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아처는 20대 초반의 미국인으로 부모 없이 결혼한 언니와 살고 있었다. 그녀는 물려받은 유산이랄 것도 없어서 수입이 거의 없었으나 그런 물질적인 것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는 다소 무모한 이상주의자였다. 독립심이 강한 성격에 세상을 두루 보겠다는 자신감이 넘치고 많은 독서량으로 지적인 면모도 빼어난데다 사회에 대한 정의감이 있어서 진보적인 여성 기자와 절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20대 초반으로 세상 경험이 별로 없으면서도 자신의 정의감과 독립심에 자만하는 성향이 있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책에서 배운 정의가 올곧게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다는 고집스러움이 그녀의 성격적 결함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사벨의 나이엔 그런 자만심이 그렇게 큰 결함이 아닐 수도 있다. 그 시기에는 다들 내가 아는 게 다 인줄 알면서 세상 무모하게 살 그런 시기니까.

하지만 이 소설이 쓰여진 19세기에는 이사벨 또래의 여성은 결혼이라는 중대사를 늘 앞두고 있고 한번 잘못 선택한 결혼은 되돌리기가 쉽지가 않았으니 이사벨의 고집과 자만심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려 이상한 사람과 결혼을 하면 인생을 송두리째 비극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일찍이 영국으로 이주해서 부유하게 살고 있던 이사벨의 이모는 이사벨을 영국으로 데리고 온다. 아름다운 대저택에서 살고 있던 이모부와 사촌 랠프는 생기발랄한 이사벨의 상상력이 풍부하고 독립심이 강한 성격에 단번에 매료된다. 그리고 또 한사람 랠프의 친구인 귀족 워버튼경이 이사벨에게 반하게 되면서 그녀에게 청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사벨은 자신의 인생은 결혼으로 시작하지 않을 것이며 너무나 조건 좋은 워버튼 경 같은 사람과 결혼하면 자기 자신은 사라지고 아내라는 존재만 남을 것이란 생각에 그 대단한 청혼을 거절한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부터 알고 지낸 사업가 청년 굿우드도 영국으로 이사벨을 따라와서 청혼을 하지만 이사벨은 거절한다. 자신은 세상을 더 보고 싶고 앞으로 결혼 같은 건 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며 집요한 굿우드의 구애를 내쳐버리는 것이다.

이사벨의 이러한 결정을 옆에서 지켜본 랠프는 결혼하지 않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자유롭게 세상을 두루 경험하고 살 것 같은 이사벨의 인생을 응원해 주고 싶었다. 아직 이사벨은 돈 없이 독신으로 산다는 것의 고달픈 현실을 모를 정도로 대책 없는 청춘이지만 돈이 없으면 자유로운 여성으로 살기 힘들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랠프는 아버지에게 이사벨에게 막대한 유산을 상속해 주십사 간청한다.

뜻밖의 유산 상속으로 부자가 된 이사벨은 세상을 두루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고 그곳에서 그녀를 가슴 뛰게 하는 운명의 남자 오즈먼드와 만나게 된다. 원래 미국인인 오즈먼드는 어릴 때 유럽으로 이주한 유럽 속의 미국인 이민자였고 오래전에 부인과 사별해서 이미 다 큰 딸이 있는 나이 많은 홀아비인데 이사벨은 그를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어떤 점이 이사벨을 사로잡았냐하면 세상의 부와 권력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초연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점,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품에 대한 취향이 세련된 점, 그리고 가난하다는 점이었다. 이사벨이 생각하기엔 이 사람 옆에 있으면 누구의 부인으로 종속된 삶이 아니라 독립적인 자신으로 살아가면서 남편과 예술에 대한 지적인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재산으로 가난한 남편을 구원해 주는 삶을 살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것은 내 생각이지만 어쩌면 이사벨은 조건이 좋지 않은 오즈먼드의 상황 때문에 관계의 주도권을 자신이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것은 오즈먼드가 가난해서 더 좋다는 이사벨의 말에서 짐작한 것인데, 오즈먼드의 가난을 구제해 줄 수 있는 이사벨의 입장은 일종의 권력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사벨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독립적인 기질과 가난한 오즈먼드가 최적의 조합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것은 오즈먼드에 대한 이사벨의 오해였고 환상이었다. 사실 그는 이사벨이 생각하는 그런 인물이 전혀 아니었지만 이사벨은 이미 눈에 콩깍지가 씌워져서 자신이 만들어낸 오즈먼드 외에는 보이지 않게 된 상황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이사벨의 성격적 결함이 크게 작용하게 된다. 자신에 대한 자만심과 고집. 오즈먼드가 어떤 인물인지 세상 경험 많은 이모와 랠프는 뻔히 보여서 그 결혼을 반대하는데 이사벨은 그들보다 자신이 내린 판단이 더 확실하다며 결혼에 대한 결심을 더욱더 확고하게 굳힌다.

 

이사벨의 결혼 생활은 역시나 예상대로 불행해진다. 결혼해서 보니 오즈먼드는 굉장히 속물스러운 사람이었고 세상에 초연한 듯 보였던 모습은 애초에 자신이 가질 수 없었던 부와 권력이니 관심 없는 척 한 것뿐이고 실제로는 남의 이목에 어마어마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이사벨의 돈으로 호화롭게 살면서 이사벨에게는 남편인 자신에게 종속적인 삶을 살 것을 강요하고 이사벨을 자신의 구미에 맞게 통제한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이사벨은 남편에게 맞추려는 모습, 남편이 화를 내면 그것에 대해서 정당한 이유가 있음을 애써 찾으며 남편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이며 결혼한 여자라는 사회적 인습에 꽉 매여서 처녀시절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추구했던 모습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러는 와중에 오즈먼드의 딸을 결혼시키는 문제로 이사벨과 오즈먼드는 크게 싸우게 되고 남편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어 남편을 점점 더 참을 수 없게 된 이사벨은 결국 영국으로 돌아온다.

 

이제 소설의 마지막은 과연 이사벨이 비참한 결혼 생활을 깰 수 있을까에 주목한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독립심 강한 성향과 세상을 넓게 보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가득 찼던 아가씨 때의 이사벨을 기억하며 그녀가 하게 될 선택에 의심을 품지 않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아서 얼얼한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이사벨의 선택이 너무 싫어서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열린 결말이다. 이사벨의 선택은 일단은 실망스럽지만 얼마든지 독자들의 상상력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도 있다는 것인데...

아 정말...결론을 땅땅 내주고 끝내지!!! 마지막에 이렇게 고구마를 먹이다니...

하지만 아무리 열린 결말이라도 나는 이사벨의 선택이 도저히 희망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동안 이사벨의 행적, 잘난 남자가 자신감 있게 결혼 하자고 하면 절대 안 한다고 거절하고, 결혼을 반대하면 더 하고 싶어 하는 그 행적으로 보아 이사벨은 아마 다시 남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모두가 너의 결혼을 깨라고 할 때 이사벨은 아니 깨지 않겠어 끝까지 내 결혼에 책임지겠어할 만한 성향의 사람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사벨의 독립심 강한 성향은 이런 식의 반발로도 뻗어나갈 수 있다는 걸 이 소설 내내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이 긴 소설은 특별한 사건이 두드러지게 일어나지 않으면서 천 페이지 분량을 자랑하는데 거의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지루하냐면 또 그렇진 않다. 특히 이사벨이라는 인물은 분명 좋은 점이 많이 있지만 결함도 있어서 그 심리를 그리는 방식이 굉장히 입체적이라 보고 있기에 재미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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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22 11: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린 결말!
헨리 제임스 심리 묘사의 대가 !^^

망고 2022-12-22 12:41   좋아요 2 | URL
전 열린 결말이 넘 싫어요ㅠㅠ

scott 2022-12-22 15:08   좋아요 2 | URL
영화는 새드 엔딩 이였습니다

제임스 단편 정말 잘쓰는데

한국어판 번역들이 넘 ㅎ 엉망이여서
대 작가의 작품들 안타깝습니다 ㅜ.ㅜ

망고 2022-12-22 15:24   좋아요 2 | URL
영화도 보고 싶어요 영화에서는 이 심리 소설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해요 쉽지 않았을거 같은데🤨 번역은... 저는 원문은 안 봤지만 번역된 문장만 봐도 헨리 제임스의 문장이 엄청 복잡하겠다 싶은 느낌이었어요ㅋㅋㅋ번역하기 골치아프고 어려울거 같아요😆

기억의집 2023-01-01 2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을 헨리 제임스가 아닌 여성 작가가 썼다면 과연 열린 결말로 매듭지었을까요? 이왕 독립적이고 자신의 삶의 주관이 뚜렷한 여성으로 결말 되었으면 헨리 제임스는 소설의 한 획을 그을만한 작품을 썼을텐데… 딱 독립적인 여성상만 보여주는 반쪽짜리 소설이 되었네요…// 저도 이 책 민음사판으로 읽었네요. 어쩐지 뭔가 비슷한 내용을 읽었다 했는데.. 아마 저도 다 읽고 소설사의 한 획을 긋다 말었구나 하고 읽었던 것 같어요. 이 후 헨리 제임스 책 안 읽었고 고전 문학에 대한 매력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어서 고전 문학 안 읽기 시작했어요 ㅠㅠ

망고 2023-01-01 22:50   좋아요 2 | URL
아아 맞아요 열린결말 넘 무책임했어요 저는 사실 이 결말로 작가가 잘난척을 했다는 생각을 좀 했습니다 난 뻔한 결말 안쓴다 이렇게요ㅋㅋㅋㅋ근데 독립적인 여성상도 솔직히 말뿐이었어요 행동으로 주인공이 뭘 보여준건 없잖아요ㅋㅋㅋㅋ인물들의 그때그때 변화하는 심리에만 집중한거 같아요^^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 초상을 그리는 사람은 남성이란 시선이 너무 잘 드러나있죠 그게 좀 시시한 부분이기는 했어요😆

2023-01-06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6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6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6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6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6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인의 초상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30
헨리 제임스 지음, 정상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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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의 마지막 선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열린 결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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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쇼룸
김의경 지음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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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사느냐가 곧 나를 말해 주는 시대에 고작 다이소 제품들이나 이케아에서 가장 싼 가구 정도만 살 수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 하지만 결국 우리가 우리임을 말해주는건 싸구려 물건들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의 온기였음을 잔잔하게 느낄 수 있는 단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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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스트라우트의 바로 직전 소설 오 윌리엄이후 1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부터 시작한다. 아직 새로운 전염병 코비드19에 대해 미국이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던 초기의 시기, 이제 막 미국에도 퍼지기 시작하는 초봄이다. 루시의 남편 윌리엄은 기생충을 연구하는 과학자였기 때문에 이 전염병의 심각성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뉴욕을 떠나 피신해 있으라고 알려준다. 첫째 딸은 남편과 비어있는 시댁으로 들어가고 둘째 딸은 윌리엄의 충고에 따라 뉴욕을 떠나려고 했으나 남편이 그러길 원치 않아서 그냥 뉴욕에 남기로 한다. 루시는 윌리엄과 함께 메인주로 가기로 한다. “당신 생명을 구해주려는 거야라는 윌리엄의 확신에 순순히 따라 나서는 루시.

 


이때까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은 크게 각각 두 곳의 장소에서 주요한 두 명의 인물이 이끌어가는 시리즈로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올리브 키터리지가 대표하는 메인주와 루시 바턴이 자랐던 일리노이주의 앰개시. 이렇게 두 곳의 배경으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그동안의 스트라우트의 소설들에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올리브 키터리지의 세계와 루시 바턴의 세계는 그간 딱히 연결되는 건덕지가 없었는데 이번 소설로 두 세계의 연결을 볼 수 있다. 스트라우트의 소설들을 많이 읽고 좋아하던 독자들은 아마 이번 책으로 예전 인물들을 만날 수 있어서 무척 반가울 것이다. 내가 그랬다.

 

루시가 전남편 윌리엄과 메인주로 이주하면서 살게 되는 집은 바로 밥 버지스(소설 버지스 형제”)가 관리하던 집이었다. 윌리엄과 밥 버지스는 이미 알던 사이였고 그렇게 알게 된 이유가 윌리엄이 젊은 시절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던 조수가 바로 밥 버지스의 전부인 팸이었기 때문이다. 윌리엄과 팸은 그당시 불륜관계였다고 한다.

루시는 밥 버지스를 통해서 캐서린 캐스키(소설 “Abide With Me”)도 만난다. 캐서린은 자신의 아버지 타일러 캐스키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루시에게 들려주고, 밥 버지스와 캐서린 캐스키가 어린 시절 한순간 만난 적이 있음을 알게 되고 놀라워하는 장면도 나온다.

또한 루시는 바로 올리브 키터리지의 소식도 듣게 된다. 루시가 자원봉사하러 간 곳에서 만난 여자가 바로 올리브 키터리지의 집 청소 일을 하는데 루시에게 성질 고약한 노인 올리브 키터리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여전히 트럼프를 욕하고 첫 번째 남편에 대한 얘기도 늘 하고, 여지저기 참견하며 다니는데 좀 외로워 보이는 노인이라면서.

올리브 키터리지가 아직 살아 있다니... 올리브 키터리지의 팬인 나는 참 반갑고 짠해지는 순간이었다!

올리브 키터리지의 소식 속에 스치듯 이저벨(소설 에이미와 이저벨”)의 근황도 나온다. 거동을 못 한다는...

, 이런 식으로 루시 바턴 시리즈의 세계관과 올리브 키터리지 시리즈의 세계관이 만나게 된다. 어쩌면 다음 소설에서는 루시와 올리브가 직접 만나는 장면도 가능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오 그렇다면 스트라우트의 다음 소설을 읽을 이유가 또 생긴 셈이다. 과연 올리브와 루시는 만날 것인가 두근두근.

 

 

이렇게 루시는 메인주로 피신해 와서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겪는다.

일단 루시와 윌리엄이 머물고 있는 집은 거실 창을 통해 바다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전망 좋은 집이다. 뉴욕보다 훨씬 춥지만 경치는 끝내 주는 곳. 이곳에서 루시는 변화무쌍한 바다를 관찰하고 날씨를 예민하게 느끼며 매일 주변을 산책하며 지낸다. 나는 루시가 묘사하는 이 집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사실 너무 부러웠다. 아니 이런 경치 좋은 곳에선 코로나로 갇혀있다 한들 얼마나 좋아. 매일 바다 보면서 먹고 자고 바다 보면서 산책하고...나라면 정말 잘 갇혀 살 수 있을 거 같은데...했는데 루시는 여전했다. 우리가 그동안의 책들에서 보아온 바로 그 루시였던 것이다. 낯선 곳을 무서워하고 종종 공황발작을 일으키며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서 다 벗어나지 못 한 루시. 문득문득 어릴 때 겪었던 가난과 부모의 학대가 생각나고, 재혼했었던 남편과 2년 전에 사별한 아픔이 마음속에 비통함으로 남아 있는 루시.

나는 이런 루시를 보면서 사실 좀 아 루시 또야?’ 하는 불평을 마음속으로 했다. 이미 오 윌리엄에서 루시의 감정상태를 공감하고 이해했고 안타깝기도 하고 장하기도 하다며 응원했는데 다시 또 그것을 반복하자니 좀 지치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1년이라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고 사람이 1년 동안 뭐 얼마나 변하겠어. “오 윌리엄에서의 루시나 이 책에서의 루시나 그 루시가 그 루시인 건 잘못된 게 아닌 거다. 그러고 보니 나는 루시를 대하는 방식에서는 윌리엄의 성향과 비슷한 면이 있는 거 같다. 윌리엄은 루시 옆에서 위로도 해주고 힘든 세상일을 척척 해주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지만 루시가 감정적으로 공감을 얻고 싶을 때 거의 대부분 아무 말도 안 해주거나 루시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 루시는 이런 윌리엄에게 화가 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이해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우울하고 슬픈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루시 자신도 알고 있으니까.

뉴스에서 코로나로 죽은 사람들의 관이 쌓여있는 장면이나 루시도 아는 지인의 부고 기사나 인종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들이 나올 때 루시 자신도 그것들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화면을 응시하지 못 하고 눈을 돌리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언젠가 밥 버지스는 루시에게 루시의 소설은 어머니와 딸에 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서 계급을 가로질러 건너려고 노력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해준다. 자신 또한 루시 보다는 아니지만 가난한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면서. 루시는 이 말을 듣고 밥 버지스를 좋아하게 된다. 약간 사랑일지도...^^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루시는 자신이 소설에서도 썼던 계급차이를 현재 더 확연히 느낀다

뉴욕에서 피신 온 사람들에게 토착 주민들은 뉴욕 사람들을 돈 많은 잘난척쟁이라며 적대감을 드러낸다. 루시네 차에다가도 뉴욕으로 꺼져버리라는 종이를 붙이기도 한다.

루시의 언니는 아직 앰개시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데 하필 코로나 상황에서 근본주의 교회에 등록을 해서 매주 교회에 참석한다. 그러면서 뉴스는 다 거짓말이며 교회에 다니면 코로나에 안 걸린다는 믿음을 굳게 믿고 있다.

루시의 오빠는 부모가 살던 작은 집에서 여전히 혼자 살고 있다. 코로나 이전이나 지금이나 혼자서 고립된 채 사는 건 마찬가지라던 그는 코로나에 걸려도 병원을 가지 않는다.

루시가 푸드 뱅크에서 자원 봉사 하다가 만난 여자는 요양원 청소일을 하는데 트럼프 선거 캠페인을 차에 붙이고 다닐 정도로 열혈 지지자다.

루시는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 이들을 사회에서는 무시하고 경멸해 왔다. 온갖 매체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묘사하는 방식,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들을 대하는 경멸적 태도 등에 이들은 화가 나있다.

루시 자신도 언젠가 대학에 강연을 하러 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만난 학생들의 태도에 당황한 적이 있었다. 루시가 쓴 책에서 루시 아버지에 대해 천박하다며 경멸하는 학생과 루시를 바라보지도 않고 질문도 하지 않는 학생들. 부자 동네 출신들이 대다수였던 학생들은 루시가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난을 이해하지 못 했다

루시는 이들의 태도를 어떻게 느꼈던가. 루시는 속으로 깊은 분노를 느끼고 학생들을 저주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신을 마주하며 놀라기도 한다.

루시는 그 당시 자신을 돌아보며 루시가 한때 속했던 계층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분노를 이해한다.

아울러 인간은 상실감을 느끼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음도 경험으로 이해한다. 내가 가지지 못 했다는 상실감, 내가 존경 받지 못 하고 있다는 상실감 등은 어떤 계층에서도 겪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루시 자신이 윌리엄과의 결혼 생활 동안 윌리엄의 불륜을 알게 되고난 후 자신 또한 바람을 피운 것과 연결해서 생각한다. 현재 루시의 딸들이 남편의 불륜과 유산의 상실감을 겪으며 어떤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지를 보면서도 생각한다.

그들을 이해하는 것, 완벽하지 않은 인간을 연민하는 것, 그렇게 나를 돌아보는 것.

바닷가에서 루시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인간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며 루시답게 이렇게 보낸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들. 저기 위에 "타인의 여름"은 "에이미와 이저벨" 번역서다. 1999년엔 저런 제목으로 나왔더라.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고 너무 감동 받아서 중고 서점에서 산 책이다)




루시가 우울해하는 걸 읽을때마다 내가 좀 투덜대긴 했지만 여전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글은 너무 좋다. 간결하고 짧지만 깊다. 그래서 내년에 나올 소설도 기대가 된다. 또 루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작가님의 글을 계속 읽는 다는 건 큰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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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05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타인의 여름이란 제목으로 출간된적이 있었군요
바닷가 루시 완독하신 망고님
내년 신작 설레이는 맘으로 기다려 보귀😍

망고 2022-12-05 17:57   좋아요 1 | URL
타인의 여름 당시엔 이런식의 제목이 유행이었나봐요 비슷한 제목의 영화도 있었던거 같고ㅎㅎㅎ 내년에도 과연 가을에 신작이 나올까요? 두근두근
 
Lucy by the Sea (Hardcover)
Random House Group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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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윌리엄‘ 이후의 팬더믹 상황을 살아가는 루시. 루시 시리즈 뿐만 아니라 작가의 전작들 속의 인물들이 한번씩 나와서 반갑기도 하지만 루시는 여전히 루시였다 ‘오 윌리엄‘에서 봤던 루시! 또다시 그 루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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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01 18: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트라우트 작품속 모든 인물들이 전부 나오나봅니다
루시 그 루시 내년 신작에도 😊

망고 2022-12-01 18:58   좋아요 2 | URL
주요 인물들이 한번씩 언급되는데 오랜 친구 만난듯 반갑더라구요ㅋㅋ근데....여운이 남으며 감동스러웠던건 오 윌리엄 읽고나서였는데...이번 루시는 약간 좀 너무 텀이 짧았던듯해요^^또 루시? 이런 느낌이요🤭그래도 작가에 대한 제 팬심은 식지 않았답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