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 속에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내가 ‘자살안내자’ 또는 ‘자살청부업자’라는 신종 직업(?)으로 등장한다. 자살안내자를 직업으로 볼 것인가에는 의문이 가지만 뭔가 삶을 단절하고 싶어하는 고객들(?)의 요청에 의해 각종 자살 방법을 안내한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선정적이다. 이 이야기에 같이 등장하는 명화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클림트의 「유디트 1」,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은 모두 자살이라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선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소설의 내용과 상호 연관이 되어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고객(?)으로 2명이 등장된다. 한 사람으로 유디트라고 별칭이 붙은 술집의 접대부와 미미라는 행위예술가가 등장한다. 삶을 마감하고 싶어하는 여자들로 삶의 희망을 잃어 버린 사람으로 등장한다. 삶의 희망을 잃어 버렸기에 자살을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녀들의 행적은 엽기적이기도 하다. 그 과정의 내용은 무척이나 선정적이기도 하고.

     이런 자살의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나름의 안내인으로서의 ‘자살안내인’이라는 역할은 의미가 있는 걸까 하는 자문을 해 본다.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생명체는 오직 인간만이 가지는 능력(?)이라고들 하지만 과연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행위인 자살이 미화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종교도 자살은 용납되지 않는다. 굳이 종교적인 내용을 얘기하지 않아도 자살은 용인될 수 없는 내용일 것이다. 우리 내부에 내포되어 살아 움직이는 유전자는 생존을 위해 나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결코 자살을 인정하지 않듯이 자살은 어떤 상황에서도 미화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자살안내인의 이야기는 실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인청부업자와 같이 부정되어야 하고, 있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삶의 희망을 잃었고, 죽지 못해서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삶을 끊는 것은 용인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무척이나 선정적이고, 자극적이다.

     최근 삶의 고달픔과 절망에 의해 삶을 단절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울증에 자살에 이르는 유명연예인에서 자신의 희망이 꺾이면서, 삶의 터전을 잃어 버려서, 등등 가지가지 이유와 상황으로 숫한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이야기는 그 이면에 이 소설의 주인공과 같이 자살안내인의 고객으로 자살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너무 심한 상상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소설 속의 이야기로 마치고 실재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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