 특히나 그렇다.
물론 한순간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적절히 이용하면 책값을 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근본적인 치유는 되어주지 못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는 나는 역시나 지루한 인간임에는 틀림없다.
그래도 흥미 있게 즐겨 읽는 자기경영서의 종류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논픽션이 가미된 책들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저자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예로 많이 든 책일수록 좋다. 아무렴 베네통보다야 홍명보가 더 친근하고 와닿지 않는가? 또한 우리나라 저자는 우리말로 쓰기 때문에 훨씬 쉽게 읽힌다. 번역투로 된 글은 식도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다.
어쨌거나 자기경영서는 사회의 문제를 들춰내지 못한다. 사회과학서적이 아니므로. 때문에 보다 나 자신의 문제에 경사되기 마련이다. 무조건 경쟁과 자본의 이 시대에 맞는 최상의 인간상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시대와는 상관없이 긍정적인 인간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게 나로선 더 좋다. 시대와 상관없이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라고 물어주는 게 좋다. 오히려 시대와 상관없이 너만의 시대를 만들라고 하는 거 아닌가 말이다. 성공이란 자신이 설정해놓은 기준이 아니던가?
문제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콤플렉스 없는 인간이 어디 있을까. 결국은 자기와의 싸움이 아닌가. 자신이 처한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에게 엄격해질 때 오히려 묘한 행복감에 젖게 되지 않을까?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도록 해주는 게 더 자연스러우리라. 그리고 그 한계를 단순화 시키거나 무시해버렸을 때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도 괜찮다. 아주 소심한 사람보고 무조건 적극적이 되라고 하면 살지 말라는 말인가? 소심쟁이한테도 좋은 면이 있단 말이다. 소심한 면을 오히려 더 소심하게 만들면 뭐가 되지 않을까?

자기를 변화시키자고 자기경영서를 읽는 건데 이렇듯 입맛에 맞는 내용을 미리 정해놓고 책맛을 보려 하니 이거도 참 문제다. 음식도 편식을 하는데 마음의 양식인 책이라고 편식하지 말란 법 있나? 어쨌건 이런 내가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자기경영서가 있으니 바로 파이팅, 파브였다. 저자는 공대출신인데 글을 무척 잘 썼다. 쉽고 간결하게 내용을 잘 전달하고 있어서 수월하게 읽힌다.
난 꽤나 소심한데 더 소심해져버리면 뭐가 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뜻으로 본 한국역사 -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극복하는 역사,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역사
 

이제 역사라는 것은 예전처럼 논문집 속에 갇힌 뜻 모를 한자어의 나열이 아니다. 의정부와 육조 체제 외우기는 더더욱 아니다. 역사책은 눈길을 끌 만큼 예쁘게 포장되고, 그 내용도 일반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큼 쉽게 표현되고 있다. 학계 내에서의 전문화와 대중화의 갈등은 비중 있는 담론이 되었고, 어느 것도 소흘히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는 듯하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이야 늘 긴장하면서 역사를 대할 것이다. 역사를 읽는 비전문적인 독자들도 긴장해보는 것이 어떨까. 특정한 시대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역사라는 것 자체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여기 《뜻으로 보는 한국 역사》에서 그 관심의 출발점을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내가 누구이며 장차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지나온 이력을 살펴봐야 한다. 이리저리 수천 갈래로 난 가지 사이로 굵은 줄기 하나가 보일 것이다. 그 줄기가 바로 오늘날의 나이며, 또한 내일의 나이다.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정체성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알고자 한다면 그 나라의 지나온 역사를 되새겨보아야 한다. 역시나 수만 갈래의 가지가 있을 것이고, 굵은 줄기가 있을 것이다. 그 줄기가, 곧 함석헌 선생이 말하는 ‘하나’이며, ‘뜻’일 것이다.  

역사에서의 ‘하나’ 찾기. 이는 곧 우리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이며, 또한 기나긴 시간 동안 있어온 인간의 활동 속에서 지금까지 이어져온 그 어떤 절대적인 것을 찾는 작업이다. 우리 민족의 형성과 그 지나온 길을 골똘히 살펴 민족적 자존심과 고유한 가치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더 넓게 본다면 이 ‘하나’는 지구의 역사가 어떠한 발전 과정을 거쳤으며, 인류에게 진정한 진보란 무엇인가를 구하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향해 몸을 내던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역사 속에서 ‘하나’를 찾기 위해서 먼저 역사를 바라보는 잣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사관이다. 함석헌 선생이 삼은 잣대는 바로 종교적 사관이었다. 기독교의 편에서 역사를 해석했기에 찾아낸 ‘하나’는 바로 ‘아가페’였다. 기독교적 사관에서 본 역사의 궁극은 바로 ‘아가페’의 실현이요, 에반젤린과 같이 ‘아가페’를 만나는 데에 최후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한국 역사는 ‘아가페’를 실현하는 길에 있는 ‘고난의 역사’가 되는 셈이다. 언젠가 오실 님을 기다리며 거리에 나앉은 거렁뱅이 여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이다.

쉽사리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얼핏 보이는 지내온 윤곽만을 그려보아도 한국 역사는 고난만이 가득한 역사이다. 그나마도 좁은 땅덩어리는 국력이 약하면 오히려 불리한 지정학적 위치를 가졌고, 그 좁은 틀 밖으로 뛰쳐나가기는커녕 외침을 허다하게 받았으며, 찬란한 문화라고 하나 세계사에 크게 남을 만한 것도 없다. 함석헌 선생은 이러한 한국 역사의 고난에 대해서 그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즉, 한국 역사에 있어서 고난은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하며, 더욱 강하게 하는 것, 더욱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 시대를 이끌어갈 자격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한민족의 험난한 과거사는 벅찬 미래와 짝하여 영광이 되는 순간이다. 한민족의 장구한 역사의 굴곡과 오늘날의 처지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있을까.  

그러나 고난의 역사는 한국 역사, 혹은 세계 역사의 속성일 뿐이지 한국 역사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함석헌 선생은 세계 역사 또한 고난의 역사라 하고 있다. 또한 고난을 내리는 주체가 하느님이며, 그 고난을 시험받는 객체가 지나치게 유기체화한 한민족의 역사라는 데서 종교적 사관이 지닌 불편함이 드러난다. 이순신, 임경업 등등의 죽음을 종교적 시각에서 바라본 나머지, 그들은 하느님의 뜻으로 나타나 임무를 수행하고, 뜻한 시기에 죽음을 맞이한 뜻있는 위인들이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고려 북벌론의 좌절, 몽고의 침입, 이성계의 집권, 조선의 양란, 조선후기의 붕당정치 등 고난과 실패가 있었던 썰물의 시기들은 대체로 북벌론이 좌절되거나 외침을 받은 때이다. 반면 성했던 밀물의 시기들은 만주땅으로의 확장을 꾀하거나 부분적인 확장을 이룬 때이다. 영토를 확장하는 것은 당연히 나라의 힘이 공고해지는 때에 있기 마련이므로 성한 시기라고 할 수 있겠으나, 결과론적으로만 보아 성쇠를 따진 한계가 있다.

고난을 견디어 비로소 맞게 되는 새 시대의 영도자. 이것이 바로 고난의 역사를 겪은 한민족에게 주어진 미래의 사명이요, 영광이라고 한다. 즉, 아가페의 실현자, 정의, 진리, 사랑의 승리를 가능케 하는 자이다. 언제일까 손을 꼽아보면 온 만큼이나 더 걸리지 않을까. 힘이나 기술이 아니라 도덕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세계는 힘이 지배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 혹은 하나의 관리 체제가 되어야 한다. 그 관리 체제에서 물질이 아닌 정신을 받들어야 하고, 그러고 나서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장점이자 힘인 착함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밀물과 썰물로 나눈 팽창과 축소라는 해석과 미래에 주어질 우리의 사명은 언뜻 맞지 않아 보인다. 만주벌판의 정복자와 아가페의 실현자는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러한 불편함이 있어도 이 책은 큰 뜻을 지니고 있다. 그 뜻은 선생이 《성서조선》에 글을 싣던 때와 제목을 바꾸어 책을 펴내던 때의 시대적 배경을 함께 살펴봐야 비로소 확연해진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그리고 혼란스러웠던 해방정국, 뒤이은 군사독재 시절. 또다시 고난과 핍박에 내몰린 우리 민족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위로였고 사명감이었으며 민족적 자존심이었다. 바로 민족의식의 고취였다.

이러한 시기에 함석헌 선생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에 대한 객관적이고 세세한 고증이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였을 것이다. 고난당하는 우리 민족의 정체는 무엇이며 대체 우리에게 나아갈 길은 무엇일지 찾아보아야 했을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현재의 삶 한가운데에서 역사를 둘러보았으며, 방관자가 아닌 이 땅에 난 이로서 얻어낸 것이 고난의 역사였다. 그 고난으로 얼룩진 역사 속에는 왜곡이나 과장보다는 침울할 만큼 안타까움과 한탄이 서려 있다. 이 내용은 우리 민족에게 우울감을 고취하거나, 열등감에 빠지게도 하지 않는다. 함석헌 선생은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의 연속인 고난의 역사를 통해 고난은 극복해야 할 것이고, 극복한 뒤에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소리치고 있다. 또한 어리석을 정도로 지켜져 온 착함을 잃지 말고 사랑을 베푸는 민족이 되자고 소리치고 있다. 고난을 당하더라고 최고의 가치를 잊지 말자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1950, 60년대를 살고 있던 이들에게 고난은 극복해야 할 것이고, 그 뒤에는 우리의 사명이 있다는 말은 힘이요, 희망이었음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속에는 함석헌 선생의 이러한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실의에 빠진 많은 이들에게 읽히려는 뜻은 형식과도 맞물렸다. 즉, 어려운 한자어를 피하고 될 수 있는 한 우리말을 살려서 썼다. 그런데도 그 쓰임이 부자연스럽지 않고, 뜻이 통하는 데도 무리가 없다. 이 점은 역사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새겨야 할 것이다.

함석헌 선생의 말대로 역사가의 본분은 고증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통해 앞으로도 거울로 삼을 ‘하나’를 찾는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하나’를 찾는 일이 역사라는 학문의 궁극적인 역할이라 할 수 있겠다. 그 ‘하나’의 뜻을 밝혀 오늘과 닿게 해야 한다. 또한 앞서 말했듯 여러 사람이 만날 수 있게 그들의 말로 풀어 써야 한다. 그 뜻을 자신만만하게 밝히는 역사가보다 사실의 재조합과 해석의 답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역사가가 더 많다는 사실에 대한 함석헌 선생의 탄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겨들어야 할 일침이다. 이 책은 비록 종교적 사관에 치우쳐 써서 다른 잣대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논박거리를 제공하지만, 자신의 잣대로 뜻을 풀어 밖으로 널리 알렸다는 데 큰 뜻이 있다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딧불이의 무덤
노사카 아키유키 지음, 서혜영 옮김, 타카하타 이사오 그림 / 다우출판사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그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반딧불이 날아다니고, 풀벌레가 우는 여름밤을,
주렁주렁 매달린 청포도 단내와 청명한 바람의 기분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봄 햇살이 닿아 곱게 홍조 띤 볼을,
한여름 나무그늘 밑에서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사실을.
이 과정이 무수히 반복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것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나도 어릴 적 순수한 꿈이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아직 아름답고 순수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손바닥에 전해지던 심장의 두근거리는 느낌을...


 
 

 1945년 9월 22일 세이타는 죽었다. 산노미야 역 구내 기둥에 구부정하게 기대 앉은 채로.
오늘이 며칠이지? 며칠일까, 얼마나 지난 걸까, 열심히 생각해 본다. 계속해서 며칠일까? 며칠일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세이타는 죽었다.
세이타의 품 속에 있던 알사탕통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여동생 세츠코의 하얀 뼈였다. 뚜껑이 열린 통에서 하얀 가루가 쏟아지고, 그 속에서 작은 뼛조각 세 개가 굴러나왔다.
 

 B29의 공습을 받아 마을이 몽땅 타버렸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투기 편대들은 마치 구름 사이를 떼지어 누비는 물고기처럼 보였다.
세이타는 먹을거리들을 숨기고 나서, 세츠코를 등에 업었다. 소이탄이 지붕에 떨어졌고, 갑자기 모퉁이집 이층 창에서 연기가 뿜어나왔다. 세이타는 바다 쪽으로 달렸다.
 

 세이타는 세츠코를 안고 제방 구덩이 안에 몸을 숨겼다. “엄마, 어디 갔어?” “방공호에 가 계셔.” “몸은 괜찬니? 세츠코?” “나막신이 하나 없어졌어.” “오빠가 사 줄게. 더 좋은 걸로.”
 

 언덕의 불탄 자리에서 아스라이 연기가 뿜어나왔다. “이제 두건 벗어도 돼” 하며 세츠코의 얼굴을 보니 그을음으로 온통 새까맣다. “엄만 어떻게 됐어?” 세츠코를 운동장에 둔 채 학교 양호실로 뛰어갔다. 어머니는 상반신을 붕대로 둘둘 감은데다 두 팔 역시 붕대로 감겨 있는 게 꼭 야구방망이 같았다. “이 반지, 지갑에 넣어 둬.” 세츠코가 엄마의 반지를 받아 똑딱 지갑에 넣는다.
 

 밤이 되면 우거진 수풀에는 나뭇잎마다 하나씩 반딧불이가 반짝거려, 손을 뻗으면 그대로 손가락 안으로 빛이 옮겨왔다. “바다에 가 볼까?” 세츠코의 심한 땀띠를 바닷물로 닦아주면 나을 거다 싶어 물어본다. 새삼 보는 세츠코의 알몸, 아버지를 닮아 피부가 희다. 세츠코는 밥상이 없어 바닥에 그냥 늘어놓은 밥그릇을 앞에 두고서도, 집에서 가르친 대로 정좌를 하고 먹었다.
 

 “집에 가고 싶어. 아줌마네는 싫어.” 그저 방공호 굴일 뿐인데도 세츠코는 들떠서 여기 저기 뛰어다닌다. 칠흙 같은 어둠. 세이타는 반딧불이를 굴 속 모기장 안에 넣으면 좀 환해지지 않을까 하여 반딧불이를 잡아 넣었다. “반딧불이 무덤 만들어 주는 거야.” 다음 날 아침, 세츠코는 반딧불이의 죽은 잔해를 땅에 묻으면서, “엄마도 무덤에 들어갔지?” 한다. 세이타는 처음으로 눈물이 났다.
 

 굶주림으로 세츠코는 점점 쇠약해져 갔다. 세츠코에게 먹이려고 고구마를 훔치다 들킨 세이타는 농부에게 사정했다. 폭탄이 떨어지는 동네 안으로 숨어든 세이타는 빈집에서 기모노를 훔쳤다.
세츠코는 며칠째 설사가 멈추지 않고 있었다. “배 고프니?” “응.” “뭐 먹고 싶니?” “튀김에, 생선회에, 우무.” 인형을 안고 깜빡깜빡 잠이 드는 세츠코. 세츠코의 머리를 단정히 해 주자, 새삼 눈 밑이 푹 파인 것이 세이타의 눈에 박힌다.
 
...
 세츠코가 죽었다. 밤이 되자 폭풍우가 몰아닥쳤다. 세이타는 캄캄한 굴 속에 웅크리고 앉아, 이미 식어버린 세츠코의 이마에 자기 뺨을 갖다 댔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어린아이니까, 절 구석 같은 델 빌려서 태워달라거라. 발가벗겨서 말야. 콩깍지로 불울 붙이면 잘 타올라.” 불은 밤이 으슥해져서야 사그라졌고, 뼈를 줍기에는 이미 너무 어두웠다. 주변은 엄청난 반딧불이 무리. 반딧불이를 보면 세츠코도 외롭지 않겠지. 세츠코야, 반딧불이와 함께 천국에 가거라.
 
 

전쟁으로 죽어가는 죄 없는 아이들의 참상을 리얼하게 그린 가슴 뭉클한 이야기. 지브리 스튜디오가 만든 애니메이션에는 보다 가슴 아픈 장면과 효과가 들어 있을 것이다. 이사오가 연출하는 영상미와 리얼리즘에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 포화 속 아이들의 비명을 정당화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미국의 B29가 마을을 폭격해서 불바다로 만든 것처럼, 일본의 급강하 폭격기가 다른 나라를 불바다로 만든 사실을. 역사적 진실이 빠진 반쪽짜리 가슴 뭉클한 이야기다. 애니메이션의 스틸 컷 하나와 같다. 나오키상은 아키유키의 문체를 유심히 살폈나보다. 일본의 아이와 어른들은 이 이야기를 접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 반전, 그뿐일까. 전쟁, 그리고 B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