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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의 무덤
노사카 아키유키 지음, 서혜영 옮김, 타카하타 이사오 그림 / 다우출판사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序
그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반딧불이 날아다니고, 풀벌레가 우는 여름밤을,
주렁주렁 매달린 청포도 단내와 청명한 바람의 기분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봄 햇살이 닿아 곱게 홍조 띤 볼을,
한여름 나무그늘 밑에서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사실을.
이 과정이 무수히 반복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것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나도 어릴 적 순수한 꿈이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아직 아름답고 순수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손바닥에 전해지던 심장의 두근거리는 느낌을...
本
1945년 9월 22일 세이타는 죽었다. 산노미야 역 구내 기둥에 구부정하게 기대 앉은 채로.
오늘이 며칠이지? 며칠일까, 얼마나 지난 걸까, 열심히 생각해 본다. 계속해서 며칠일까? 며칠일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세이타는 죽었다.
세이타의 품 속에 있던 알사탕통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여동생 세츠코의 하얀 뼈였다. 뚜껑이 열린 통에서 하얀 가루가 쏟아지고, 그 속에서 작은 뼛조각 세 개가 굴러나왔다.
B29의 공습을 받아 마을이 몽땅 타버렸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투기 편대들은 마치 구름 사이를 떼지어 누비는 물고기처럼 보였다.
세이타는 먹을거리들을 숨기고 나서, 세츠코를 등에 업었다. 소이탄이 지붕에 떨어졌고, 갑자기 모퉁이집 이층 창에서 연기가 뿜어나왔다. 세이타는 바다 쪽으로 달렸다.
세이타는 세츠코를 안고 제방 구덩이 안에 몸을 숨겼다. “엄마, 어디 갔어?” “방공호에 가 계셔.” “몸은 괜찬니? 세츠코?” “나막신이 하나 없어졌어.” “오빠가 사 줄게. 더 좋은 걸로.”
언덕의 불탄 자리에서 아스라이 연기가 뿜어나왔다. “이제 두건 벗어도 돼” 하며 세츠코의 얼굴을 보니 그을음으로 온통 새까맣다. “엄만 어떻게 됐어?” 세츠코를 운동장에 둔 채 학교 양호실로 뛰어갔다. 어머니는 상반신을 붕대로 둘둘 감은데다 두 팔 역시 붕대로 감겨 있는 게 꼭 야구방망이 같았다. “이 반지, 지갑에 넣어 둬.” 세츠코가 엄마의 반지를 받아 똑딱 지갑에 넣는다.
밤이 되면 우거진 수풀에는 나뭇잎마다 하나씩 반딧불이가 반짝거려, 손을 뻗으면 그대로 손가락 안으로 빛이 옮겨왔다. “바다에 가 볼까?” 세츠코의 심한 땀띠를 바닷물로 닦아주면 나을 거다 싶어 물어본다. 새삼 보는 세츠코의 알몸, 아버지를 닮아 피부가 희다. 세츠코는 밥상이 없어 바닥에 그냥 늘어놓은 밥그릇을 앞에 두고서도, 집에서 가르친 대로 정좌를 하고 먹었다.
“집에 가고 싶어. 아줌마네는 싫어.” 그저 방공호 굴일 뿐인데도 세츠코는 들떠서 여기 저기 뛰어다닌다. 칠흙 같은 어둠. 세이타는 반딧불이를 굴 속 모기장 안에 넣으면 좀 환해지지 않을까 하여 반딧불이를 잡아 넣었다. “반딧불이 무덤 만들어 주는 거야.” 다음 날 아침, 세츠코는 반딧불이의 죽은 잔해를 땅에 묻으면서, “엄마도 무덤에 들어갔지?” 한다. 세이타는 처음으로 눈물이 났다.
굶주림으로 세츠코는 점점 쇠약해져 갔다. 세츠코에게 먹이려고 고구마를 훔치다 들킨 세이타는 농부에게 사정했다. 폭탄이 떨어지는 동네 안으로 숨어든 세이타는 빈집에서 기모노를 훔쳤다.
세츠코는 며칠째 설사가 멈추지 않고 있었다. “배 고프니?” “응.” “뭐 먹고 싶니?” “튀김에, 생선회에, 우무.” 인형을 안고 깜빡깜빡 잠이 드는 세츠코. 세츠코의 머리를 단정히 해 주자, 새삼 눈 밑이 푹 파인 것이 세이타의 눈에 박힌다.
...
세츠코가 죽었다. 밤이 되자 폭풍우가 몰아닥쳤다. 세이타는 캄캄한 굴 속에 웅크리고 앉아, 이미 식어버린 세츠코의 이마에 자기 뺨을 갖다 댔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어린아이니까, 절 구석 같은 델 빌려서 태워달라거라. 발가벗겨서 말야. 콩깍지로 불울 붙이면 잘 타올라.” 불은 밤이 으슥해져서야 사그라졌고, 뼈를 줍기에는 이미 너무 어두웠다. 주변은 엄청난 반딧불이 무리. 반딧불이를 보면 세츠코도 외롭지 않겠지. 세츠코야, 반딧불이와 함께 천국에 가거라.
結
전쟁으로 죽어가는 죄 없는 아이들의 참상을 리얼하게 그린 가슴 뭉클한 이야기. 지브리 스튜디오가 만든 애니메이션에는 보다 가슴 아픈 장면과 효과가 들어 있을 것이다. 이사오가 연출하는 영상미와 리얼리즘에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 포화 속 아이들의 비명을 정당화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미국의 B29가 마을을 폭격해서 불바다로 만든 것처럼, 일본의 급강하 폭격기가 다른 나라를 불바다로 만든 사실을. 역사적 진실이 빠진 반쪽짜리 가슴 뭉클한 이야기다. 애니메이션의 스틸 컷 하나와 같다. 나오키상은 아키유키의 문체를 유심히 살폈나보다. 일본의 아이와 어른들은 이 이야기를 접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 반전, 그뿐일까. 전쟁, 그리고 B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