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24
세상에 하나뿐인 나는 수많은 하나뿐인 나들의 하나일 뿐이다. 모두가 특별하다는 것은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과 같다. 더구나 지금은 이런 하나일 뿐인 특별한 내가 세상과 홀로 마주해야 한다. 근대 이전에는 가족(혈연)이나 마을(지연)같은 공동체를 매개로, 근대이후에는 협동조합 같은 결사체를 매개로 세상과 관계했다면, 지금처럼 공동체가 무너지고 결사체가 취약해진 상황에서는 나 혼자 세상과 마주해야 한다.
p226
...민주주의의 다수결이 위험한 이유는 다수의 주장을 소수에게 강요해서가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다수의 주장에 대해 소수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에는 사람들을 '선량한 다수'와 '고독한 소수'로 나누어 대립을 부추긴다는 데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팬덤 정치'가 유행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이런 고독한 소수가 자기들 나름의 탈출구를 찾으려 한데 그 원인이 있다.
배타주의는 이런 민주주의 내부적 취약성이 밖으로 굴절되면서 자행되는 행태다. 고독하고 불안한 개인은 어떤 집단과 자신을 쉽게 동일시하고, 불안의 요인이 실은 다른 데 있음에도 특정 집단에 그 원인을 돌려 자기들 불안을 해소하려 든다. 인터넷을 떠도는 각종 악성 댓글들, 성 정체성. 성적 지향. 장애. 생각(사상)의 차이에 대한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발언들, 도쿄 한복판에서 자행되는 한국인. 조선인을 향한 헤이트 스피치와 걸핏하면 들고나오는 한국 사회에서의 반일 선동, 트럼프 시대 미국의 국경 장벽 설치와 유럽 일부 국가들의 이민 규제 강화 등은 모두 그 이면에 고독한 개개인의 불안이 있고, 이런 불안이 왜곡돼 드러난 집단적 배설이다.
p228
어쨌든 개개인의 마음을 지배하던 두려움과 우러러봄의 대상을 마음 밖으로 끄집어내고 나면, 이제 남는 것은 자기 마음뿐이다. 과거에는 나를 괴롭히는 감정의 대부분이 미지의 외부에서 왔다면, 지금은 내 마음에서 비롯된 내 감정이 나를 괴롭힌다. 이는 개인화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불안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관점이다. 똑같은 불안일지라도 과거의 두려움이 미지의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들 마음의 반응이었다면, 그 어느 때보다 세상을 잘 알게 된 지금의 두려움은 나 자신에 대한 내 마음의 반응이다. 이런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면 지금의 불안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진정으로 해결할 수도 없다.
만약 관계의 단절 때문에 정말로 불안을 느낀다면, 이는 관계 회복을 통해 어떻게든 해소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관계를 가볍게 봐서가 아니라 관계 회복을 통해 불안이 해소될 거라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고독과 불안에 휩싸인 이들에게 정신과 의사들이 왜 SNS를 중단하라고 권유하는지 그 이유를 되ㅐ길 필요가 있다. 이 시대의 불안은 세상과 혼자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에 느길 수밖에 없게 된 피동적인 감정이라기보다, 혼자인 것을 즐기며 살아갈 힘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생겨나는 자기 내면의 감정이다. 다른 이와 비교해서 내가 실제로 못나서라기보다, 한 인간으로서 자기 가치를 충분히 발견하지 못하고 잇다고 느끼기 때문에 생겨난 내 안에서의 감정이다.
가령, 요즘 유행하는 SNS를 예로 들어보자. 미학적으로 볼 때 SNS는 근대 이전의 창작활동과는 크게 다르다. 우선 미 즉 아름다움의 대상이 근대 이전에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화려한 별천지였는데, SNS에서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일상으로 바뀌었다. 아름다움의 표현방식 또한 근대 이전에는 화려함과 추함,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과도한 대비로써 그려졌는데, 지금의 SNS에서ㅓ는 소소한 자기 일상의 담담한 반복으로 바뀌었다. 나아가 근대 이전까지는 귀족이나 성직자, 그들에게 봉사하는 전문 예술가에게만 국한되어 있던 아름다움의 표현 주제가 SNS에서는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무상으로 제공되는 각종 웹사이트를 화선지 삼아 모두가 "소소한 일상의 담담한 변주곡"을 그려낼 수 있게 된 것이 지금의 SNS다.
이는 분명 지난 근대화가 안겨준 커다란 선물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런 선물이 정작 그 수혜자들에게는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신분제가 무너지고 누구나 자기표현이 가능하게 된 것은 분명 좋은 징조다. ...다른 이의 자기표현을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나 손십게 자기표현이 가능하게 된 것도 분명 행복한 소식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다지 재밌지도 않은 내 소소한 일상을 들어주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내 작품을 누군가는 봐줘야 작품을 내놓은 내 마음이 충만해질 텐데, 현실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누구나 평등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담한 무관심과 그에 따른 짜증뿐이다.
무관심에 따른 짜증은 어떤 면에서는 마음의 해방에 따른 불안과도 상통한다. 모두가 "소소한 일상의 담담한 변주곡"을 그려낼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짜증을 얻었다. 모두가 미지의 외부 세게에 대한 두려움과 우러러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불안을 얻었다.
만약 우리가 "소소한 일상의 담담한 변주곡"을 그려내더라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자체에 더 큰 즐거움을 두었다면, 아마도 짜증 따위는 처음부터 생겨나지 않거나 생겨나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두려움과 우러러봄에서 해방되었더라도 이를 불러온 내 마음의 조감도를 좀더 세심히 살폈더라면, 아마도 지금의 불안 따위는 처음부터 생겨나지 않았거나 생겨나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과 우러러봄이 지금 그 모습을 바꿔 불안으로 되돌아오고 있고, 무관심으로 인한 짜증이 전문 예술가를 넘어 지금 우리 모두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p235
어떤 이가 주체가 되어 만들어온 것이 점점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 급기야는 그를 지배하게 되는 것, 이를 가리켜 우리는 보통 '소외'라 부른다.
소외는 단지 '신과 인간 사이'(포이에르바흐)'상품과 노동자 사이'(마르크스)에서만 잇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모든 생명체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주어와 목적어의 전도된 모습으로서 항상 발생한다. 다른 생명체와 비교해서 인간이 특히 소외에 민감한 이유는, 단지 자타를 식별하는 의식 능력이 탁월하게 발달한 만큼 자기가 만들어온 대상에 대한 소유욕도 다른 생명체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사상가 요시모토 역시 모든 생명체의 공통적 특징으로 소외를 들어ㅓㅆ다.
......
요시모토에 따르면 소외는 낯섦이다. 실제로 독이러 '소외(Entfremdung)'도 본래는 이런 뜻이다. 그 낯섦이 일차적인 감각기관을 통한 것이든 이차적인 의식작용에 따른 것이든 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기를 감지하고, 따라서 자기와는 다른 대상에게서 어떤 낯섦을 감지할 능력을 지녔다는 것 자체가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가장 큰 위대함이다. 감지의 대상인 자연을 무기적이라고 단정한 것, 이런 낯섦을 생명이 부정할 거라고 단언한 것 빼고는 생명의 본질을 꿰뚫은 탁월한 통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p242
자기 안의 것을 자기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외화'라 부른다. 외화와 소외를 동일시한 헤겔에 따르면, 자연과 역사는 자기 안의 정신과 이념이 밖으로 드러나 바깥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신과 인간이 자기 안의 것을 밖으로 양도하고 처분한 결과로 신에 의해서는 자연이, 인간에 의해서는 역사와 문명이 정립된 것이다. 둘 사이에 굳이 차이가 있다면, 신은 혼자서 이루고 인간은 공동으로 이루었다는 것, 신이 먼저 이루고 인간은 이를 모방해 이루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인간이 소외의 길로 들어선 것은 신을 모방해 신처럼 역사와 문명을 창조하고자 햇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이런 소외는 어떻게 해야 넘어설 수 있을까? 소외는 과연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외는 소외한 것을 다시 자기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즉 '내화'함으로써 비로소 지양된다. 그리고 이런 외화와 내화의 반복, 즉 내 안의 것을 밖으로 드러내고 그 드러낸 것을 다시 내 안에 끌어들이는 행위는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p245
소외는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 아니다. 자연에 묻혀 자연과 하나되어 살아오던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연을 대상으로 역사와 문명을 만들면서부터 소외는 이미 시작되엇다. 그리고 이 소외는 실은 인간에 의한 자기 소외에 다름 아니다.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인간은 자연가 하나였던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소외의 지양도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옳다. 자연과 하나였던 나로 돌아가 지금의 나와 다시 대면하는 것이 지양의 시작이다. 안타깝지만 이런 소외(외화)한 것의 내화, 밖으로 드러낸 나를 다시 내 안에 끌어들이는 행위의 끊임없는 반복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싶다.
p252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석가모니불'이라 부른다. '석가'란 샤키야족 출신임을 가리키고, '모니'는 침묵의 수행자라는 뜻이며, '불'은 깨달음을 얻은 이를 말한다. 깨달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를 되돌아보는 데는 침묵만 한 것이 없다.
달리 표현하자면 침묵은 소외(외화)한 나를 다시 내 안에 들이는 내화이고, 떨어져 나간 나의 귀환이기도 하다. 내가 낳고 기른 또 다른 나, 지금은 바깥에 떨어져 있어 낯설게만 느껴지는 나, 그런 나를 '타자적 존재'로 내 안에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고 귀환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타자적 존재'란 일단은 지금의 나와 구분해서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고, 이런 타자와 나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향해 일단은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관계 맺을지를 주체적으로 고민하지 않는 한, 다 자란 자식과 부모 사이의 소원한 관계가 해결되지 않는 것과 같다.
침묻 다음으로 제안하는 것이 '자기표현'이다. 귀환한 나와 지금의 내가 만나 내 안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내가 태동한다. 이런 새로운 나를 말로써, 또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다시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자기표현이다.
침묵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침묵을 통해 태동한 새로운 나를 말로 표현하고 관계 속에서 드러내야 나도 살고 협동조합도 되살아난다. 나아가 이렇게 새로이 태동한 내가 정말로 나인지를 확인하고, 또 한 번의 자기표현이 독선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다시 한번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또 한 번의 자기 표현은 '다시 외하'다. 협동조합에서 소외란 내가 외화한 내 말과 관계가 가짜 말과 관계로 전도되어 나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또 한 번의 자기표현은 이렇게 전도된 가짜 말과 관계르 내 안으로 내화해, 그것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나를 태동시키고, 이렇게 태동한 새로운 나를 말과 관계롯써 다시 외화하는 것이다.
......
여기서 한 가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소외는 본래<외화-소외- 내화- 대화(갈등)-지양- 다시 외화>라는 역동적이고 자기 관계적인 과정의 일부다. 즉, 흔히 말하는 '소외 문제'는 실은 소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자기 관계적인 과정에서 벗어나 있는 소외로 인해 발생하는 무제다. 내가 낳고 기른 협동조합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 대상화되도 외재하게 된 게 문제가 아니라, 그 협동조합을 다시 내 안에 들여 비대상화하고 내화하지 않는 게 진짜 문제다.
물론 대다수 좌파 진영 지식인들은 이와는 다르게 소외를 설명한다. 그들에 따르면 소외는 외재화하게 된 것이 아니라 외체화한 것이다.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 외부에 실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내 밖에서 실체가 있는 것으로 둔갑한 것이다. 덕분에 나 역시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세상을 잘못 이해해왔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이해로는 소외의 지양은커녕 폭력적인 투쟁만 부추긴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p256
마음의 영역에서는 이 둘이 분명 대립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하나의 개념을 사고할 때, 그 개념은 보통 상반된 두 계기에 이해 성립된다.
예를 들어 '동일'이라는 개념은 '이질'이라는 계기에 대한 '동질'이라는 계기의 작동에서 생겨난 것이고, '차별'역시 '평등'이라는 우리의 이상에 대해 '불평등'이라는 우리의 현실이 충돌하면서 생겨난 개념이다. 하나의 개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렇게 두 대립적으로 보이는 계기가 서로 얽혀 만들어지고, 한 계기는 다른 계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관계로 맺어져 있다.
우리가 가장 고귀하게 여기는 '사랑'을 불교에서는 '애증'즉 '사랑과 미움'의 한 측면으로 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때문에 불교에서는 미움과 함게 사랑마저도 동시에 끊어내야만 비로소 절대 평등의 사랑 즉 부처의 자비에 이른다고 말한다.
아무튼 마음속에서는 이렇게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동시에 우리에게는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있고, 마음과 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운'도 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해서 비로소 우리의 '삶'이 된다.
이런 삶에서 서로 다른 두 계기는 대립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하면서 공존한다. 마음속에서는 사랑과 미움이 서로 대립해 더 큰 사랑이나 미움이라는 '(지양적)통일'을 이룰지 몰라도, 실제 삶에서는 사랑과 미움이 '기우뚱한 균형'을 이루면서 우리는 산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하고, 미워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더구나 '(지양적)통일'은 우리의 삶에서 찰나에 불과할 뿐, '기우뚱한 균형'이 상시다. 이미 떨쳐버린 줄 알았던 사랑이나 미움이 다시 밀려오고, 하나의 업이 지나가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또 다른 업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런 상시적인 모습에서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찾아야지, 찰나적인 한 순간의 상태로 인간과 사회를 몰아가서야 되겠는가.
......
....새로운 나, 그 나를 또 한 번 자기표현하고 다시 외화하는 내화와 외화의 끊임없는 반복을, '진화'니 '진보'니 하는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시각이야말로 생명의 차이에 인간을 정점으로 하는 차별을 낳고, 마찬가지로 인간 집단 간의 폭력적인 갈등만을 부추기게 된다.
p263
... 지금까지의 협동조합이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여럿이 모여 '우리'를 형성해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우리'를 문제를 함게 해결해온 데 그 특징이 있었다면, 앞으로의 협동조합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의식을 가지고 나다움을 모색하는 속에서 그런 '나'들이 모여 '나와나'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협동조합이 독재정치와 금권정치에 맞서 민주주의를 추구해왓따면, 앞으로의 협동조합은 그 성과를 끌어안으면서도 민주주의의 본질에 훨씬 다가가느 '개인주의'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란 모든 책임을 개개인에게 떠넘기는 흔히 말하는 '개인주의'와 는 다른 것으로, 정치적으로는 "다수에 의한 통치"를 넘어 "주권을 가진 개인이 스스로 통치하는 것"을 말하고, 실천적으로는 "다수의 인간다울 권리를 획득하는 것"을 넘어 "존엄한 개개의 존재가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게 서로 돌보는 것"을 말한다.
p267
역사는 방향을 정해놓고 그 방향으로 사람들을 몰아간다고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는 오히려 자기 감각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그 감각을 자연스럽게 모든 타자에게로 넓혀가는 것이 역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
......
...진정한 내 말이라면 다른 이의 내 말을 비하하거나 배제하지 않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마찰과 긴장은 오히려 나와 너를 되돌아볼 좋은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p269
...협동조합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본질을 통찰할 수 있는 것은, 협동조합이 아니라 실은 사람이다. 협동조합의 정체성은 실은 협동조합의 정체성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협동조합에 관한 정체성이다. '성정체성'은 내가 남자냐 여자냐, 혹은 그 이외의 다른 어떤 성이냐에 관한 자기동일성이지, 성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