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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이 책 『바리데기』를 보면서 바리 공주는 지노귀새남(죽은 사람의 넋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굿)에서, 무당이 색동옷을 입고 모시는 젊은 여신이라 것을, “~데기”는 부엌데기, 새침데기, 소박데기, 심술데기 등 사람 특히 여자를 가리키는 접미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바리공주는 어릴적 동내 무당의 굿을 하는 모습 속 걸려 있었던 색동옷의 여자 그림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처음 『바리데기』라는 책 제목이 생소했다. 책을 읽으면서 슬픈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의 주변, 이웃의 삶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지내왔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주인공 바리의 천부적인 능력을 통해 넘나드는 시공의 공간을 환상과 상상의 나래 속에 현실적 상황을 너무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어찌 보면 미신적(?)인 느낌이나 귀신과의 대화는 21세기 첨단과학의 시대에 걸맞지 않는 이야기 일수도 있으나 이야기를 보면서 그런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다.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는 내용을 바리를 통해 전달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더 많이 느껴진다.
간혹 신문지상이나 방송을 통해 접하는 북한 탈북자들의 이야기와 화면은 벌써 남의 나라 이야기 같은 생각을 갖게 한다. 얼굴 생김새가 같고, 같은 발음을 하는 말을 쓰는 사람이지만 오랜 시간 이질화 되어 의사소통하기 어려운 사람들로 바뀌어 가고 있다. 다른 나라 사람이라는 생각이 어느 순간에 다가와 있는 상태에서 이 소설은 새삼 우리들의 인식 저변을 일깨워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종교와 나라가 다름으로 인해 차별대우를 받고, 고통을 주고, 고통을 받는 사람으로 바뀌어진 현실이 결코 남의 나라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한때 우리 주변에 자주 보아 왔고, 지금은 뜸하지만 우리 사회를 만들어가는 구성원으로 자리잡은 외국근로자들을 봐야 하는 시각을 바꿔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들이 우리주변에서 느끼고 받는 감정 그대로 이 소설에 그려지는 이야기 또한 동일한 범주와 동일한 느낌으로 가해지는 고통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런 내용들이 방송을 통해 들려 오는 전쟁, 테러 등과 관련된 보도 내용에 엮여 고통을 주고, 받는 관계가 슬프다. 각자 자신의 범주를 정하고 그 범주를 벗어나는 행동, 사상, 종교에 대해서는 거부하고 부정하는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 전쟁과 테러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이야기가 한 어린 소녀에서 불법 밀입국한 외국인 근로자의 삶 속에 우리의 현실과 우리 주변을 돌아 보게 한다.
주인공 바리는 천부적인 근면성실의 대명사이면서 행운아(?)—행운녀라고 해야 옳은 표현일까?—로 보인다. 또한 탁월한 손재주—마사지술, 특히 발 마사지—와 무당과 같은 신통력은 소설 속에서 전지자의 능력으로 비춰져 보인다. 그 원형은 바리공주를 모델로 하고 있지만, 소설을 보면서 주인공 바리가 중국에서 익히고 배웠던 발 마사지 장면은 과거 중국에서 받아 봤던 발 마사지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앳된 소녀들이 손에는 굳은살에 힘들게 마사지 해주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런 소녀들 중에 바리도 한 명이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한편으로는 그 느긋함과 시원함은 잊혀지지 않는 장면 중에 하나이다.
주인공 바리의 삶은 북한에서의 궁핍한 생활 속에 탈북자로 중국을 거쳐 영국으로 건너가 고달픈 삶의 연속이었고, 이슬람교도와의 결혼생활 또한 고통으로 파란만장한 삶의 연속이었지만 소설 말미에 보여지는 새롭게 시작하는 삶의 모습은 희망이 묻어 난다. 종교와 정치적인 공방 속에 벌어지는 테러와 전쟁은 서로의 삶에 고통을 주는 요소이지만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희망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