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44

...남들이야 뭐라든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역사가 되지는 않을 일이었다.

 ....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두 발을 땅에 굳게 딛고 버티기만 해보자고 결심했다. 멈춰 있으려 해도 어차피 시간은 가줄 테니 말이다. 살아남을 수 있을지 막막할 때는 지금 이 순간만 잘 견뎌내보자고 스스로 다독였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눈앞이 캄캄할 때는 앞이 아니라 발밑의 땅을 보고 걷는 것이 낫다.

......

 나는 별로 내세울 것 없이 그저 오늘 주어진 몫을 그럭저럭 해내는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잘 해내지 못하면 큰 일이 나는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성취에 목매지 않고 훌륭함과는 거리가 먼 오늘, 기본만 하고 살아도 충분히 바쁘고 충만하다. 이만하면 됐지 싶다.

p54

 ...우리는 이제 자신의 생각과 주관을 바꿀 힘이 있는 다 자란 성인이다. 마음속 편견을 없애기 위한 개인적인 노력을 우리가 충분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닐가.

......

......

... 인간으로 살아 있는 한 마음의 문제는 몸의 문제만큼 흔하고 언제든 생길 수 있다. 특히 코로나로 전 세계가 고통받는 요즘 같은 때에 심리적인 어려움이 전혀 없이 잘 살고 있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이 더 걱정스럽다. 몸의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숨기고 감출수록 치료는 어렵고 힘들다. 안전한 공간에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 나의 내밀한 상처를 내보이는 것에서부터 치유는 시작되어야 한다. 상처는 숨길 수록 곪는다.

 p71

 꿈꾸는 삶은 살아가는 많은 방식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꿈꾸는 법을 안다면 꿈을 수정하거나 내려놓는 법도 함께 알아야 한다. 언제 꿈을 꾸고 바꾸고 내려놓을지는 우리 각자가 모두 다르다. 꿈을 위해 달리다가 멈추어야 하는 시점 또는 멈추고 싶은 시점은 내 삶의 주인인 내가 가장 잘 안다. 그 누구도 당신에게 왜 더 큰 꿈을 꾸지 않느냐고, 왜 꿈을 포기하느냐고 훈계할 수 없다.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 없다면 왜 그런지도 고민해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쓰며 그 굴레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인지, 꿈을 내려놓았을 때 누군가를 실망시킬까 봐 걱정되는지, 꿈꾸지 않는 삶이 초라하다고 믿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현재를 잘 사는 것은 원대한 미래의 꿈을 품는 것만큼이나 험난하고 위대하다. 꿈꾸는 삶은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으로부터 추진력을 얻지만, 현재에 집중하는 삶은 그와 같은 원동력이 없다. 그래서 현재에 집중하는 평범한 일상에는 더 많은 고민과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평범한 일상이란 밋밋하고 지루한 삶이 아니다. 지금 내가 맡은 일을 언제나처럼 충실히 하고 건강과 안녕을 돌보며 내 곁의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면서 사는 삶이다. 자극적이거나 드라마틱하진 않지만 은은하고 담백하며 삶의 의미와 크고 작은 행복을 발견하며 사는 안정된 시간이다. 그리고 꿈보다는 의미를 좇는 삶이 낫다. 꿈이 손가락마디만 한 비좁은 칸에 장래희망을 적는 것이라면, 의미는 커다란 종이 한 장에 내가 어떤 어른이 되고 싶고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며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넉넉하게 적어보는 것이다.

p110

 잃어가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지금 내 곁에 있는 존재들이 고맙고 애틋해진다. 나의 죽음을 생각한다면 내 삶을 한 번쯤 더 돌아보고 남은 삶을 의미 있는 순간으로 채워갈 의지를 품어보게 된다. 결국 덜 아픈 이별을 위해 나의 현재에 집중하고 지금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잘하고 있는 것이다.

p121

...이대로도 괜찮다면 삶의 질은 유지되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살 만한 삶인지에 대한 대답은 각자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도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정답도 오답도 없고 나다운 대답만 있다. 치료의 부작용이 너무 심하다면 부작용을 치료하게 돕고, 통증 때문에 살아갈 힘을 잃었다면 더 잘 반응하는 진통제를 처방하기 위해 고심하고, 몸의 통제력을 잃어 고통스럽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하고 따뜻한 노을빛을 즐기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지 생각해보도록 하고, 스스로도 알아보지 못하는 삶이라면 그저 당신이 살아만 있기를 바라는 가족을 위해 삶을 유지할 순 없는지 묻는다. 고통 속에서도 살아갈 만한 삶인지 생각해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p126

 이대로 회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삶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나요?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신체 기능은 무엇인가?

 지금 가지고 있는 불편함을 다 해결할 수 없다면 무엇을 먼저 해결하고 싶나요?

 죽기 전에 꼭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나요?

 어떤 치료를 마저 받고 싶으며 그 치료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요?

 어디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나요? 집이어야 하나요, 병원이어도 괜찮은가요?

p129

...태어난 이상 삶을 시작하는 고통, 살아가는 고통, 죽어가는 고통을 피할 수는 없지만 완화시킬 수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이란 그저 덜 고통스러운 삶, 덜 고통스러운 죽음일지도 모른다.

p132

 의료에서의 무의미함에는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생리적인 무의미함이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에게 박테리아 치료제인 항생제를 쓴다거나 암 치료를 위해 아스피린을 쓰는 등 효과가 없는 치료를 하는 예가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는 양적인 무의미함이다. 어떤 의료 행위가 환자에게 이득을 가져다줄 가능성이 1퍼센트 이하로 매우 희박할 때 의료 행위를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는 경우다. 세 번재는 질적인 무의미함이다. 이것은 의료 행위를 통해서 얻는 이득이 있다고 해도 그 이득이 질적으로 매우 낮은 경우를 뜻한다....어떤 치료의 결과가 환자가 원했던 치료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부합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무의미한 치료라고 볼 수 있다. 생리적 또는 양적 무의미함과 달리 어떤 의료 행위가 질적으로 무의미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에는 표준화됟고 모두의 동의를 얻은 일반화된 규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p139

 ...의사는 환자의 삶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결정권자가 아니라 환자가 최선의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의사결정을 돕고 그에 맞는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다.

 "환자의 병을 치료하는 일이나 고통을 줄여주는 일은 종종 가능하지만, 환자를 편안하게 만드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

 1800년대에 활동했던 미국의 의사 에드워드 트뤼도의 말이다. 무의미한 치료는 있지만 무의미한 돌봄은 없다. 완치를 위한 치료를 멈춘 순간에도 환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있다.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줄어든다고 느낄 대 우리는 치료의 목적과 삶의 질에 관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