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44

...남들이야 뭐라든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역사가 되지는 않을 일이었다.

 ....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두 발을 땅에 굳게 딛고 버티기만 해보자고 결심했다. 멈춰 있으려 해도 어차피 시간은 가줄 테니 말이다. 살아남을 수 있을지 막막할 때는 지금 이 순간만 잘 견뎌내보자고 스스로 다독였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눈앞이 캄캄할 때는 앞이 아니라 발밑의 땅을 보고 걷는 것이 낫다.

......

 나는 별로 내세울 것 없이 그저 오늘 주어진 몫을 그럭저럭 해내는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잘 해내지 못하면 큰 일이 나는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성취에 목매지 않고 훌륭함과는 거리가 먼 오늘, 기본만 하고 살아도 충분히 바쁘고 충만하다. 이만하면 됐지 싶다.

p54

 ...우리는 이제 자신의 생각과 주관을 바꿀 힘이 있는 다 자란 성인이다. 마음속 편견을 없애기 위한 개인적인 노력을 우리가 충분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닐가.

......

......

... 인간으로 살아 있는 한 마음의 문제는 몸의 문제만큼 흔하고 언제든 생길 수 있다. 특히 코로나로 전 세계가 고통받는 요즘 같은 때에 심리적인 어려움이 전혀 없이 잘 살고 있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이 더 걱정스럽다. 몸의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숨기고 감출수록 치료는 어렵고 힘들다. 안전한 공간에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 나의 내밀한 상처를 내보이는 것에서부터 치유는 시작되어야 한다. 상처는 숨길 수록 곪는다.

 p71

 꿈꾸는 삶은 살아가는 많은 방식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꿈꾸는 법을 안다면 꿈을 수정하거나 내려놓는 법도 함께 알아야 한다. 언제 꿈을 꾸고 바꾸고 내려놓을지는 우리 각자가 모두 다르다. 꿈을 위해 달리다가 멈추어야 하는 시점 또는 멈추고 싶은 시점은 내 삶의 주인인 내가 가장 잘 안다. 그 누구도 당신에게 왜 더 큰 꿈을 꾸지 않느냐고, 왜 꿈을 포기하느냐고 훈계할 수 없다.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 없다면 왜 그런지도 고민해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쓰며 그 굴레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인지, 꿈을 내려놓았을 때 누군가를 실망시킬까 봐 걱정되는지, 꿈꾸지 않는 삶이 초라하다고 믿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현재를 잘 사는 것은 원대한 미래의 꿈을 품는 것만큼이나 험난하고 위대하다. 꿈꾸는 삶은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으로부터 추진력을 얻지만, 현재에 집중하는 삶은 그와 같은 원동력이 없다. 그래서 현재에 집중하는 평범한 일상에는 더 많은 고민과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평범한 일상이란 밋밋하고 지루한 삶이 아니다. 지금 내가 맡은 일을 언제나처럼 충실히 하고 건강과 안녕을 돌보며 내 곁의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면서 사는 삶이다. 자극적이거나 드라마틱하진 않지만 은은하고 담백하며 삶의 의미와 크고 작은 행복을 발견하며 사는 안정된 시간이다. 그리고 꿈보다는 의미를 좇는 삶이 낫다. 꿈이 손가락마디만 한 비좁은 칸에 장래희망을 적는 것이라면, 의미는 커다란 종이 한 장에 내가 어떤 어른이 되고 싶고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며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넉넉하게 적어보는 것이다.

p110

 잃어가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지금 내 곁에 있는 존재들이 고맙고 애틋해진다. 나의 죽음을 생각한다면 내 삶을 한 번쯤 더 돌아보고 남은 삶을 의미 있는 순간으로 채워갈 의지를 품어보게 된다. 결국 덜 아픈 이별을 위해 나의 현재에 집중하고 지금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잘하고 있는 것이다.

p121

...이대로도 괜찮다면 삶의 질은 유지되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살 만한 삶인지에 대한 대답은 각자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도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정답도 오답도 없고 나다운 대답만 있다. 치료의 부작용이 너무 심하다면 부작용을 치료하게 돕고, 통증 때문에 살아갈 힘을 잃었다면 더 잘 반응하는 진통제를 처방하기 위해 고심하고, 몸의 통제력을 잃어 고통스럽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하고 따뜻한 노을빛을 즐기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지 생각해보도록 하고, 스스로도 알아보지 못하는 삶이라면 그저 당신이 살아만 있기를 바라는 가족을 위해 삶을 유지할 순 없는지 묻는다. 고통 속에서도 살아갈 만한 삶인지 생각해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p126

 이대로 회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삶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나요?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신체 기능은 무엇인가?

 지금 가지고 있는 불편함을 다 해결할 수 없다면 무엇을 먼저 해결하고 싶나요?

 죽기 전에 꼭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나요?

 어떤 치료를 마저 받고 싶으며 그 치료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요?

 어디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나요? 집이어야 하나요, 병원이어도 괜찮은가요?

p129

...태어난 이상 삶을 시작하는 고통, 살아가는 고통, 죽어가는 고통을 피할 수는 없지만 완화시킬 수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이란 그저 덜 고통스러운 삶, 덜 고통스러운 죽음일지도 모른다.

p132

 의료에서의 무의미함에는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생리적인 무의미함이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에게 박테리아 치료제인 항생제를 쓴다거나 암 치료를 위해 아스피린을 쓰는 등 효과가 없는 치료를 하는 예가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는 양적인 무의미함이다. 어떤 의료 행위가 환자에게 이득을 가져다줄 가능성이 1퍼센트 이하로 매우 희박할 때 의료 행위를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는 경우다. 세 번재는 질적인 무의미함이다. 이것은 의료 행위를 통해서 얻는 이득이 있다고 해도 그 이득이 질적으로 매우 낮은 경우를 뜻한다....어떤 치료의 결과가 환자가 원했던 치료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부합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무의미한 치료라고 볼 수 있다. 생리적 또는 양적 무의미함과 달리 어떤 의료 행위가 질적으로 무의미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에는 표준화됟고 모두의 동의를 얻은 일반화된 규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p139

 ...의사는 환자의 삶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결정권자가 아니라 환자가 최선의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의사결정을 돕고 그에 맞는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다.

 "환자의 병을 치료하는 일이나 고통을 줄여주는 일은 종종 가능하지만, 환자를 편안하게 만드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

 1800년대에 활동했던 미국의 의사 에드워드 트뤼도의 말이다. 무의미한 치료는 있지만 무의미한 돌봄은 없다. 완치를 위한 치료를 멈춘 순간에도 환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있다.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줄어든다고 느낄 대 우리는 치료의 목적과 삶의 질에 관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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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지켜볼 용기

더 좋은 선택은 후회없는 선택, 내 삶을 들여다볼 용기.

죽음 앞의 변화들이 무섭거나 두려운 것이 아니며 어떤 종류의 실패도 아니고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과정이다.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인지 삶의 마지막에서 어떤 후회가 남을 것인지 돌아보고, 삶의 우선 순위 재정비하는 과정 통해 실존적 절망감 해소.

- 부모님의 부모님

죽음 그 자체보다도 제대로 끝맺지 못한 삶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이 선생님의 어머니처럼 나도 아이를 그대로 안을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지 하고 다시 다짐한다.

- 초보자를 위한 죽음 안내서

잡동사니 정리, 관계 정리

- 끝내 전하지 못한 말

마지막 대화, 정리 없는 갑작스러운 이별은 살아남은 이들의 마음에 씻기 힘든 생채기 남길 수 있다.

용서해줘, 용서할게, 고마워, 사랑해.

- 사랑의 크기, 애도의 무게

각각의 상실이 주는 고통의 크기는 지극히 개인적.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우리가 활용하는 마음의 도구(방어기제, 스트레스 극복기술)도 각자 다르다.

각자가 겪는 상실감의 무게와 크기 비교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큰 상실은 '내가 겪는 상실'이고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은 '나의 고통'.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 순서도 없고 다시 겪을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만 경험하기도 한다.

죽음의 과정은 철저히 개별적이고 개인화되어 있다.

세상에 똑같은 삶도 똑같은 죽음도 없다.

감정을 표현하지 모하면 신체가 감정을 통재로 삼켜서 담아내버리게 된다.

내 마음의 상채를 언어로 표현해 낼 수 있으면 자기조절감이 커진다.

상실이 가져다준 삶의 의미 깨달을 수 있으면 상실의 고통이 조금 줄어들 수도 있다.

바닥을 딛고 일어나기인가.

제 3장 아프고 힘들어도 그래도 삶

- 고통이란 무엇인가

삶에도 분산투자가 필요하다.

건강한 자아정체감도 이거 아니면 안된다는 위험하다.

'인간은 고통으로 인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파괴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더 나은 지금을 위해 내가 할 수 있고 바꿀 만한 것은 있다. 그게 무엇인지 고민하고 내 삶을 더 나은 현재로 만드는 것은 모두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권리다.

- 생애 첫 정신과 방문을 앞둔 당신에게

'편견없는 중립적인 태도로 순수한 호기심을 가지고 대할 때 상대방은 안심하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 보여줄 수 있다.'

의사의 자세, 환자의 자세 모두 알 수 있다

- 어느 청년 암 환자의 이야기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리면 더 힘들수도.

그치만 꼭 암이 아니라도 삶은 원래 외롭고 억울한 것.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나에게 어쩌다 일어난 것이다.

- 치료가 끝난 다음의 삶

여전히 나와 내 선택을 믿고 나답게 회복하기, 다시 삶을 살기.

이게 꼭 암에서 회복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타인의 삶을 다 알거나 이해하지 못하면서 나의 잣대로만 평가하고 판단하지 말 길.

"다 잘될거야'주의 바라는대로 현실이 흘러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인정하고 상황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그 시간 함게 견디겠다는 메시지 주는 것이 낫다.

< 완치될 수 없는 병과 함께 사는 사람들>

남들보다 조금 더 복잡하고 까다로운 삶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당신의 삶이다.

어쩌면 모든 삶이 그 개개인에게는 어던 식으로든 복잡하고 까다로울 것이겠지.

<당신 인생의 필연적 결말>

불치의 병이 삶의 일부가 되어버려도 삶의 전체는 아니다. 매순간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헌팅턴 병은 참 슬프구나.

<플라이셔의 세상을 바꾸는 힘>

길 위의 정신의학, 이런 의사가 있구나.

자신이 처한 현재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하고, 현재를 더 나은 내일로 바꾸려는 노력하기

<일론 머스크는 행복할까>

어떤 결과가 주어졌든 '이게 최선이었어'라는 자기 확신, 자기 합리화가 행복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한 태도, 회복탄력성, 자기주도권.

나와 다른 사람의 삶을 비교하지 않는데서 행복 시작된다.

오늘 나를 사랑하고 나의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사랑을 전하고 내일 펼쳐질 나의 하루도 괜찮을 거라고 믿어보자.

<악몽같은 현재를 살고 있다면>

실존적 고통을 잊기 위한 코마 유도- '고통완화 목적의 진정'

삶을 의미있는 시간들로 채워가기.

<너와 나를 돕는 위로의 기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현재를 사는 법 배우기.

진단받은 후의 절망, 불안 인정하기.

검색도 인정, 알고 싶을테니까. 할 수 있는게 그것 밖에 없으니까. 너무 믿지 말 것.

살던 대로 살기로 하는 재닛.

"아무 일 없이도 사람은 변해"라는 재닛의 연인 마이클.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더 큰 두려움이 되지 않게 다독이기.

삶은 복잡하지만 살아가는 일은 간단하다.

나한테만 일어난 불행이라고 슬퍼하기에는 삶은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고 영원하지 않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슬퍼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것이 어차피 삶이다.

<곧 죽을 거지만 지금 죽고 싶어요>

우울할 만한 일이 있으면 우울해야 정상이다.

우울한 감정만으로 우울증 진단하지 않는다.

로고테라피. 삶의 의미

쇠약하고 기능하지 못하는 육체 겨우 나누며 건강한 자아존중감 가지는 건, 어려운 일이 맞다.

<에필로그. 삶과 죽음의 고통을 지나며 우리는 서로를 만났다>

삶은 고통, 행복하기 위해서 보다 조금 덜 불행하기 위해서

p8

...'삶이란 원래 이런 거지'하며 지금의 고통과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기를, 스스로를 용서하고 칭찬할 수 잇기를, 당신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지기를 소망한다.

p23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환자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하는 데 있다. 그 목적이 삶을 양적으로 연장하는데 맞추어져 있지 않을 뿐, 그렇다고 이 의료 서비스를 통해 환자의 생명이 단축된다는 서비스를 통해 환자의 수명이 단축된다는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 반대로 환자의 신체 상채에 대한 고려 없이 완치를 위한 치료를 지속했을 때 그 부작용으로 인해 오히려 더 빨리 사망하는 경우는 있다. 남은 삶이 6개월 이내라고 판단되어 호스피스 서비스가 시작되었는데, 적절한 돌봄을 받으면서 6개월을 훌쩍 넘어 생존하는 사람들도 있다. 삶의 질이 높아진다면 기대 수명을 넘어서 예상보다 더 오래 삶을 이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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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읽는 시간
이유진 지음 / 오티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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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시각, 연명치료에 대한 생각도 인상깊었지만 미국의대 공부하러 갔을 때 대학병원에 남지 않고(뭔가 대단한 길을 가려 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깊었다. 

입시생 자식이 있어서인가...

대학을 바라보며 서울 가야지.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지 원대한 꿈과 목표를 가져야지 작게는 대기업에 들어가야지 돈을 많이 벌어야지 들이 산재한 사회 분위기에서 소소한 일상, 지루한 안정을 추구하는 반백살 아줌에겐 이런저런 생각이 물론 개인의 선택이겠지만.

미국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가가 된 최초의 한국인 정신과의사.

<프롤로그, 삶에도 죽음에도 따뜻한 외투가 필요하다>

서른 네가지 다른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 본인의 이야기 .

조금 덜 고통스러운 삶과 조금 덜 두려운 죽음. 어떻게 준비되는 것인지 생각해보는 마음 가질 수 있기를.

제 1장. 죽음을 공부하는 의사

- 혀를 잃은 남자.

정신종양학을 미국에서 시작하게 한 환자와의 경험.

- 호스피스의사가 되어볼까

호스피스 완화 치료를 세부전공으로.

완치를 위한 치료가 모두 끝나는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 완화 의료.

우리나라는 내과, 가정의학과 출신들이 세부전공하지만 미국은 모든 과 출신이 할 수 있다.

좋은 삶에 대해 더 깊이 알기 위해서 죽음에 대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단다.

-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삶의 결정권 가지고 주체적으로 살아야 하는데, 나를 알아야 나를 행복하게 하는 법도 알고 내가 행복해야 타인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삶의 모든 순간에서 타인이 아니라 내가 먼저다.

- 미국에서 다시 의사가 되다

당연히 쉽지 않았겠지. 그래도 자기 선택에 책임지고 끝까지 버텨낸 선생님 대단하다.

오늘 주어진 몫 그럭저럭 해내는 삶. 사랑하는 법 나도 배워야겠다.

- 정신과 약을 먹는 의사들

아픈 건 잘못이 아니다. 안전하게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

-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감정은 무의식과 닿아 있어서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행동의 변화 가져온다.

암이 삶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하고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견딜 만하게 낮추고 여전히 웃고 일상의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정신종양학 존재한다.

- 꿈꾸지 않는 우리

과대평가된 꿈의 중요성, 삶의 의미. 내게 주어진 삶, 나를 사랑하는 일

-의사 K의 죽음

일이 삶의 전부인 사람에게 일이 잘못되면 삶 전체가 사라진다. 일은 삶의 일부일 뿐인데...

- 당신이 '함께'여야만 하는 이유

행복한 인간관계가 필요하다.

- 거울 속에 사는 낯선 노인

안 늙을 방법 말고 어떻게 늙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행복하고 건강한 노년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타인과 얼마나 만족스러운 인간관계 맺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살아온 시간에 대한 후회가 많을수록 외모의 변화에 더 집착하게 된다.

- 덜 아픈 이별, 가능할까요

성숙한 방어기제(승화, 이타주의, 유머, 억제)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성인에게 가능하다.

1. 기억하는 한 잃는 게 아니다.

2. 내가 그리워하는 방식대로 상대가 나를 그리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파하지는 말자

3. 지금 충분히하고 있다

지금 이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을 것. 상실감을 살아있는 한 평생 겪어내야 하는 예외없는 아픔이다.

제2장. 남은 삶이 단 하루라도 후회없이 살기 위하여

-이제 치료는 그만 받겠습니다.

나다운 삶, 나다운 죽음. 죽음이 아니라 삶다운 삶

- 지금, 살 만한 삶인가요

의료의 목적이 병의 완치가 아니라 고통의 완화로 바뀌는 시점

의료의 줓체가 병이 아닌 사람이 된다. 삶의 양이 아니라 질 추구. 삶의 결정권, 삶의 질. 

치료의 목표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본인다운 선택할 수 있도록 도울 것 태어난 이상 삶을 시작하는 고통, 살아가는 고통, 죽어가는 고통 피할 수는 없지만 완화 시킬 수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이란 그저 덜 고통스러운 삶, 덜 고통스러운 죽음일지도 모른다.

- 무의미한 치료는 있지만

무의미한 돌봄은 없다.

환자는 식사를 못해서 사망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식사를 어렵게 만든 질병으로 인해 사망하는 것이다. 굶어죽지는 않아야 한다고 삽인하는 관. 우리나라 요양병원...

- 의사가 나쁜 소식을 전하는 방법

미국은 효과없는 진료는 중단하는게 분위기인듯

치료법이 없다는 소식을 전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환자가 살아갈 의미를 찾고 남은 생이 살아 있고 싶은 시간일 수 있게 돕는 것이 의사의 역할 .

숨기는데 시간과 노력 쓰기보다 현실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기.

정확한 정보를 당사자에게 알려주어 마지막까지 자기 삶의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기

- 언제 어떻게 죽을지 내가 결정하겠습니다.

존엄사, 안락사

환자에게 해를 끼치는 의료행위를 안한다? 의미.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는 내가 살아온 시간이 결정한다.

다른 삶이 있을 뿐 틀린 삶은 없든 틀린 죽음도 없다. 그저 태어남과 동시에 결정된 피할 수 없는 과정인 죽음, 자기답게.

- 죽음을 앞둔 이들과의 대화.

생각해보면 주체가 내가 아니다.

내 감정, 내 상황, 내 기분을 강요하지 말자.  

어쩌면 사랑이랑 비슷할 듯. 사랑하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걸 해줘야 하는 것처럼.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일 듯(한평생 자기 위주인 엄마에게 시달려 온 반작용일 수도 있지만, 노년기의 우울을 내게 강요한다. 본인의 감정을 강제로 전이시키려고 하고...솔직히 벌써 두렵다. 얼마나 강도가 셀까...

그래서 난 더 냉정함을 뒤집어 쓰는 듯. 난 그냥 삶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즐기고 사랑하고 싶은데...

죽음이 에고되었다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 의미가 되어주었던 이들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남겨질 이들에 대한 배려,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도 삶을 사랑하는 방법 생각할 것.

-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죽음의 공포를 통해 내게 주어진 현재를 잘 살고 있는지 돌아볼 것.

나다운 삶을 창의적으로 만들어가며 살 실존적 의무있다.

그저 살아갈 요기.

삶을 사랑하고 후회없이 살다가 언제일지 모를 끝을 끌어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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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이해할 수 없다면 마음을 열어라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무지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배우고 탐구하려는 자세 필요하다.

48. 변화이 바람 속에서도 나아가라.

"시간의 변덕에 따라 변하는 정의는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라.

불확실성과 불공정성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

49.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혜는 어린 시절로의 회귀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 호기심, 단순함.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 현재에 집중하는 태도.

50.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진실을 알려야 한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듣는 이에게는 유익하지만 말하는 이에게는 미움을 살 수 있어 불리하다."

51.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소통을 하라.

"모든 사람이 서로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진정한 친구는 거의 남지 않을 것이다."

비판보다 긍정적인 소통이 필요하다.

52. 우리는 자신을 위장한다.

"우리는 거짓, 이중성, 모순일 뿐이며 우리 자신을 숨기고 위장한다."

거짓과 이중성을 버리고 진정한 자신을 인정하라.

part4. 인간의 마음에는 타인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53. 자존감은 과시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좋게 생각하길 원한다면, 스스로에 대해 좋은 말을 하지 마라"

54. 호기심은 위험하기도 하나 그것을 잃어서는 안된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과도한 호기심이지만 그 호기심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55. 참된 종교는 인생을 가르친다.

"참된 종교는 위대함과 비참함을 가르쳐야 하고, 자존감과 자기경멸, 사랑과 증오를 불러 일으킨다."

56. 일단 시작하고 지속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라.

"작업을 마칠 때 비로소 시작할 때 무엇을 해야 했는지 알게 된다."

초심 잃지 말고 일단 계속 가기 실패하고 자절하고 배우면 된다.

57. 삶의 모든 면을 살펴봐야 한다.

"모든 행동에서 우리는 그 행동의 과거, 현재, 미래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행동의 결과를 넘어 과거와 미래에 미치는 영향 생각할 것.

개인적이고 짧은 시간적 효과 넘어 장기적인 사회적 결과 고려해야 한다.

58. 친구라는 존재의 가치 잊어서는 안된다.

"진정한 친구는 없는 자리에서도 지지하므로 군주에게 큰 이익이 된다. 군주는 이런 친구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군주만이 아니겠지.

친구는 신뢰와 지지 통해 서로의 성장을 촉진한다.

59. 인간은 자존심을 통해 고난을 극복한다.

"인간은 자존심을 통해 고난을 이겨내며이는 자존심이 정신적 보호막이기 때문이다.

고난을 숨기거나 드러내는 방식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고난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부심을 느끼고, 이를 토해 나아가는 것 자존감은 인간실현의 필수 요소이다.

60. 명예의 매력을 경계해야 한다.

"명예의 매력은 커서 우리는 그것이 있으면 죽음까지도 좋아한다."

명예도 인간적 가치와 도덕적 선택 안에서 추구해야.....

61. 성공을 소유물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일부 작가들이 작품을 '내책''내 논평'이라 자랑하는 것은 부르주아들이 집을 자랑하는 것과 같다."

집 자랑하면 안되나? 안되겠구나...

마음의 평안을 잃고 더 많은 욕망에 시달리지 않아야 되니까.

62.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경험해야 한다.

"두개의 무한평균, 너무 빨리 읽거나 너무 느리게 읽으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삶의 목적은 분명히 하고, 긴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에 시간투자할 것. 

속도의 균형 유지하면서 깊이 있는 삶 살아가는 방법? 알게 되겠지...

삶의 속도 조절하면서 깊이 있는 경험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과 성공 가져다 준다.

'무한'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의 무한함. 실질적으로 의미있는지 파악하고 처리하는 것이 중요.

'평균' 정보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적절한 속도와 깊이.

삶의 의미와 가치 찾을 수 있는 나만의 속도는?

나는 느리게 가도 원하는 걸 할 수 있으면 된다는 ...언젠가는 도착한다는.

63. 유연하게 흐름을 관찰하라.

"우리는 강가 위에 앉아 겸손하고 안전하게 있어야 한다."

64.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으나 다양한 측면을 돌아볼 수는 있다.

"모든 것을 조금씩 아는 것이 하나를 깊이 아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다."

65. 마주하는 모든 길을 조심히 걸어야 한다.

"모든 것은 치명적일 수 있다. 조심하지 않으면 벽이나 계단도 우리를 해칠 수 있다."

66. 사람을 머리가 없어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손, 발, 머리가 없는 사람은 상상할 수 있지만 생각이 없는 사람은 돌이나 동물과 같을 것이다."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사유와 감정, 윤리적 선택.

67. 삶의 모순과 대립을 모두 그려내라.

"좋은 초상화와 좋은 작품 해석은 모든 모순된 요소들을 조화시켜야 완성된다."

다양성과 모순을 조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이해와 성장의 핵심이다.

우리는 모두 모순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p6

 결론적으로,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는 깊은 철학적 통찰과 삶의 지혜를 제공하며, 자기 이해와 성찰, 지적 성장, 감정과 이성의 균형, 윤리적 성찰에 큰 도움을 줍니다. 또한 독자가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더 높은 진리를 추구하며, 자신의 삶을 더 깊이 성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파스칼의 글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의미를 지니며,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p9

...현대인에게 인생의 지침 및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67개의 대표 구절을 선택하여 "인간의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더 성숙해질 수 있다.", "인간의 삶은 불완전하고 모순적이다", "인간 불행의 대부분은 혼자 있지 못하는 데서 왔다", "인간의 마음에는 타인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4개의 주제로 분류하여, <팡세>의 불어 원문과 함께 인간의 심리를 해부할 수 있는 쉬운 해설을 덧붙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연 설명이 필요한 꼭지에 대해서는 "사례"형태로 서두에 설명을 추가하였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천재 인문학자 파스칼의 생각 및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얻을 것입니다.

p20

 파스칼은 천사가 되려는 자가 오히려 짐승이 된다고 경고합니다. 이는 인간이 지나치게 완벽하고 이상적인 존재가 되려고 할 때, 오히려 본래의 인간성을 잃고 비인간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도덕적 완벽주의를 추구하며 자신이나 타인에게 비현실적인 기대를 강요하는 사람은 종종 타인을 비난하거나 자신을 비하합니다. 이는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증가시킵니다.

 즉 천사와 짐승 사이의 존재로서 인간은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존재로서의 이상을 추구해야 하지만, 동시에 한계와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자신과 타인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보다는 인간의 본성과 한계를 이해하고 서로 포용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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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24  

 세상에 하나뿐인 나는 수많은 하나뿐인 나들의 하나일 뿐이다. 모두가 특별하다는 것은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과 같다. 더구나 지금은 이런 하나일 뿐인 특별한 내가 세상과 홀로 마주해야 한다. 근대 이전에는 가족(혈연)이나 마을(지연)같은 공동체를 매개로, 근대이후에는 협동조합 같은 결사체를 매개로 세상과 관계했다면, 지금처럼 공동체가 무너지고 결사체가 취약해진 상황에서는 나 혼자 세상과 마주해야 한다.

 p226

...민주주의의 다수결이 위험한 이유는 다수의 주장을 소수에게 강요해서가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다수의 주장에 대해 소수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에는 사람들을 '선량한 다수'와 '고독한 소수'로 나누어 대립을 부추긴다는 데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팬덤 정치'가 유행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이런 고독한 소수가 자기들 나름의 탈출구를 찾으려 한데 그 원인이 있다.

 배타주의는 이런 민주주의 내부적 취약성이 밖으로 굴절되면서 자행되는 행태다. 고독하고 불안한 개인은 어떤 집단과 자신을 쉽게 동일시하고, 불안의 요인이 실은 다른 데 있음에도 특정 집단에 그 원인을 돌려 자기들 불안을 해소하려 든다. 인터넷을 떠도는 각종 악성 댓글들, 성 정체성. 성적 지향. 장애. 생각(사상)의 차이에 대한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발언들, 도쿄 한복판에서 자행되는 한국인. 조선인을 향한 헤이트 스피치와 걸핏하면 들고나오는 한국 사회에서의 반일 선동, 트럼프 시대 미국의 국경 장벽 설치와 유럽 일부 국가들의 이민 규제 강화 등은 모두 그 이면에 고독한 개개인의 불안이 있고, 이런 불안이 왜곡돼 드러난 집단적 배설이다.

p228

 어쨌든 개개인의 마음을 지배하던 두려움과 우러러봄의 대상을 마음 밖으로 끄집어내고 나면, 이제 남는 것은 자기 마음뿐이다. 과거에는 나를 괴롭히는 감정의 대부분이 미지의 외부에서 왔다면, 지금은 내 마음에서 비롯된 내 감정이 나를 괴롭힌다. 이는 개인화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불안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관점이다. 똑같은 불안일지라도 과거의 두려움이 미지의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들 마음의 반응이었다면, 그 어느 때보다 세상을 잘 알게 된 지금의 두려움은 나 자신에 대한 내 마음의 반응이다. 이런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면 지금의 불안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진정으로 해결할 수도 없다.

 만약 관계의 단절 때문에 정말로 불안을 느낀다면, 이는 관계 회복을 통해 어떻게든 해소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관계를 가볍게 봐서가 아니라 관계 회복을 통해 불안이 해소될 거라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고독과 불안에 휩싸인 이들에게 정신과 의사들이 왜 SNS를 중단하라고 권유하는지 그 이유를 되ㅐ길 필요가 있다. 이 시대의 불안은 세상과 혼자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에 느길 수밖에 없게 된 피동적인 감정이라기보다, 혼자인 것을 즐기며 살아갈 힘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생겨나는 자기 내면의 감정이다. 다른 이와 비교해서 내가 실제로 못나서라기보다, 한 인간으로서 자기 가치를 충분히 발견하지 못하고 잇다고 느끼기 때문에 생겨난 내 안에서의 감정이다.

 가령, 요즘 유행하는 SNS를 예로 들어보자. 미학적으로 볼 때 SNS는 근대 이전의 창작활동과는 크게 다르다. 우선 미 즉 아름다움의 대상이 근대 이전에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화려한 별천지였는데, SNS에서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일상으로 바뀌었다. 아름다움의 표현방식 또한 근대 이전에는 화려함과 추함,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과도한 대비로써 그려졌는데, 지금의 SNS에서ㅓ는 소소한 자기 일상의 담담한 반복으로 바뀌었다. 나아가 근대 이전까지는 귀족이나 성직자, 그들에게 봉사하는 전문 예술가에게만 국한되어 있던 아름다움의 표현 주제가 SNS에서는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무상으로 제공되는 각종 웹사이트를 화선지 삼아 모두가 "소소한 일상의 담담한 변주곡"을 그려낼 수 있게 된 것이 지금의 SNS다.

 이는 분명 지난 근대화가 안겨준 커다란 선물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런 선물이 정작 그 수혜자들에게는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신분제가 무너지고 누구나 자기표현이 가능하게 된 것은 분명 좋은 징조다. ...다른 이의 자기표현을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나 손십게 자기표현이 가능하게 된 것도 분명 행복한 소식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다지 재밌지도 않은 내 소소한 일상을 들어주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내 작품을 누군가는 봐줘야 작품을 내놓은 내 마음이 충만해질 텐데, 현실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누구나 평등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담한 무관심과 그에 따른 짜증뿐이다.

 무관심에 따른 짜증은 어떤 면에서는 마음의 해방에 따른 불안과도 상통한다. 모두가 "소소한 일상의 담담한 변주곡"을 그려낼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짜증을 얻었다. 모두가 미지의 외부 세게에 대한 두려움과 우러러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불안을 얻었다.

 만약 우리가 "소소한 일상의 담담한 변주곡"을 그려내더라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자체에 더 큰 즐거움을 두었다면, 아마도 짜증 따위는 처음부터 생겨나지 않거나 생겨나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두려움과 우러러봄에서 해방되었더라도 이를 불러온 내 마음의 조감도를 좀더 세심히 살폈더라면, 아마도 지금의 불안 따위는 처음부터 생겨나지 않았거나 생겨나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과 우러러봄이 지금 그 모습을 바꿔 불안으로 되돌아오고 있고, 무관심으로 인한 짜증이 전문 예술가를 넘어 지금 우리 모두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p235

 어떤 이가 주체가 되어 만들어온 것이 점점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 급기야는 그를 지배하게 되는 것, 이를 가리켜 우리는 보통 '소외'라 부른다.

 소외는 단지 '신과 인간 사이'(포이에르바흐)'상품과 노동자 사이'(마르크스)에서만 잇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모든 생명체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주어와 목적어의 전도된 모습으로서 항상 발생한다. 다른 생명체와 비교해서 인간이 특히 소외에 민감한 이유는, 단지 자타를 식별하는 의식 능력이 탁월하게 발달한 만큼 자기가 만들어온 대상에 대한 소유욕도 다른 생명체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사상가 요시모토 역시 모든 생명체의 공통적 특징으로 소외를 들어ㅓㅆ다.

 ......

 요시모토에 따르면 소외는 낯섦이다. 실제로 독이러 '소외(Entfremdung)'도 본래는 이런 뜻이다. 그 낯섦이 일차적인 감각기관을 통한 것이든 이차적인 의식작용에 따른 것이든 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기를 감지하고, 따라서 자기와는 다른 대상에게서 어떤 낯섦을 감지할 능력을 지녔다는 것 자체가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가장 큰 위대함이다. 감지의 대상인 자연을 무기적이라고 단정한 것, 이런 낯섦을 생명이 부정할 거라고 단언한 것 빼고는 생명의 본질을 꿰뚫은 탁월한 통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p242

 자기 안의 것을 자기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외화'라 부른다. 외화와 소외를 동일시한 헤겔에 따르면, 자연과 역사는 자기 안의 정신과 이념이 밖으로 드러나 바깥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신과 인간이 자기 안의 것을 밖으로 양도하고 처분한 결과로 신에 의해서는 자연이, 인간에 의해서는 역사와 문명이 정립된 것이다. 둘 사이에 굳이 차이가 있다면, 신은 혼자서 이루고 인간은 공동으로 이루었다는 것, 신이 먼저 이루고 인간은 이를 모방해 이루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인간이 소외의 길로 들어선 것은 신을 모방해 신처럼 역사와 문명을 창조하고자 햇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이런 소외는 어떻게 해야 넘어설 수 있을까? 소외는 과연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외는 소외한 것을 다시 자기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즉 '내화'함으로써 비로소 지양된다. 그리고 이런 외화와 내화의 반복, 즉 내 안의 것을 밖으로 드러내고 그 드러낸 것을 다시 내 안에 끌어들이는 행위는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p245 

 소외는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 아니다. 자연에 묻혀 자연과 하나되어 살아오던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연을 대상으로 역사와 문명을 만들면서부터 소외는 이미 시작되엇다. 그리고 이 소외는 실은 인간에 의한 자기 소외에 다름 아니다.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인간은 자연가 하나였던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소외의 지양도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옳다. 자연과 하나였던 나로 돌아가 지금의 나와 다시 대면하는 것이 지양의 시작이다. 안타깝지만 이런 소외(외화)한 것의 내화, 밖으로 드러낸 나를 다시 내 안에 끌어들이는 행위의 끊임없는 반복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싶다.

p252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석가모니불'이라 부른다. '석가'란 샤키야족 출신임을 가리키고, '모니'는 침묵의 수행자라는 뜻이며, '불'은 깨달음을 얻은 이를 말한다. 깨달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를 되돌아보는 데는 침묵만 한 것이 없다.

 달리 표현하자면 침묵은 소외(외화)한 나를 다시 내 안에 들이는 내화이고, 떨어져 나간 나의 귀환이기도 하다. 내가 낳고 기른 또 다른 나, 지금은 바깥에 떨어져 있어 낯설게만 느껴지는 나, 그런 나를 '타자적 존재'로 내 안에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고 귀환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타자적 존재'란 일단은 지금의 나와 구분해서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고, 이런 타자와 나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향해 일단은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관계 맺을지를 주체적으로 고민하지 않는 한, 다 자란 자식과 부모 사이의 소원한 관계가 해결되지 않는 것과 같다.

 침묻 다음으로 제안하는 것이 '자기표현'이다. 귀환한 나와 지금의 내가 만나 내 안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내가 태동한다. 이런 새로운 나를 말로써, 또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다시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자기표현이다.

 침묵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침묵을 통해 태동한 새로운 나를 말로 표현하고 관계 속에서 드러내야 나도 살고 협동조합도 되살아난다. 나아가 이렇게 새로이 태동한 내가 정말로 나인지를 확인하고, 또 한 번의 자기표현이 독선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다시 한번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또 한 번의 자기 표현은 '다시 외하'다. 협동조합에서 소외란 내가 외화한 내 말과 관계가 가짜 말과 관계로 전도되어 나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또 한 번의 자기표현은 이렇게 전도된 가짜 말과 관계르 내 안으로 내화해, 그것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나를 태동시키고, 이렇게 태동한 새로운 나를 말과 관계롯써 다시 외화하는 것이다.

 ......

 여기서 한 가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소외는 본래<외화-소외- 내화- 대화(갈등)-지양- 다시 외화>라는 역동적이고 자기 관계적인 과정의 일부다. 즉, 흔히 말하는 '소외 문제'는 실은 소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자기 관계적인 과정에서 벗어나 있는 소외로 인해 발생하는 무제다. 내가 낳고 기른 협동조합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 대상화되도 외재하게 된 게 문제가 아니라, 그 협동조합을 다시 내 안에 들여 비대상화하고 내화하지 않는 게 진짜 문제다.

 물론 대다수 좌파 진영 지식인들은 이와는 다르게 소외를 설명한다. 그들에 따르면 소외는 외재화하게 된 것이 아니라 외체화한 것이다.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 외부에 실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내 밖에서 실체가 있는 것으로 둔갑한 것이다. 덕분에 나 역시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세상을 잘못 이해해왔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이해로는 소외의 지양은커녕 폭력적인 투쟁만 부추긴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p256

 마음의 영역에서는 이 둘이 분명 대립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하나의 개념을 사고할 때, 그 개념은 보통 상반된 두 계기에 이해 성립된다.

 예를 들어 '동일'이라는 개념은 '이질'이라는 계기에 대한 '동질'이라는 계기의 작동에서 생겨난 것이고, '차별'역시 '평등'이라는 우리의 이상에 대해 '불평등'이라는 우리의 현실이 충돌하면서 생겨난 개념이다. 하나의 개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렇게 두 대립적으로 보이는 계기가 서로 얽혀 만들어지고, 한 계기는 다른 계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관계로 맺어져 있다.

 우리가 가장 고귀하게 여기는 '사랑'을 불교에서는 '애증'즉 '사랑과 미움'의 한 측면으로 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때문에 불교에서는 미움과 함게 사랑마저도 동시에 끊어내야만 비로소 절대 평등의 사랑 즉 부처의 자비에 이른다고 말한다.

아무튼 마음속에서는 이렇게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동시에 우리에게는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있고, 마음과 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운'도 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해서 비로소 우리의 '삶'이 된다.

 이런 삶에서 서로 다른 두 계기는 대립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하면서 공존한다. 마음속에서는 사랑과 미움이 서로 대립해 더 큰 사랑이나 미움이라는 '(지양적)통일'을 이룰지 몰라도, 실제 삶에서는 사랑과 미움이 '기우뚱한 균형'을 이루면서 우리는 산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하고, 미워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더구나 '(지양적)통일'은 우리의 삶에서 찰나에 불과할 뿐, '기우뚱한 균형'이 상시다. 이미 떨쳐버린 줄 알았던 사랑이나 미움이 다시 밀려오고, 하나의 업이 지나가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또 다른 업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런 상시적인 모습에서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찾아야지, 찰나적인 한 순간의 상태로 인간과 사회를 몰아가서야 되겠는가.

 ......

....새로운 나, 그 나를 또 한 번 자기표현하고 다시 외화하는 내화와 외화의 끊임없는 반복을, '진화'니 '진보'니 하는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시각이야말로 생명의 차이에 인간을 정점으로 하는 차별을 낳고, 마찬가지로 인간 집단 간의 폭력적인 갈등만을 부추기게 된다.

p263

... 지금까지의 협동조합이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여럿이 모여 '우리'를 형성해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우리'를 문제를 함게 해결해온 데 그 특징이 있었다면, 앞으로의 협동조합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의식을 가지고 나다움을 모색하는 속에서 그런 '나'들이 모여 '나와나'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협동조합이 독재정치와 금권정치에 맞서 민주주의를 추구해왓따면, 앞으로의 협동조합은 그 성과를 끌어안으면서도 민주주의의 본질에 훨씬 다가가느 '개인주의'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란 모든 책임을 개개인에게 떠넘기는 흔히 말하는 '개인주의'와 는 다른 것으로, 정치적으로는 "다수에 의한 통치"를 넘어 "주권을 가진 개인이 스스로 통치하는 것"을 말하고, 실천적으로는 "다수의 인간다울 권리를 획득하는 것"을 넘어 "존엄한 개개의 존재가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게 서로 돌보는 것"을 말한다.

p267

 역사는 방향을 정해놓고 그 방향으로 사람들을 몰아간다고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는 오히려 자기 감각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그 감각을 자연스럽게 모든 타자에게로 넓혀가는 것이 역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

 ......

 ...진정한 내 말이라면 다른 이의 내 말을 비하하거나 배제하지 않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마찰과 긴장은 오히려 나와 너를 되돌아볼 좋은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p269

 ...협동조합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본질을 통찰할 수 있는 것은, 협동조합이 아니라 실은 사람이다. 협동조합의 정체성은 실은 협동조합의 정체성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협동조합에 관한 정체성이다. '성정체성'은 내가 남자냐 여자냐, 혹은 그 이외의 다른 어떤 성이냐에 관한 자기동일성이지, 성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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