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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딸들 1 - 양장본
엘리자베스 마셜 토마스 지음, 이선희 옮김 / 홍익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잔인합니다. 이렇게 잔인한 작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이야기를 어떻게 이렇게 슬프게 끝낼 수 있는지 ! 읽는 내내 가슴을 얼마나 졸였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결말을 내 버리다니 ! 책을 덮고 한동안 슬픔에 젖어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이 먼먼 옛날 한 여인의 삶과 죽음이 이토록 가슴을 후벼 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만여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 시베리아 남부 아메마스 강의 북쪽 기슭엔 수렵과 채취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원시부족이 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곳 원시부족 '불의 강' 사람들의 딸들 중 한 명인 '야난'의 일생에 관한 것입니다.
하루하루 생존이 가장 큰 문제이긴 하지만 야난의 어린 시절은 행복했습니다. 야난은 부족장인 그레이렉의 영도 아래 건실한 아버지 아히와 강인한 어머니 레프윙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느날 야난은 부족어른들과 부모님의 뜻으로 자신이 부족의 청년인 팀과 혼인 하기로 돼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만약 아무런 사건도 없이 시간이 흘러 갔다면 야난은 평범한 한 여인으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남들처럼 살다 죽었을 테지만 운명은 그녀를 놓아 두지 않습니다. 그레이렉 일족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들의 짝을 찾기 위해 불의 강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일족은 불의 강 주변 초원에서 다른 일족인 맘모스 사냥꾼들을 만납니다.
그레이렉은 뛰어난 사냥꾼들인 맘모스 사냥꾼들과 관계를 맺고 함께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소한 일로 야난의 아버지 아히가 맘모스 사냥꾼들과 토라져 따로 독립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야난은 만삭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또 다른 아내이자 이모인 요이, 여동생 메리,사촌인 프록과 스틱과 함께 아버지가 태어난 오두막으로 향합니다.
가는 도중 어머니는 출산하고 야난은 난산의 어머니를 도와 아이를 받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레프윙은 아이를 낳은 직후 죽고 맙니다. 불행은 연이어, 아버지 아히 마저 사냥 중 늑대에게 물린 상처가 덧나 고열에 시달리고 귀신과 대화를 나눕니다. 공포에 질린 이모와 사촌들은 야난과 메리를 두고 불의 강으로 떠나 버립니다. 그 직후 아버지도 어머니를 따라 갑니다.
야난과 메리는 사람들을 찾아 혹한을 뚫고 멀고 먼 길을 나섭니다. 두 소녀는 외톨이 어미늑대의 도움을 받는 등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마침내 불의 강에서 그레이렉 일족을 만납니다. 그레이렉 일족은 맘모스 사냥꾼인 스위프트 일족과 함께 협력해 살고 있습니다. 그레이렉의 두 아들인 팀과 에르호가 맘모스 일족의 여자를 아내로 맞는 대신 메리를 스위프트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원래 메리는 일족이었던 화이트폭스와 약혼한 사이입니다. 부모님도 모르게 동생의 혼인이 바뀐 것에 대해 야난은 심한 반발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킵니다. 그 와중에도 야난은 첫 생리를 치루고 성인식을 거쳐 팀과 결혼합니다. 행복했던 신혼의 달콤함도 잠시, 동생 메리를 따라 다니던 새끼 늑대를 잡은 것으로 오해한 야난이 스위프트의 늑대 가죽을 버리고 그게 빌미가 되어 팀과 심하게 다투게 됩니다.
격정을 이기지 못한 야난은 자신의 이혼과 메리의 파혼을 선언하고 메리를 데리고 다른 불의 강 일족을 찾아 그레이렉의 오두막을 떠납니다. 맘모스 사냥꾼과 잘 어울리지 못하던 화이트폭스와 에르호가 두 사람을 따라 나섭니다. 홧김에 앞뒤를 잴 수 없었던 야난은 도중 에르호의 유혹을 받고 관계를 가집니다.
불의 강 일족에서 요이 이모와 사촌들을 만난 야난은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야난은 그제야 남편 팀을 그리워하게 되고 자신의 성급함을 자책하게 됩니다. 뒤늦게 야난은 에르호와 관계를 가진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후회합니다. 야난은 그레이렉 일족에게 돌아갑니다. 하지만 팀은 야난의 부정을 의심해서 냉랭하게 대합니다. 야난은 아무런 배려와 보호 없이 혼자 아이를 낳기 위해 숲으로 들어가는데....
문화인류학자인 엘리자베스 마셜 토마스는 2만년전 한 여성의 삶을 너무나 생생하게 되살려 냈습니다.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원시부족의 삶에 대해 손에 잡힐 듯 실감나는 묘사를 하고 있으며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투영해 야난의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제목을 "세상의 모든 딸들"이라고 붙였는데 마치 강한 페미니즘 문학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지만 이 책은 여성에게만 국한된 편협한 책이 아닙니다.
원시인의 삶을 통해 현대인의 삶을 돌아보고 바람직한 미래를 노래하는 희망의 예언서입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마땅히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나직하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야난이 여성이고 여성이라는 삶의 규정에 반발하다 죽는 것 때문에 페미니즘 문학으로 보는 모양이지만 작가가 야난의 삶에 감정적인 동조를 하지 않는 걸 보면 지나친 억측이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는 소설 속 남성들을 비난하고 있지도 않거든요. 오히려 야난의 어리석음에 대해 책망하는 태도를 보일 정도로 중립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작가는 오히려 과격한 페미니즘을 비롯한 대립위주의 생각들을 경계하는 것 같습니다. 야난이 갑작스레 죽는 결말은 분명 그런 작가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고 봅니다.
작가는 우리 보다 훨씬 어리석을 것이라고 여겨지던 원시인들이 보여주는 삶에 대한 지혜와 통찰, 서로에 대한 존중과 화합의 정신을 통해 현대인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이 책을 읽는다면 아름다운 인류의 미래란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