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판 미·일 가이드라인과 안보 관련 법제 정비를 통해 일본은 그간의 평화헌법이 채워 온 군사적 족쇄에서 벗어나 군사적 의미에서 ‘보통국가‘로 전환하는 첫발을 뗀 것이다. 그 이후의 움직임은 미·일 가이드라인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들이다. 또 일본은 중장기적으로 미·일 동맹을 넘어 독자노선을 모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 P284

저탱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이들은 ‘더러워진 손‘을 감춘 채 생업을 이어갔다. 잘못에 대한 성찰 경험이 없다 보니 사고가 일어나도 자연재해 등 핑계를 대며 적당히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랬던 일본이 이제 와서 ‘순결한 피해국‘ 행세를 하며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나아가고 있다. 이웃 일본의 이런 변화를 지켜보는 심경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 P297

국제정치는 감정이 작동하는 범위가 넓다. 필자는 국가간 관계에서 ‘존엄·감정의 균형‘이 이익 균형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본다. 안보와 경제협력의 필요성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언제든 관계를 그르칠 수 있다. 가해국이 과거에 범한 잘못을 제대로 기억하고 전승하는 것은 존엄과 감정의 균형을 잡는 기초 작업으로, 한·일 관계의 ‘최소 강령‘이기도 하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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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태평양 구상은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대체하는 것이자 21세기판 탈아입구의 성격이 강하다. 중국 견제와 미·일 동맹 강화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 P260

인도-태평양이라는 용어는 2010년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사용하기도 했으나 이를 가다듬어 지역 전략으로 발전시킨 것은 아베의 일본이었다. - P261

인도-태평양 구상은 일본의 ‘남진정책‘의 의미가 있다. 아시아 전략에서 중국의 비중을 줄이면서 일본 외교의 ‘생존 공간Lebensraum‘을 인도양-태평양의 인도, 호주, 동남아시아에서 확보하겠다는 의미다. 미·중 대립 속에서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이 일본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절대적인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부상으로 기존의 아시아 태평양, 동아시아 개념을 활용하는 데 한계가 있자 인도양으로 전략적 공간을 확장하고, 인도를 미·일 동맹 중심의 지역질서로 끌어들이려는 구상이다. - P263

인도-태평양은 아시아의 범주를 밖으로 확장하고 있으나 역내 국가인 중국 견제의 의도를 깔고 있다는 점에서 ‘아시아의 확장‘을 가장한 ‘아시아의 분리‘로 볼 수 있다. 5 동아시아 공동체 핵심 구성국인 한국과 중국의 비중은 인도-태평양 구상에선 자연히 축소된다. - P263

다시 말해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이 인도-태평양 구상으로 대체된 배경에는 중국의 부상과 미·중 경쟁 구도의 형성은 물론 주변국과의 갈등적 상호작용이 깔려 있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 P59

시라이는 일본이 패전을 부인함으로써 영원한 패전을 겪고 있다고 설명한다.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은 미국의 동아시아 냉전 기지로서 종속되는 대신 식민 지배와 침략을 당한 한국과 중국 등 이웃 국가들에 대한 사죄와 책임은 회피했다. 천황과 지도부가 전쟁의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만들어진 ‘무책임의 체계‘와 대미 종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영속패전의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중략)
시라이는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이 패전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전승국 미국에 복종하고 있는 상황을 ‘영속 패전 체제‘로 규정한다. 영속패전 체제의 핵심 구조는 패배의 부인과 대미 종속이다. - P270

시라이는 300만이 넘는 국민의 생명을 희생시킨 국가의 존망이 걸린 패전이었음에도 사실상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었던 전쟁 책임자들의 ‘체제, 그자체의 퇴폐‘가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도 그대로 재현됐다고 비판한다. 패전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같은 과오가 반복되는 것이다. - P271

인도-태평양 전략을 윤석열 정부가 수용하고 한·미·일 안보협력이 강화되는 것은 북·중·러의 최전선인 한국이 기지 국가인 일본의 하위 파트너로 편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미·일동맹 강화를 통한 역내 자율성 확보라는 일본의 전략은 한반도 관련 사안에서 표출되고 있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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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정부의 재해 대처는 악명을 떨칠 정도였다. 매뉴얼에만 의존하는 경직된 관료주의 탓에 다급한 상황에도 늑장 대처하기 일쑤였다. 사고수습과 물자 지원이 한시가 급한데도 고속도로 통행허가증을 받으려면 해당 경찰서에 직접 가서 등록해야 하는 평상시의 시스템이 1주일 넘도록바뀌지 않았다. 재해 지역 실종자 수색을 위해 구조견 5마리를 파견하려다 일본 당국이 ‘광견병 청정 지역‘이라며 난색을 표해 1마리만 보낸 나라도 있다. 긴급 상황에서도 절차를 따지느라 ‘골든 타임‘을 허비하는 당국에 분노가 폭발했다. - P205

일본인들에게 동일본 대지진은 2차 세계대전 패전에 맞먹는 대충격이었다.(중략) 문화비평가 우노 쓰네히로는 원전사고 이후 일본인들이 느낀 감각에 대해 "인간이 만들어 냈지만,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우리의 생활 세계를 내부로부터 갉아먹는" 존재가 "비일상적인 긴장감을 내포한 일상"을 살아가도록 만들고 있다고 표현했다. - P209

재일지식인 서경식 등 마이너리티들은 3·11 이후 일본 사회의 분위기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원전사고는 명백히 ‘인재‘이자 전 세계의 환경과 인류에 해를 입히는 ‘가해‘인데도 일본은 자신들이 겪는 고난과 재난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중략)
"한 묶음의 레토릭으로 국민적 단결을 고무하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려는 것이겠지만, 그 단결을 위해서는 ‘국민의 적‘이 필요한 게 당연한 이치다. 앞으로 어려움이 장기화되고 지배층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쌓여 가면 틀림없이 적을 만들어 내려 할 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국민은 ‘비국민‘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중략) 그럴 때 ‘적‘이 되어 버릴 가능성이 높은 존재가 재일조선인이다." - P210

냉전 해체와 함께 자민-사회당의 보-혁 동거체제가 무너진 뒤 소선거구제 도입으로 보수 양당제 체제로 이행한 일본 정치는 자민당의 대체 세력으로 기대되던 민주당이 철저히 몰락하면서 당초 기대했던 시스템의 균형이 상실되고 말았다. 역사수정주의를 장착한 네오콘 그룹의 거침없는 독주가 2010년대 내내 펼쳐지게 됐다. - P211

고엔지 시위는 한동안 일본 사회를 달궜던 반핵 시위의 예고편이었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청년들이 사고를 계기로 시위에 참가할 뿐 아니라 직접 조직하는 ‘데모 데뷔‘가 사회 현상이 되었다. 1970년대 극렬했던 학생운동 탓에 시위가 터부시됐던 일본 사회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P214

"일본이 작은 나라가 되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인가요?" 도쿄 특유의 무더위에 햇살마저 쨍쨍 내리쬐던 이날 연단에 나선 81세 여성 작가 사와치 히사에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귓전에 생생하다. 그의 질문은 직접적으로는 일본사회가 ‘원전을 안고 갈 것인가‘라는 논쟁을 향한 것이지만 보다 넓게는 ‘포스트 후쿠시마‘의 일본의 방향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원전사고 이후 일본에서는 ‘하산 논쟁‘이 불거졌다. 하산론은 일본이 이미 세계 2위 경제대국이라는 산 정상에 올랐으니 안전하게 하산로를밟아 내려가자는 ‘탈성장론‘을 가리킨다.(중략) 20년에 걸친 장기 불황에 저출산·고령화로 경제 활력이 줄어들면서 일본은 2010년 국내총생산(GDP)이 중국에 추월당했다. 일본이 ‘하산의 시대‘에 접어들었는데도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성장에 집착하는 바람에 해마다 3만 명이 넘는 이들이 자살할 정도로 국민이 불행해지고 있다는 것이 하산론의 주장이다. - P217

센카쿠 문제는 대지진과 원전사고로 일본 사회에 형성된 ‘피해자 의식‘을 한껏 자극한 이슈였다. 지진이 빈발하는 일본이 수십 개의 원전을 국책사업으로 지었던 것이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화근인 셈이고, 그렇다면 일본은 재난의 피해자이면서 전 세계 환경과 인류에 해를 입힌 ‘가해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는 자신들이 입은 피해에만 몰두하면서 "미증유의 재해 극복을 위해 단결하자"는 ‘재해 내셔널리즘‘에 휩싸였다. 영토 문제는 그 단결을 촉진시키는 데 안성맞춤의 소재였다. - P220

일본의 우익들은 부부가 다른 성을 갖는 것을 허용하는 부부별성제를 반대한다. 정치는 남성에게 맡기고 여성은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고남편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을 ‘아름다운 나라‘의 미풍양속으로 여긴다.(중략)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여성 인권과 성평등에 대한 일본 사회의 인식이 한국에 비해 낮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저녁을 겸한 토론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주문한 도시락이 오자 좌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여성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시락을 참석자들에게 분배하고, 그보다 젊은 남성들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어 괜히 필자가 안절부절 못한 적이 있었다. 일상에서 이런 경우를 접할 때마다 ‘일본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만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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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전공투 투쟁에서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정치의 계절‘이 종언을 고한 이후의 일본은 ‘공동의 시대‘ 혹은 ‘아버지 부재‘(중심이념의 부재) 시대가 펼쳐졌다. ‘사회혁명‘ 같은 거대 서사(커다란 한 방)가 사라진 일본에서 서브컬처, 특히 만화가 제공하는 핵전쟁과 세계종말의 상상력에 맡긴 채 소비사회의 일상을 살아가던 이들은 냉전이 맥없이 붕괴된 상황에 허탈감을 안게 된다. 이 공허함을 파고든 것이 1990년대 전반 번성했던 옴진리교 등 신흥 종교가 제공하는 ‘가짜 서사였다. 서브컬처 영향이 강한 세대에게 옴진리교의 세계관은 친숙했다.(중략) 옴진리교가 설파하는 ‘세계 최종전쟁‘의 서사는 1980년대 서브컬처의 서사를 베껴 온 것이었다.
옴진리교의 종말 서사는 기성세대와 기존 질서에 적의를 느끼면서 세상을 리셋reset할 커다란 한 방을 기대하던 포스트 단카이 세대들을 유혹했다. 지루한 소비사회의 일상이 박탈해 버린 ‘삶의 의미를 되찾아 준다고 그들은 여겼다. - P137

‘물질은 넘쳐나지만 의미는 빈곤한 세상‘을 바꾸려는 옴진리교의 테러가 실패하자 청년들은 결국 국가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른 인종이나 국가에 증오감을 쏟아내는 우익단체들의 ‘큰 이야기‘에 탐닉하게 된 것이다. - P138

고바야시는 ‘아버지의 부재‘ 시대에 익숙해진 청년들 앞에 터무니없이 미화된 조부들을 불러내 대면케 한다. 그러나 조부들이 벌인 일은 난징대학살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범죄들이었다. 그들이 살았던 전시는 국가 전체에 심각한 부조리와 허위, 위선이 판치던 시절이었다. - P140

신화처럼 추앙되는 가미카제(자살특공대)도 과장과 기만 투성이였다. 특공대 전과는 과장되기 일쑤여서 필리핀 전선의 어떤 작전에서는 24기의 특공기가 군함 37척을 격침했다는 보고가 올라오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특공대원이 생환하면 큰일이었다. 전투기 고장으로 생환한 대원을 죽이기 위해 특공대를 투입한 적도 있었다. - P141

특공대로 가짜 전과를 만들어 냈다. 게다가 일단 특공에 나갔던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엄청나게 곤란한 일이다. 기껏 만들어 낸 가짜 전과가 없어지고, 특진을 신청한 것도 거짓말이 된다. 이러면 누가 뭐라 해도 장본인이 죽어 주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를 않는다. - P142

한류가 일본에 본격적으로 상륙하던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는 ‘혐한‘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한류는 처음부터 혐한을 동반했던 것이다.
넷우익의 세력화를 2002년 전후로 보는 견해가 많다. 2002년이라는 시점이 중요한데, 한·일 공동월드컵 개최와 북한의 ‘일본인 납치 시인‘이라는 두 가지 이슈가 남북한에 대한 반감을 키웠기 때문이다. - P155

탈냉전 이후 한국, 중국의 국력이 급성장하고, 일본이 봉인해 온 과거사문제가 다시 불거지자 ‘동아시아와 관계를 맺어 좋을 것 없다‘는 ‘탈아脫亞심리‘가 확산된 것이다. 탈아 심리는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폐기하고 ‘인도-태평양‘ 담론을 주창한 아베의 대외 구상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분위기로 작용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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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최고지도자‘가 직접 사죄까지 하며 납치 문제 해결을 시도했으나 일본이 수용하지 않자 해법 도출이 불가능해졌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전원 귀환‘이라는 넘을 수 없는 허들을 설정해 납치 문제를 ‘영구미제‘로만든 것은 ‘가해자‘ 일본이 ‘피해자‘ 지위에 서게 된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처지의 뒤바뀜에서 일본인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다"는 저널리스트 후나바시 요이치의 말은 일본인들의 심리를 정확히 대변했다. - P110

미국의 원폭 사용을 규탄하고 침략전쟁에 대한 자기비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피폭의 비극을 인류의 평화에 대한 보편적인 염원으로 ‘탈역사화‘함으로써 일본의 ‘원폭 피해자 정체성‘은 공허함을 면치 못했다. 이 정체성에 기반한 전후 평화주의가 일본 사회에 공고하게 뿌리내리기 어려웠던 것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그러다 2002년 ‘가해자가 있는 피해자의 처지에 설 결정적인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이 1970~1980년대 일본인 납치 사실을 공식 인정한 것은 일본이 전후 처음으로 가해자를 특정할 수 있는 피해자 정체성을 획득하도록 했다. - P111

납치 문제는 탈냉전 이후 일본의 보통국가 전략에 적극적으로 동원됐다.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중국과의 갈등이 2010년대 일본의 안보화를 추동하기에 앞서 납치 문제는 2000년대 일본의 보통국가 전략을 이끌었다. ‘커튼 뒤‘에 가려진 중국을 직접 겨냥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북한의 납치 문제는 일본의 안보화를 추동하기 위한 국민적 지지의 기반이자 동력으로 활용됐다. - P113

중국과 대만이 1970년대 들어 영유권을 제기하게 된 것은 1968년 유엔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ECAFE가 동중국해 일대 해양 조사를 실시한 결과 센카쿠 열도 주변 해역에 다량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 P117

중국·한국과의 영토 갈등은 일본에서 내셔널리즘의 고삐가 풀리는 계기가 되었다. 장기 불황에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덮쳤고, 그 위에 중국·한국과의 영토 갈등이 점화되면서 ‘강한 일본‘을 희구하는열망이 확산됐다. 그러나 이를 합리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리더십은 없었던 것이 일본의 한계였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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