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중의 고전, 돈키호테 명장면 BEST 5
독자를 사로잡는 세르반테스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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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드리드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의 동상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어보셨나요? 17세기에 탄생한 이 스페인 소설의 문학적 가치에 대해선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난 2002년, 노벨문학상의 본거지 스웨덴의 작가연맹은 전 세계 100여 명의 작가들을 대상으로 역사상 가장 훌륭한 소설 100편을 선정하는 설문조사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1위는? 바로 『돈키호테』였습니다.
1위도 그냥 1위가 아니었습니다. 2위를 차지한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보다 50퍼센트 이상이나 많은 표를 얻은 압도적인 1위였다고 하는군요. 그 뒤를 이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3위를 차지했습니다.
톨스토이와 쌍벽을 이루는 러시아 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전 세계를 뒤집어 봐도 『돈키호테』보다 더 숭고하고 박진감 넘치는 픽션은 없다"고 평했던 작품. 시대를 풍미했던 인문학자 르네 지라르가 "『돈키호테』 이후에 쓰인 소설은 『돈키호테』를 다시 쓰는 것이나 그 일부를 쓰는 것"이라고까지 칭송했던 바로 그 작품.
바로 초등학생들도 그 스토리를 다 알고 있는 『돈키호테』입니다. 늙고 야윈 말 로시난테, 뚱뚱한 산초 판사와 함께 풍자를 향해 달려가고, 둘시네아 공주를 찬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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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라만차 평원의 풍차
그렇지만 막상 이 책의 완역본을 읽어 본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무엇보다도 1,6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부터가 압박으로 느껴집니다. 이미 돈키호테의 주요 등장인물과 큰 줄거리를 다 알고 있는데 왜 굳이 그 두꺼운 책을 다시 읽어야 되냐고 반문하는 분도 있습니다. 소설을 무대로 옮긴 인기 뮤지컬 「맨 오브 라 만차」로 돈키호테의 세계를 다시 만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소설 『돈키호테』는 원전 소설만이 줄 수 있는 매력으로 가득합니다. 세르반테스가 ‘모험에 미친 편력기사’ 돈키호테를 통해서 풍자하고 비판하려 했던 당시 스페인 사회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돈키호테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400년의 시간을 건너 뛰어 우리에게 주는 울림 또한 여전합니다. 동시에 돈키호테와 산초의 모험에는 여전히 우리를 설레게 만드는 순수한 에너지와 흥미진진함이 가득합니다.
더욱이 저희 출판사에서 펴낸 『돈키호테』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전(前) 총장이자 한국 세르반테스 연구소 이사장을 지낸 박철 교수가 번역을 도맡았습니다. 스페인 왕립한림원 종심회원으로, 국내에선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자라고 할 만하죠. 꼼꼼한 주석도 주석이지만, 박철 교수의 스페인어 번역은 유려하고 자연스러워, ‘읽는 맛’이 살아 있습니다. 덕분에 돈키호테의 장광설을 물 흐르듯 편안하게 곱씹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도 『돈키호테』 완역본의 독파를 추천 드리며, 여기선 『돈키호테』 1권과 2권의 대표적인 명장면과 그 장면을 상징하는 문장들 BEST 5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돈키호테를 익살스런 동화로만 알고 계시던 분들, 깜짝 놀라실 수도 있어요!
1. 자유로운 여성을 변호하는 돈키호테
“나의 진노가 있을지니, 신분에 상관없이 그 누구라도 아름다운 마르셀라를 쫓아가서는 안 될 것이오. 그녀는 명확하고 충분한 이유를 댐으로써 그리소스토모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도 없음을 보여주었소. 어느 누구의 연인이 되겠단 마음 없이 초연히 살아왔으니, 쫓기고 추적당하기보다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중받고 찬탄 받는 것이 마땅하오. 이 세상에서 그녀만이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유일한 사람임을 보여주었소.”
― 『돈키호테』 1권, 192~193페이지
아름다운 산양치기 마르셀라를 사모하다가 비탄에 빠져 죽은 젊은 남성 그리소스토모. 많은 남성들이 그의 장례식에서 그를 추모하며 마르셀라의 잔인한 마음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홀연히 나타난 마르셀라는 왜 자신을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도 반드시 그를 사랑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며, 자신은 오직 자유롭고 구속당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을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곤 다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죠.
여전히 그녀를 뒤쫓으려는 몇몇 남자들에게 돈키호테가 위와 같이 으름장을 놓자, 그들은 움직임을 멈춥니다. 그는 곤경에 빠진 한 여인을 구했습니다. 돈키호테는 결코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는 그야말로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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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도레의 돈키호테 삽화
2. 죄수들에게 자유를 안겨준 돈키호테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들려준 모든 이야기를 듣고 분명히 알았소. 비록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긴 하지만, 그 형벌이 기꺼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아주 내키지 않을뿐더러 여러분의 의지에도 어긋난다는 것을 말이오. 어떤 이는 그저 고문 속에서 용기가 좀 부족했고, 어떤 이는 돈이 좀 부족하고 다른 사람의 호의가 부족했던 것뿐인데, 결국 재판관의 잘못된 판단으로 여러분의 신세가 이렇게 된 것이니, 각자 정당한 판결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겠소. (…) 호송관님들. 이 가엾은 자들은 당신들에게 직접적인 해를 입힌 것도 아닙니다. 각자 죗값은 알아서 치르게 될 것입니다. 저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악한 자는 징계하시고 선한 자에겐 상을 내리실 것이니, 어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죄를 묻는 사형 집행인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 『돈키호테』 1권, 301~302페이지
돈키호테와 산초는 거리에서 두툼한 쇠사슬과 수갑을 찬 열두 명의 죄수들을 마주칩니다. 그들은 국왕 폐하의 명으로 갤리선 노젓기 노역을 가는데요. 돈키호테는 그들 중 여럿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차근차근 얘기를 듣습니다. 돈이 없어서 노역을 하는 사람, ‘고문을 받고’ 가축을 훔친 죄를 고했던 사람, 그리고 교회와 성직자를 비판했던 사상범까지….
돈키호테는 다양한 사연들을 듣고는, 위와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힘 있는 자에게 탄압받는 약자를 돕겠다는 맹세를 되새기면서 말이죠. 그리곤 그들을 풀어주죠! 세르반테스가 이 장면에서 그리는 ‘힘 있는 자’란 정확히 스페인의 정치적/종교적 통치 권력이었습니다. 이제, 작가가 돈키호테를 왜 그런 희극적인 미치광이로 그려야 했는지 이해하실 수 있겠죠?
3. (맞아서) 죽기 일보 직전의 돈키호테를 두고 산초가 통곡하며
“오, 여덟 달 만의 모험으로 저에게 바다로 둘러싸인 훌륭한 섬을 주시니 알렉산드로스 대왕보다도 더 대범한 분이시여! 오, 오만한 자에게는 겸손하게, 겸손한 자에게는 오만하게,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고, 모욕을 견디며, 이유 없는 사랑을 하시고, 선한 자들을 따르고, 악한 자들을 매질하시며, 천박한 자들의 원수이자, 결론적으로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의 편력기사여!”
― 『돈키호테』 1권, 756페이지
『돈키호테』 1권이 마무리되는 시점입니다. 성모상을 보고 핍박 받는 여인이라고 착각한 돈키호테가 그녀(?)를 구하러 돌진하고, 결국 종교 의식을 집행하던 사람들에게 맞아서 거의 빈사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가 정말로 죽어버린 줄만 알았던 산초가 통곡하면서 하는 말들입니다.
한 마디로, 돈키호테 사상의 근본정신이 아름답게 압축된 말입니다. 돈키호테의 이상주의와 산초의 현실주의는 시간이 갈수록 모호하게 뒤섞이는데, 산초가 점점 더 ‘진심으로’ 돈키호테를 뒤좇게 되는 과정을 바라보는 일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4. 돈키호테, 다시금 여행을 떠나려 결심한다
“가문들이란 엉망으로 뒤엉켜 있기 때문에 오직 그 주인이 덕과 부를 갖추고 관대함을 보일 수 있는 가문들만이 위대함과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야. 내가 덕과 부와 관대함을 말한 것은, 고귀한 신분의 사람일지라도 사악하면 사악한 귀족일 뿐이고, 관대하지 못한 부자는 욕심 많은 거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부를 가진 자는 그 부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는 행복해지지 않아. 그 부를 쓸 때 행복을 느끼는 건데,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낭비해서는 안 되고, 유용하게 잘 써야 비로소 행복해지는 거지. 가난한 기사가 자기가 기사라는 걸 증명하는 방법은 덕을 통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 『돈키호테』 2권, 98페이지
1권의 끝,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 패배한 뒤 고향으로 돌아오는 돈키호테. 그러나 2권에선 다시금 몸을 추스르고 새로운 편력을 준비합니다. 그를 걱정하는 가정부를 앞에 두고 ‘편력기사의 정체성’에 관하여 되새기는 장면입니다. 세르반테스 자신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 중 하나라고 직접 언급하기도 하는 부분인데요.
신분과 혈통이 무조건적으로 우선시 되는 세상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세르반테스의 사회적 인식이 절실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고귀함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뤄내고, 타인에게 헌신함으로써만 고귀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겠죠. 말하자면, 중세의 한복판에서 ‘근대적 지평’을 열어젖혔던 세르반테스의 혜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5. 산초, 한 섬을 통치하는 총독이 되다
“제 업무가 얼마나 많은지 머리를 긁을 틈도 없으며 심지어는 손톱을 깎을 시간도 없습니다. 그래서 손톱이 얼마나 자랐는지 하느님께서 도와주셔야 할 정도이지요. 제 영혼의 주인이시여,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지금까지 여기 총독직을 수행하면서 좋고 나쁜 일들을 주인님께 알리지 못했더라도 놀라지 마시라는 겁니다. 이 자리에 있으면서 저는 주인님과 둘이서 숲 속과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돌아다닐 때보다 더 심한 배고픔을 겪고 있답니다. (…)
지금까지 세금에는 손도 대지 않고 뇌물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 사람들이 말하기로는, 이 섬에 오는 총독들이 섬에 들어오기 전에 주민들이 보통 총독에게 많은 돈을 주거나 빌려주었답니다. 이게 이 섬뿐만 아니라 통치하러 가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반적인 관례라고 합니다.“
― 『돈키호테』 2권, 626~627페이지
『돈키호테』 2권을 읽으시면, 흔히 이 소설과 등장인물에 관해 갖고 있던 이미지가 많이 깨어지게 됩니다. 그만큼 세르반테스가 더욱 성찰적으로 여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는데요. 산초가 (1권에서 염원하던 그대로) 정말 한 섬을 다스리는 일도 벌어집니다!
주민들이 지배자에게 많은 돈을 주거나 빌려주는 게 당대 통치자들의 일반적인 관례라니…. 세르반테스는 산초의 입을 빌려 아예 작정하고 당대 사회를 비판하고 있군요. 책 한 권을 내기 위해서도 국왕 폐하의 ‘윤허’가 있어야 했던 그 시절에 말이죠. 『돈키호테』는 실로 놀라운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