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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티드 드럼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평점 :
미국 원주민 오지브웨족(치페와족이라고도 불림)의 혈통인 작가 루이스 어드리크는 매 작품마다 미국 원주민 캐릭터를 등장시키거나 아예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쓰는 것 같다. 나는 이 소설까지 4권을 읽었는데 모든 작품에서 미국 원주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미국 원주민 캐릭터가 등장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문학 작품을 진지하게 읽은 경험이 그동안 없었기 때문에 작가 루이스 어드리크는 나에게 새로운 앎을 준 소중한 작가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가를 자신이 속한 민족의 이야기만 한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루이스 어드리크의 작품을 읽다보면 아름답고 사색적인 문장 속에서 배어나오는 인간에 대한 통찰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된다. 그래서 혹시나 ‘미국 원주민 문학? 뭐 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루이스 어드리크의 작품을 한권이라도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슬픔과 고통, 사랑과 치유 등의 인간 보편의 삶을 묵직하게 담아내는 이야기와 문장에 선입견은 쏙 들어갈 테니까.
이 소설은 오지브웨족의 전통적이고 신화적인 삶을 들려주면서 슬픔으로 무너져 내린 인간의 삶이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페이 트래버스는 뉴햄프셔주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50대 중년 여성이다. 한때는 마약 중독자였다가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지금은 어머니가 하는 죽은 사람의 물건을 정리해 주는 사업을 같이 하고 있다. 이웃에 조각을 하는 예술가인 크라에와 연인 사이인데 그와 관계가 점점 깊어지는 것이 썩 좋지만은 않은 것 같다. 페이는 내면에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 하는 부분이 있고 그런 상태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다.
크라에는 전부인 사이에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이웃에 사는 문제아 청년과 사귀다가 자동차 사고로 죽고 만다. 그 사고로 태트로라는 영감도 같이 죽었는데 그는 젊은 시절 인디언 보호구역의 관리자였다. 태트로 영감의 유품을 정리하러 간 페이는 그 집에서 채색되어 있고 여러 장식이 붙어 있는 오지브웨족의 북을 발견하게 된다. 아니 북이 페이를 끌어당겼다고 할 수 있다. 아무도 치지 않았는데 북의 소리에 이끌리게 된 페이는 홀린 듯 북을 훔쳐서 집으로 가지고 온다. 오지브웨족 혈통이기도 한 페이는 백인인 태트로가 그 북을 정당한 방법으로 얻지 않았으리라 확신하며 북은 오지브웨족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시 오지브웨족 혈통인 페이의 어머니는 부족의 전통적인 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알려진 바로는 북은 사람을 고치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북은 그것을 보관하는 사람과 하나가 된다. 북은 진지한 이유 때문에 만들어지고, 꿈에서 북의 구조를 세밀하게 본 사람들이 만든다. “북은 뼈로 된 인간보다 더 살아 있어.” (63쪽)
북을 보관하고 있어서 그런지 페이는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슬픔이 자꾸만 터져 나올 것 같은 위기를 느낀다. 그것은 딸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있던 크라에가 그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려는 과정에서 페이가 방치하고 있는 사과나무들을 살려내는 작업을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랫동안 방치된 사과나무들은 오랫동안 꾹꾹 눌러온 페이의 슬픔을 상징한다. 어린 시절 여동생을 떨어져 죽게 한 사과나무 그리고 그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페이의 슬픔을.
페이와 어머니는 북을 돌려주러 오지브웨족 보호구역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북이 만들어진 과정을 듣게 된다. 그러니까 페이의 외증조 시대까지 올라간 이야기다.
한편에서는 굶주린 늑대에게 딸을 잃은 슬픔과 분노로 삶이 망가진 남자가 꿈속에 나타난 딸의 말을 듣고 북을 만드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남편을 떠난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의 집에 갔다가 그의 부인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를 정령으로 나타난 딸 덕분에 넘기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늑대에게 죽은 소녀가 채색된 북이 되어 이 모든 사건의 책임이 있는 남자에게 복수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인간의 슬픔과 고통에 북이 어떻게 관여하는지를 담고 있다.
정성스럽게 북을 만드는 과정 그자체가 깊은 슬픔으로 망가진 삶을 되살려 치유하는 방편이 되기도 하고, 또 완성된 북은 북을 치는 행위, 즉 북의 노래를 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치유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혹은 우리 손에 들어온 것으로 그 슬픔을 누그러뜨린다는 거예요. 우리는 슬픔에 대해 말하고 그것을 헤쳐나가야지, 가슴속에 둬서는 안 돼요. 그래서 북이 필요한 거예요. 그 슬픔을 밖으로 꺼내려고. 북의 노래가 슬픔을 멀리 실어가게 하려고.
(146쪽)
북을 보관하고 있다가 북이 있던 제자리로 돌려주면서 북과 관계된 사람들의 슬픔과 치유의 방법을 듣게 된 덕분일까? 다시 집으로 돌아온 페이는 어머니와 마주한 자리에서 슬픔을 툭 꺼내 놓는다. 그것은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동생이 죽던 날의 진실은 한두 문장이면 되었다. 그 간단한 말을 하지 못 해서 페이는 내내 슬픔과 죄의식 속에서 살아왔다. 이제야 꺼내놓고 드러내는 슬픔으로 페이는 치유됨을 느낀다. 슬픔은 그렇게 꺼내 놓아야 하는 것이었다.
크라에가 손질한 사과나무에서는 드디어 꽃이 피고 사과가 달린다. 다시 살아난 사과나무 과수원엔 곰이 와서 사과를 따먹는다. 황폐했던 과수원이 생명을 끌어 들이고 있다. 페이의 마음에도 생명이 싹튼다. 그것은 사랑이다.
삶이 당신을 부숴놓을 것이라고. 그 사실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줄 사람은 없고, 그것은 혼자 살아도 마찬가지라고. 고독 또한 열망을 자극하여 당신을 부숴버릴 테니까. 당신은 사랑해야 한다. 당신은 느껴야 한다. 그것이 당신이 이 땅에 태어난 이유다. (352-353 쪽)
여기서 페이가 깨달은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사랑을 아우른다.
페이는 여동생이 묻혀있는 아동 공동묘지에서 날아오르는 갈까마귀를 보며 생각한다. 묘지에 묻힌 자들을 분해시키는 여러 작은 생명체들을 먹는 갈까마귀는 묘지에 묻힌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니 갈까마귀는 죽은 자들의 정령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겠냐고. 오지브웨족이 북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듯이 페이는 묘지의 갈까마귀에게서 죽은 동생을 본다.
그리워하는 이들의 정령이 깃들어 있는 자연에서 위안을 느끼며 페이는 비로소 오랜 슬픔과 화해를 한다.
그동안 루이스 어드리크의 소설들을 읽어오면서 수차례 문장이 아름답다고 말해왔다. 이 소설도 그렇다. 특히나 슬픔을 말하는 것에서 아름다움은 더욱 빛난다. 밤에 자기 전 어쩔 수 없이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는 상처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려고 하는 순간을 하루 종일 밟고 다닌 발걸음 소리로 표현해낸 문장을 읽었을 때 한동안 먹먹해져서 다음 페이지로 책장을 넘길 수 없었던 경험을 하기도 했다.
소설의 이야기도 무척 아름다웠다. 대부분 인디언 보호 구역 안에서 일어나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결국엔 희망이 있는 이야기들이라 안심이 되었다. 그 희망은 공동체의 협력과 인간에 대한 연민, 자연에 대한 존중이다.
슬픔을 아름답게 그린다면 희망 또한 참 아름답게 그려낸 소설이었다.
루이스 어드리크의 다른 책도 사뒀다. 계속 읽어야지! 작가님 글이 너무 좋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