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피트니스 - 나는 뭔가를 몸에 새긴 것이다 아무튼 시리즈 1
류은숙 지음 / 코난북스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르헤스가 그랬던가. 만약 천국이 있다면, 그곳은 도서관처럼 생겼을 거라고. 나는 그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거기에 하나만 추가해달라고 하고 싶다. 그러니까… 헬스장이요.

학창 시절, 운동을 싫어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아주 많은 것들이 나를 운동으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또 싫어하게 했다. 학교 체육시간에 나는 몸을 움직이는 기쁨과 내게 주어진 육체를 사랑하는 법을 전혀 배우지 못 했다. 그대신 알게 된 건 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운동 신경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같은 거였다. 당연히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엘리트 체육인을 선발/육성하는 방식으로 애들 줄 세우지 말고 생활체육인으로서 운동을 즐겁게 영위하게끔 해줄 순 없었던 걸까. 뭐 그렇다고 내가 무슨 바람직한 체육 교육의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그래도 10대, 20대를 지나고,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면서, 그리고 운동과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내 육체를 긍정하게 되고, 프리웨이트든 머신이든 무거운 것들을 열심히 들었다 놨다 할 수 있게 되었다. 출근 전에 집 앞 헬스장에 가서 데드 리프트와 스쿼트, 벤치 프레스 등등을 하는 습관이 든지도 꽤 오래 됐고. 그 덕에 나는 20대때보다 훨씬 건강해졌다고 느낀다. 전반적인 삶의 활력도 훨씬 더 강해진 것 같다. 그리고 사실 운동의 이유 중엔, 책을 더 잘 읽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이해력이나 인지력 같은 것들도 운동을 하면서 훨씬 강화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건 부가적인 거고, 웨이트 자체가 즐겁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좀 경계하고 싶은 욕망도 있다. 그러니까… 어떤 남성성 표출을 통한 시각적 매력의 향상, 이런 거엔 너무 집착하고 싶지 않다. 원래도 무슨 대단한 몸짱이 되서, 바디 프로필을 찍고 그럴 생각 딱히 없기도 했다만. 물론 넓은 등짝, 떡 벌어진 어깨, 굵은 팔뚝, 잔뜩 업된 엉덩이와 말 다리 같은 허벅지, 이런 걸 갖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 미적 기준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게 웨이트를 하는데 전혀 동기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보면 그런 외형 자체에 집착하다보니 일반인들마저 약물에 손을 대고 로이더가 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나도 그런 욕망이 1순위가 되면, 약물을 통해 엄청난 퍼포먼스와 외형을 가져볼까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실제로 로이더가 됐더니, 운동 효율도 말도 안 되게 올라가고, 한 번 들 거 열 번도 더 들게 되서 처음 사용했을 땐 신세계를 만난 것처럼 느끼게 됐었다는 약물 사용자의 인터뷰들이 인터넷에 많다.

그러니까, 이제껏 해온 것처럼 도 닦듯이, 내가 추구하는 ‘건강한 쾌락주의’에 근거한 피트니스 라이프를 꾸준히 이어나가자. 늦게라도 운동하는 삶의 기쁨을 알게 된 것에 감사하며.

아 그리고 이 책은 트레바리 네 번째 모임에 선정되서 읽게 됐다. 선정되기 전에도 읽고 싶어서 사뒀었음. 그냥 그렇다고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 연구 - 정지돈 소설집
정지돈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게는 책이 중요한만큼, 책이 중요하지 않다. 이건 또 뭔 소린가 싶겠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내게는 책을 읽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쌓인 걸 갖고 나만의 맥락 안에서 소화하고, 배치하고 조립하고 재조직하는 내 정신(이따금 제정신이 아닌 그 정신…)이 중요한 거지, 책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만 그 정신(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따금 제정신이 아닌 그 정신…)이라는 정원을 가꾸는 데에는 꽃도 필요하고, 플라타너스 나무도 필요하고, 꿀벌도 필요하고, 나비도 필요하고, 가로수길도 필요하고, 사슴도 필요하고, 고라니도 필요한 법이다. 정신이라는 정원이 넓어지고, 깊어져서 거대한 숲을 이룬다면, 그 숲은 다채로울수록, 다양한 빛깔을 품을스록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니 고라니가 필요하다. 정지돈은 고라니다….

나는 20대 때 보르헤스를 읽으며, 너무 좋다고, 세상엔 이런 소설도 있구나 하며 감탄했다. 하지만 솔직히 읽으면서 키득거리며 웃진 않았다. 지금 정지돈이 보르헤스가 100년 전에 이미 했던 걸 똑같이 하는 건지 어떤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나는 정지돈을 읽으면서는 매번, 항상, 꽤 많이, 키득거리고 웃는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정말 말 그대로 읽을 때마다) 세상에 무슨 이런 글이 다 있냐고 호들갑을 떨고, 주변의 (몇 안 되는) 책 좀 좋아한다는 사람들에게, 정지돈을 읽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진짜 2023년에 한국에서 살고 있다면,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을 읽고 쓸 줄 안다면,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봤든 안 봤든 (난 안 봄) 영화 <나랏말싸미>를 봤든 안 봤든(안 봤습니다… 송강호 박해일 주연의 <나랏말싸미> 파이팅…), 아무튼 까막눈이 아니라면, 지금 정지돈을 읽어야 합니다. 정지돈은 한국 문학의 현재이자 미래예요(한국 문학의 미래라… 이렇게 진부한 표현이라니…근데 그런 게 있긴 한가…). 아무튼간에 여러분, 정지돈을 읽어야 문학 힙스터 행세(?)를 할 수 있어요. 힙스터, 너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같은 소릴 하는 것이다. 물론 세상엔 문학 힙스터 같은 건 없다…. 문학을 읽는 사람 자체도 별로 없고….

신체 절단에 대한 페티쉬를 가진 안젤라, 부르주아 집안에서 법조인이 되어야 했지만 어딘지 좀 이상한 예술가가 된 조 칩, 진짜 좀 미친 것 같은 (근데 난 왜 웃겼지…) 영화 천재 진양, 나무위키와 싸우는 또또, 역시 금방이라도 돌아버릴 것 같은 (혹은 돌아버린 것 같은) 베티 아줌마와 그녀의 친언니, 건달인지 뭔지 당췌 정체를 알 수 없는 석이 아저씨, 인문학자이자 사상가이자 문화비평가이자 예언자인 배리까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있는 듯한 기이한 인물들을 만나면서, 나는 살면서 접해보지 못 한 낯섦을 마주했다. 물론 이런 낯섦에는 형식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의 소설은 소설을 읽는 감각과 함께, 에세이를 읽을 때의 감각, 예술 비평을 읽을 때의 감각, 학술서를 읽을 때의 감각까지 총동원하게 만드니까. 독서에 필요한 여러 감각들이 종합적으로 훈련/계발되고, 국내외의 예술과 사상을 삶의 맥락에 어떻게 위치시킬지 사유하게 만드는 재료들을 제공하는 그의 소설들. 어쩌면 정지돈의 소설들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자기계발 주체가 되는데 꼭 필요한 필독서일지도? (아님) 그러니 여러분,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대신,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 대신 정지돈의 소설집 <인생 연구>를 읽읍시다. 당신도 성공할 수 있어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피 한 줄의 힘! - 이교수의 광고특강
이인구 지음 / 컴온북스 / 2002년 6월
평점 :
품절


카피라이터이자 서울예대 광고창작학과 교수였던 고 이인구 교수의 책.

저자는 1969년 코카콜라 광고로 커리어를 시작한 광고계의 원로다. 2020년, 83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다고. 가장 유명한 건 “친구는 옛 친구, 맥주는 OB”. 당시 ‘이젠백’이라는 맥주가 새로 출시되어 OB맥주의 아성을 위협했는데, 친구도 오랜 친구가 좋듯 맥주도 오랫동안 곁을 지켜온 OB맥주가 좋다는 메시지를 던져, ‘이젠백’에 빼앗겼던 시장점유율을 되찾았다고 한다. 어렸을 적 라디오로 많이 들었던 방송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도 원래는 대우전자의 기업 PR 캠페인 광고였다고 하는데, 이 캠페인도 이인구 교수의 작품이라고.

광고카피란 마케팅 커뮤니케이션과 설득을 위한 메시지라 정의내리고, 좋은 광고를 수행하는 방법에 대한 이론을 상세하게 소개한다. 광고의 프로세스는 다음 5단계로 이뤄진다고 한다. AIDMA, 즉 주의(Attention) - 관심(Interest) - 욕망(Desire) - 기억(Memory) - 행동(Action). 그런데 이 과정이 잘 일어나려면 포지셔닝이 잘 되어야 한다고 한다. 알리려는 기업이나 브랜드, 제품이 정확한 자리에 잘 자리잡아야 하고, 누구에게 그것을 알릴지, 즉 타깃이 누구인지, 그 타깃이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지셔닝이 잘 이뤄졌다면 그 후엔 어떤 아이디어로 광고할지를 정해야 한다고 한다. 아이디어는 어떻게 생성되는지, 제임스 웹 영의 ‘아이디어 개발 방법론’을 인용하는데 일전에 읽었던 책이라 반가웠다. 그리고 해당 아이디어가 임팩트가 있는지, 제품 혹은 브랜드의 USP, 즉 소비자가 느낄 수 있는 편익과 아이디어가 잘 엮였는지를 체크해보고 착 달라붙게 보여줘야 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소비자 입장에서 이것이 과연 매력적인지,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지, 관심이 갈지, 편익이 있다고 느껴질지를 계속 자문해야 한다고. 이건 헤드라인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다. 광고카피가 일러스트레이션이든, 실사든, 아트와 잘 붙으면서도 매력적이고 또 소비자에게 편익이 느껴지게끔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카피 작성의 방법론에 대해서도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사실 카피라이터라면, 누구나 이렇게 할 듯. 이를테면 은유를 써서 무언가에 빗대어 제품의 강점을 보여주거나 환유를 써서 어떤 요소가 기업이나 브랜드 전체를 대표할 수 있게하는 식이다. 대구를 이루게 해서 주목도를 높이는 것도 방법이고, 두운이나 각운을 맞춰서 리듬감을 주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카피가 일종의 시처럼도 생각되지만, 직관적으로 이해돼야하고, 중학생 아니 초등학교 6학년생이 봐도 바로 이해될 정도로 쉬워야 하니, 시랑은 주어진 과제 자체가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뒤에 각론으로 ‘헤드’, ‘바디’, ‘슬로건’ 잡는 법이 나와있고, 부록으로는 <카피라이터 이인구가 본 세상>의 에세이 및 칼럼이 몇 편 실려있다. 다 읽는 데 한달 정도 걸렸는데, 나를 나름대로 카피라이터로서 성장시켜준 좋은 책, 알찬 책이라고 생각한다. 잘 해나가야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23-09-01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한 줄 쓰는 것보다 카피 만드는 게 제일 어려워 보이네요. 글 한 편 쓸 때도 그 글을 보는 독자를 염두하고 써야 하잖아요. 그런데 카피는 모든 사람이 다 보는 문구로 알려져야 오래오래 기억되잖아요. ^^

칼리아예프 2023-12-26 12:57   좋아요 0 | URL
ㅋㅋ 각기 다른 어려움이 있는 것 같아요. 좋은 예술은 새로워야 하고 미학적으로 완성도를 갖춰야하는데,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야 한다“가 목적은 아니잖아요? ㅎㅎ 문학 혹은 철학은 새로운 언어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구요. ㅎㅎ 직업인으로선 좋은 카피라이터, 좋은 광고인이고 싶지만, 그 정체성이 저의 전부는 또 아니기에, 제가 쓰고 싶은 독창적인 글은 제 스타일대로 써나가고 싶어요. 물론 문장이 간결하고 이해가 크게 어렵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은 ‘좋은 카피를 쓰고 싶은 마음’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겠지만요. 😊
 
아이디어를 내는 방법
제임스 웹 영 지음, 신인섭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 광고계의 전설적인 카피라이터(라고 하는) 제임스 웹 양의 책. 1939년에 나왔고 말 그대로 “아이디어는 어떻게 생산하는가”를 다뤘다. 또한 45p짜리 책이라 아주아주 얇다.

세계에 존재하는 낡은 것이라 치부되는 것들, 그러니까 기존의 세계에 존재하는 요소들을 새롭게 배합하는데서 아이디어는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낡은 요소의 새로운 배합'이 아이디어란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가 낡은 요소라고 부르는, 세상에 존재하는 무언가들을 수집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첫 시작은 자료 수집으로 시작한다.

아이디어 생산은 아래의 다섯가지 단계를 따른다.

1. 자료 수집
- 첫째, 내가 아이디어를 내려고하는 주제와 관련된 자료를 습득한다.
- 둘째, 관련된 자료 외에 일반적인 자료도 필요하다. 이건 평소에 습득한다. '일반 교양'의 습득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셋째, 내가 가진 자료들을 분류한다.

2. 소화
- 자료를 수집했으면 마음의 소화가 필요하다. 자료들을 입력시키고 분류했으면 이에 대해 색다르게 조합도 해보고, 다시 해체도 시켜보고, 이야기를 붙여보고, 생각하는 것이다.

3. 쉬고, 잠자기
- 말그대로 쉰다. 그리고 잔다. 무의식에서 습득한 자료와 정보들이 재구성되도록 작동시키는 것이다. 깨어있다면 산책을 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4. 아이디어 발생
- 생각지 못 한 시간과 장소에서 아이디어가 탄생한다. 지하철에서 오고가다가, 샤워를 하다가, 산책을 하다가, 자려고 누웠다가, 잠에서 깬 직후에. 이렇게 떠오른 아이디어는 잘 메모해둔다.

5. 현실화 및 다듬기
-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킨다. 사람들에게 노출시키고, 의견을 들어보고, 다듬는다.

광고 뿐만 아니라, 예술 분야에서도, 과학 기술과 관련된 분야에서도 이런 식의 발상이 이뤄지지 않을까. 짧지만 핵심이 간결하고 알차게 잘 담겨있어서, 충분히 좋은 독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 좋은 발상을 해내느냐는... 나에게 달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튼, 노래 - 노래와 함께 오래된 사람이 된다 아무튼 시리즈 49
이슬아 지음 / 위고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슬아 작가의 <아무튼, 노래>를 읽었다. 이 책은 이번에 든 트레바리의 두번째 모임에 선정된 책이었다. 나와 노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책.

정준일이 윤종신의 노래 ‘잘 했어요’를 리메이크해서 부른 적이 있다. 가사가 정말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찌질하다. 이 노래는 2021년 1월 월간 윤종신으로 발표됐는데, 당시에 정준일과 윤종신이 한 대담도 함께 유튜브에 올라왔다. 그 중에 정말 웃긴 부분이 있어서 발췌.

윤종신: 발라드 하거나 록 하는 애들 보면 중고등학교 때 찌질이들이 많아.
정준일: ㅋㅋㅋㅋㅋㅋㅋ
윤종신: 학창 시절 연애하고 다닌 애들이 드물어
정준일: 그런데 여자를 좋아해
윤종신: 그런데 인기가 없어. 쭈글이들이 많아.
정준일: 맞아요. 제가 그랬어요.
윤종신: 대부분 그래. 나도 그랬고. 차이고 끙끙 앓다가 말고, 고백도 못 해보고 마음 접고, 아니면 고백했다가 멋없게 퇴짜당하고.

그리고 덧붙이길, 힙합은 좀 덜 그런 것 같다고…. (빈지노 이런 친구들은 인기도 많고, 잘 나가지 않았겠냐는 얘길 덧붙인다) 나는 윤종신의 얘기가 너무 내 얘기라 진짜 너무 웃겼다. 😂 생각해보면 발라드를 들을 때의 나의 정서, 마음, 기억은 내가 처연했던 순간에 늘 가 닿아 있었다. 이를테면 나는 토이의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을 들을 때, 중학생 때 짝사랑하던 여자애에게 버디버디로 고백하고 혼자 침대에 엎드려서 배게에 얼굴을 파묻고 울던 일이 생각난다. 토이의 ‘좋은 사람’을 들으면 고등학생 때 미술학원에서 짝사랑하던 여자애가 나보고 “와 너 진짜 웃기다”라고 이름을 물어보던 모습과 함께 고백을 하던 날에 그 아이가 짓던 어색한 표정과, 버스를 놓치고서 집으로 터덜 터덜 돌아오던 나의 처량한 발걸음이 떠오른다. 모든 10대 남자애들이 이렇게 울면서(😅) 학창 시절을 보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마찬가지로 정준일을 들을 땐, 대학교를 졸업한 2015년부터 2020년까지, 5-6년 정도 약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지낸 시간들이 떠오른다. 감정의 밑바닥과 마음의 어둠, 심연을 본 기억들로 처연해지는 것이다.

이렇듯 어떤 음악들은 귀가 아니라 기억으로 듣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 기억들이 한 인간의 취향을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기억이 없으면 노랫말에 공감할 일도, 음악을 듣다가 울 일도 없을테니까. 자신의 기억에 따라 음악을 찾아듣게 되고 선호하게 되고 그 노래와 공명하게 되는 거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기억은 우리의 음악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재료라고도 얘기할 수 있겠다. 가사와 멜로디, 비트, 목소리처럼 뮤지션이 갖고있고 통제하는 요소가 아니라 뮤지션의 바깥에서 음악의 성질과 맥락을 결정하는 음악의 구성물. 하지만 다행인 건 내 기억엔 슬픔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에 이센스의 3집 정규 앨범 <저금통>이 나와서 쭉 들었는데, 너무 좋았다. 그러니까 이센스의 랩을 듣는 순간, 나는 어느새 내 잘난 맛에 취하기도 하고, 자기애 넘치는 마인드가 되어 인생을 대면해볼 용기를 얻게 되기도 했던 것이다. “사는 게 쉽진 않았지만 난 다 이겨내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어쨌건 다 버티고 살아왔잖아? 난 멋있어, 내가 짱이야, 넌 뭐야?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라는 생각을 품었던 기억, 그 기억이 음악을 온전하게 완성해준 거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좋은 음악이란 건, 그저 좋은 음악가가 만드는 걸로 완성되지 않는다. 완성은 듣는이의 몫이다. 좋은 음악을 듣고 완성시킬 수 있는 좋은 기억들이 있어야 한다. 자기 삶을 잘 가꿔야, 음악을 받아들일 기억도 잘 가꿀 수 있는 것이란 얘기다. 그래서 새삼 성실하게 치열하게 잘 살자는 다짐을 해본다. 내가 들었던 좋은 음악들이 더 완전해질 수 있게. 나의 기억들이 어떤 노래들에 담긴 응원과 위로와 기쁨과 슬픔을 더욱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음악은 음악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