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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1995년 4월
평점 :
품절
어떤 몹쓸 인간이 책에다 밑줄을 그어놓았다. 꽤 오래전에 나온 책이라 남산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어떤 대출자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죄다 밑줄을 그어놓았다. 덕분에 신경을 크게 쓰지 않고 읽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스스로 중요한 부분을 찾는 즐거움을 빼앗아버렸으니 그는 분명 몹쓸 인간이다.
읽는 내내 제목과 내용을 합치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일상사를 애기하듯 툭툭 내던져진 글 속에서 느림이라는 뼈대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쩌면 애초에 느림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몹쓸 인간이 밑줄을 그어놓은 부분만 훑고 지나가는 게 쿤데라가 느림에 대해 무얼 말하려 하는지 유추해보기에는 더 편할 성싶었다. 그것들은 시장통에서 간간히 들리는 잠언처럼 약간은 부유하고 있는 상태다.
18세기의 느림에서 나오는 여유와, 20세기의 빠름에서 나오는 갖가지 증상들을 대비시켜놓았다는 것은 ‘아마도’ 틀림없다. 그 20세기의 증상들은 베르크, 벵상, 체코 학자 등을 통해 대표되는데, 이야기의 끝으로 갈수록 그들을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조롱한다. 속도에서 얻어지는 양적 획득을 자랑하듯이. 속도와 양적 획득은 쿤데라가 표현한 춤꾼에 다름 아니다.
속도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은 바로 느림과 기억 사이, 빠름과 망각 사이에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는 정의다.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정도에 정비례한다. 즉, 기억에 골똘하면 할수록 걸음은 느려지고, 망각하려 하면 할수록 점점 빨라지려 한다는 것이다. 이를 거꾸로 놓고 보자면, 느려지면 느려질수록 기억이 잘 나고 과거에 머물러 있게 되고,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훨씬 빨리 잊혀지고 과거는 금세 지나가버린다. 빠른 속도에서는 그 속도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야 하므로 뭐든 빨리 잊혀질 거 같긴 하다.
난 속도감을 즐기지 않는다. 난 느릿느릿 가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지난 일을 빨리 잊어버리지 못한다. 추억이라 이름이 붙여져버린 기억들은 자꾸 끄집어내어 반추하며 기억에서 신경으로 신경에서 감정으로 전이시키곤 한다. 그렇다고 느림을 거부하고 싶지도 않다. 또한 추억을 반추하며 쓸데없이 손발을 저려하는 일도 썩 내키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뛴다. 너무 빠르지 않으면서도 뜀박질로 긴장하는 내 육체에 온 신경이 집중하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