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병자호란 동안 남한산성에 피난해 있던 시기인 1636/12/14~1637/2/2까지의 이야기다. 남한산성에 들어가 40일간을 숨어 있다가 결국 치욕을 당하면서 항복한 이야기다. 힘이 없어서 졌고, 그로 인해 치욕을 당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허나 소설 속에 그려지는 당시의 상황은 너무도 무방비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방위시스템의 부재, 무능력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밀려오는 청의 세력 앞에 가랑잎 쓸리듯 밀려나 처박혀 있었던 곳이 남한산성이다. 그 남한산성이 오늘날에는 성남의 관광지로 먹거리와 놀이동산과 같은 산책로로 쉽게 돌아 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삼전도 또한 쉽게 가볼 수 있는 장소이고, 이 곳에 삼전도비가 있다는 것 또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새삼 느끼게 된다. 어느 때 인가 삼전도비에 ‘철거’하는 페인트로 오염시켰다는 방송 뉴스를 접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이런 장소와 유적들이 우리 주변에 있지만 그 의미와 내용에 대해 무감각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런 여러 가지 내용과 같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소설 속에서 보여지는 임금(인조)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신하에게 지시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비근한 예로 창고에서 젖갈(밴댕이)단지를 발견하고 이것에 대한 처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임금의 재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과연 당시에도 이랬을까? 성안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특별식인 밴댕이젖갈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말먹이를 어떻게 구할 것이냐에서부터 병사들의 추위를 막는—실재 방한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겠지만—가마니를 말먹이로 할 것인가 아니면 말먹이로 할 것인가에 대한 갑론을박하는 대신들의 쪼잔함과 이를 결정해줘야 하는 임금의 심정이 답답하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으면서 목숨이 경각에 있는 상황에서 예를 지킨답시고 진행하는 행동들은 참으로 가소롭게 느껴진다. 힘이 있는 상태에서 인의예지를 따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영예롭게 싸우고 죽던가 아니면 명예를 위한 죽음을 택하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관찰자 입장에서 보는 것과 죽음을 앞에 둔 당사자 입장이 다르니 이것도 뭐라 얘기할 수 없겠다. 어찌 되었든 치욕을 당하며 붙잡은 삶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으니 후손된 입장에서 마음에 새겨야 할 우리의 역사라 생각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내용이 작가의 상상으로 그려낸 이야기이겠거니 하지만 역사적 사실들을 미루어 작가가 지어낸 말들의 내용이 그냥 허구로만 넘기기에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 중에서도 시스템 부재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다. 당시 300년을 이어온 역사 속에 위기대처 시스템이 너무도 허술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 아이디어를 내지 않는 신하들의 무능 또한 임금이 감내해야 할 치욕 중에 하나일 것이다. 대화의 내용 속에 산성에 숨어 있으면서 적을 물리치기 위한 방책에 대한 다각도의 연구와 묘책 강구가 너무도 허술 하다는 생각이며, 많지도 않은 아이디어에 대해 갑론 을박하며 뒤에 따르는 정치적인 위계질서에 의해 무시되거나 면박 당하는 모습은 시스템 부재라는 것을 통감하게 하며 치욕을 당해도 싸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또한 권력층, 다시 얘기해서 기득권층의 솔선수범이 없는 사회제도 속에서는 위기대처 능력이 없어짐은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신분사회 속에 떠 받들림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있고, 누구는 중노동과 이어지는 비참한 삶과 죽음은 차라지 죽음이 더 나은 선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 결과 청병을 따라와 동족—피만 일부 같지만 마음과 몸은 떠난—을 죽음과 업신여김으로 몰아 넣는 통역관 정명수(鄭命壽, ? ~ 1653)의 모습을 보면서 기득권층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생각난다. 얼마 전에 읽었던 ‘로마인이야기’가 생각난다.

     임금이 죽기 살기로 싸운다고 했다면 어떠했을까? 적어도 눈 내리는 산성에 들어가 눈물이나 흘리면서 아홉 번의 절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임금의 모습은 없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한국인은 누군가 확 열 받게 하는 계기만 있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만들어 내는 기질이 다분히 있어 남한상성의 소설도 만들어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치욕의 내용이 아닌 전혀 다른 역사가 그려지지 않았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듯이 그저 상상만 해보지만 목숨을 눈앞에 두고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치욕이 죽음보다는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치욕을 선택한 임금의 선택이 탁월했을까는 당시의 상황이 아닌 오늘날의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역전의 기회를 이런 치욕을 통해 만들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남한산성을 치욕의 역사현장으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어느 영화에 이스라엘인 것 같다. 마사다에 관련된 영화가 생각난다. 그곳을 이스라엘 학생들의 극기훈련장으로 찾는 곳이란다. 마사다와는 다르지만 우리만의 역사로 다시 써 보고 이를 통해 치욕을 선택했던 임금의 선택이 후손들에게 역사의 현장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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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훈이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05 02:34 
    남한산성 - 김훈 지음/학고재 2007년 10월 31일 읽은 책이다. 올해 내가 읽을 책목록으로 11월에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빨리 읽게 되어 11월이 아닌 10월에 다 보게 되었다. 총평 김훈이라는 작가의 기존 저서에서 흐르는 공통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우 냉정한 어조로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다. 소설이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읽었음에도 주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