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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연구 - 정지돈 소설집
정지돈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평점 :
내게는 책이 중요한만큼, 책이 중요하지 않다. 이건 또 뭔 소린가 싶겠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내게는 책을 읽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쌓인 걸 갖고 나만의 맥락 안에서 소화하고, 배치하고 조립하고 재조직하는 내 정신(이따금 제정신이 아닌 그 정신…)이 중요한 거지, 책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만 그 정신(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따금 제정신이 아닌 그 정신…)이라는 정원을 가꾸는 데에는 꽃도 필요하고, 플라타너스 나무도 필요하고, 꿀벌도 필요하고, 나비도 필요하고, 가로수길도 필요하고, 사슴도 필요하고, 고라니도 필요한 법이다. 정신이라는 정원이 넓어지고, 깊어져서 거대한 숲을 이룬다면, 그 숲은 다채로울수록, 다양한 빛깔을 품을스록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니 고라니가 필요하다. 정지돈은 고라니다….
나는 20대 때 보르헤스를 읽으며, 너무 좋다고, 세상엔 이런 소설도 있구나 하며 감탄했다. 하지만 솔직히 읽으면서 키득거리며 웃진 않았다. 지금 정지돈이 보르헤스가 100년 전에 이미 했던 걸 똑같이 하는 건지 어떤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나는 정지돈을 읽으면서는 매번, 항상, 꽤 많이, 키득거리고 웃는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정말 말 그대로 읽을 때마다) 세상에 무슨 이런 글이 다 있냐고 호들갑을 떨고, 주변의 (몇 안 되는) 책 좀 좋아한다는 사람들에게, 정지돈을 읽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진짜 2023년에 한국에서 살고 있다면,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을 읽고 쓸 줄 안다면,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봤든 안 봤든 (난 안 봄) 영화 <나랏말싸미>를 봤든 안 봤든(안 봤습니다… 송강호 박해일 주연의 <나랏말싸미> 파이팅…), 아무튼 까막눈이 아니라면, 지금 정지돈을 읽어야 합니다. 정지돈은 한국 문학의 현재이자 미래예요(한국 문학의 미래라… 이렇게 진부한 표현이라니…근데 그런 게 있긴 한가…). 아무튼간에 여러분, 정지돈을 읽어야 문학 힙스터 행세(?)를 할 수 있어요. 힙스터, 너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같은 소릴 하는 것이다. 물론 세상엔 문학 힙스터 같은 건 없다…. 문학을 읽는 사람 자체도 별로 없고….
신체 절단에 대한 페티쉬를 가진 안젤라, 부르주아 집안에서 법조인이 되어야 했지만 어딘지 좀 이상한 예술가가 된 조 칩, 진짜 좀 미친 것 같은 (근데 난 왜 웃겼지…) 영화 천재 진양, 나무위키와 싸우는 또또, 역시 금방이라도 돌아버릴 것 같은 (혹은 돌아버린 것 같은) 베티 아줌마와 그녀의 친언니, 건달인지 뭔지 당췌 정체를 알 수 없는 석이 아저씨, 인문학자이자 사상가이자 문화비평가이자 예언자인 배리까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있는 듯한 기이한 인물들을 만나면서, 나는 살면서 접해보지 못 한 낯섦을 마주했다. 물론 이런 낯섦에는 형식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의 소설은 소설을 읽는 감각과 함께, 에세이를 읽을 때의 감각, 예술 비평을 읽을 때의 감각, 학술서를 읽을 때의 감각까지 총동원하게 만드니까. 독서에 필요한 여러 감각들이 종합적으로 훈련/계발되고, 국내외의 예술과 사상을 삶의 맥락에 어떻게 위치시킬지 사유하게 만드는 재료들을 제공하는 그의 소설들. 어쩌면 정지돈의 소설들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자기계발 주체가 되는데 꼭 필요한 필독서일지도? (아님) 그러니 여러분,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대신,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 대신 정지돈의 소설집 <인생 연구>를 읽읍시다. 당신도 성공할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