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76   

회원들의 기본 소양이 다르고 선호하는 책이 달라서 다양한 관점들을 보게 되는 것이 즐겁다. 통찰의 지평을 넓히는데 이만한 것도 없다. 책을 통해 만난 인연들이니 다툼도 없고, 서로서로 배려하고 높여주는 분위기가 참 좋다. 매번 열정적으로 준비하시는 분들이 고맙고 언제나 자기 몫을 다하시는 분들께 감사드린다. 

p110  

...'책을 읽는 것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면 글 쓰는 것은 나를 만나는 일이다'라고 하듯이 글로 표현하면 그 기록이 남기도 하지만 서로의 생각을 곱씹어 보며 생각의 확장이 일어나는 효과가 있다. 함께하는 책 읽는 모임이 단순히 독서만 하는 모임이 아니라 유대 관계를 통해 사회 관계의 장을 만들고 서로에게 배우고 자극을 받아 건전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의미도 크다고 본다.

 ...독서는 나 자신이 변화해서 사람과 자연에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책이 매개가 되어 삶의 여백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은 영혼의 틈을 메워 주는 거룩한 행위가 아닐까.

p189

...산다는 것은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오늘'이란 살아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요, 생애 처음 대하는 날이니만큼 최선을 다해야 하는 시간이다.

p216

 평생에 걸친 마르셀의 끈기와 상페의 위트, 또래 작가 마스마 미리의 가볍지만은 않은 경쾌함에 끌리고, 도스토옙스키의 결핍이 만들어 낸 결실을 경외한다. 특별한 스토리가 있을 때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고통을 인내한 진주 같은 이야기를 품은 작가를 흠모한다. 결핍에 따른 당김처럼 반짝이는 그들에게 매혹된다. 사실 거의 매번 지금 만나는 작가와 사랑에 빠진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 다음 사랑을 기다리는 설렘은 덤이다.

p230

 "운명은 불운의 모습일 때가 행운의 모습일 때보다 사람들에게 더 큰 유익이 된다."

 행운을 맞은 사람들은 산들바람처럼 이리저리 살랑 살랑 불어오는 행운에 정신을 차리몹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지만, 불운을 당한 사람들은 역경들을 겪으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며 만반의 준비와 태세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보에티우스는 자신의 불운 속에서도 스스로 위안하며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애쓴 점이 역력하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나는 나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 것인지, 이 책을 곁에 두고 삶의 갈피를 잃을 때마다 읽어야 할 것 같다.

p233

 ...<모비 딕>은 근육과 땀과 피가 부딪히는 난장, 바다와 바다에서 태어난 인간이 벌이는 사투, 해양적 실존의 서사시이다. 모든 삶과 문학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현장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삶의 어두운 진실, 어둠의 거대한 힘, 삶의 악마성을 파헤친다. 절대적 실재에 다가가려는 자는 파멸을 각오해야 한다는 선언문이다. 멜빌은 도서관을 헤엄쳐 다니고 넓은 바다를 몸소 항해하면서, '손으로' 고래들과 관계한 비극적 영웅이었다.

  <모비딕은 뭐랄까, 하얗게 무겁다. 바다 그 자체다. 바다라는 물질 전체가 모비 딕이라는 흰고래의 힘으로 변용한다. 허먼 멜빌이 상상력으로 재구성해 낸 바다의 이미지가 모비딕이다. 비상이 아니라 침몰을 꿈꾸는 자의 혈투이다. 순수한, 절대적인 힘들의 사투이다. 침몰을 꿈꾸는 자의 혈투이다. 순수한, 절대적인 힘들의 사투이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역동적 상상력이 빚어낸 순수한 힘, 추락하는, 내리꽂히는 비참한 속도...바다는 탈주하는 선들의 교집합이다. 씨줄과 날줄의 교직이 고래의 근육이다. 바다의 힘을 농축한 것이 고래이고, 그 고래의 힘이 응집한 곳은 꼬리이다. 물질의 소멸이 일어나는 블랙홀이다. 그래서 꼬리의 유연함은 섬뜩하게 아름답다. 꼬리는 피쿼드호의 추진 기관이자, 에이허브의 작살이고, 제우스의 벼락에 대한 항거였다. 우리를 죽음으로 내모는 광기란 이런 것이다.

 배의 항적은 표피에 금을 긋는다. 감각적인 느낌에 그친다. 심연에 이르는 길은 혼의 울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존재의 심화, 존재의 전환은 수평이 아니라 수직의 방향이라야 한다. 하강이 아니라 추락이다. 모비 딕은 에이허브의 분신이다. ...

p238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큰 틀에서 보면, 인간은 누구나 크든 작든 고통에 시달리는 삶을 산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심지어 그는 세상을 '지옥'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삶의 본질이 고통이라는 것. 그러니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자잘한 근심과 종종 찾아오는 슬픔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어서 그것을 극복해 가는 것이 존재의 기쁨이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또 내면의 힘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던 철학자다.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을 둘러싼 세계를 설명하려 애쓸 때, 쇼펜하우어는 내면의 빈곤을 경계했다. 정신적인 욕구가 없는 인간을 단호히 '속물'이라고 표현했고, 인간의 큰 즐거움이 재산과 명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나온다고 확신했다.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정신이 비어 있고 영혼이 가난한 사람들만큼 불행한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가운데 내가 아주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운명은 잔혹하고 인간은 가련하다. 이러한 세상에 원래 지닌 것이 풍부한 자는 눈 내리고 얼름이 언 12월 밤에 밝고 따뜻하며 흥겨운 방에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과 같다."

 하루하루를 하나의 작은 삶으로 본 그의 생각은 또 어떤가?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태어나는 것이요. 매일 밤에 잠드는 것은 죽는 것이라고 비유한 대목에선 우리에게 주어진 확실한 현실인 바로 지금이 새삼 소중해진다. 분명 책 전체에 염세주의가 스며있음에도 인간이 행복을 위해선 고상한 성격, 제대로 기능하는 두뇌, 명랑한 마음, 건강한 신체 등이 필요하지만 이 모든 자산 중에 우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명랑한 마음'이라고 누누이 말하는 쇼펜하우어. 이런 아이러니가 참 좋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란 견딜만한 삶을 사는 것, 덜 불행하게 사는 것이라는 그의 철학.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 매력적이지 않은가.

p254

...각자의 무게로 힘겨운 삶의 여정을 지니는 동안 끊임없이 질문하고 확인하고 싶어진다. 잘 살고 있는지,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며 괴로워한다. 그저 괜찮다는 자기 위안의 이불을 덮고 슬그머니 들어앉기도 하지만, 발부리에 걸리는 돌멩이에 철퍼덕 엎어지기도 하고 때론 당당하게 대면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알게 된다. 구구라도 만만치 않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내 짐이 무거운 걸 알아챈 순간 내 옆에 선 그의 짐 또한 가볍지 않다는 걸. 특별한 한 생이 되지 못하더라도, 기억할 만한 한 사람이 되지 못하더라도 치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p261

 책은 '참마음'을 개닫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에게 "참마음은 이미 주어져 있으며, 참마음이란 것 안에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사람들이 실체를 확인하려는 것은 집착이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으로 지어낸 것일 뿐, 마음이 법이고 부처여서 마음 빢에는 배울 것도 닦을 것도 없다는 것. 마음 밖에는 알아야 할 만한 단 하나의 법도 없으며 결코 배워서 아는 것을 가지고 범접할 수 없는 길임을 명심하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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