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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7월
평점 :
이 소설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는 사이의 시기에 노스다코타주 아거스라는 작은 타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독일에서 대대로 도축업을 해온 집안 출신인 피델리스는 1차 세계대전에서 저격수로 복무했다가 돌아와 전쟁 중 죽은 친구의 애인 에바와 결혼을 한다. 그 후 피델리스는 도축과 소시지 만드는 집안의 비법을 전수받아 전쟁 후 살기 힘들어진 독일 땅을 떠나 미국으로 가게 된다. 형편이 어려운 피델리스는 독일에서 가방 한가득 소시지를 가지고 왔는데 이것을 팔아서 뉴욕에서 노스다코타주의 작은 타운 아거스까지 가는 기차 삯을 마련하게 된다. 원래는 돈을 더 모아서 서부로 가려고 했으나 일단 아거스에 자리를 잡게 되자 평생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정착하고 만다. 피델리스는 열심히 일해서 정육점을 차리고 마을의 마음 맞는 남자들을 모아서 노래클럽을 만들어 맥주와 소시지를 먹으며 노래를 하면서 미국 땅에서의 삶을 살아간다.
제목만 보면 이 정육점 주인 피델리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거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피델리스의 가족들 이야기가 주를 이루긴 하지만 피델리스와 그 가족들은 델핀이라는 여성 캐릭터가 엮이는 이야기 속에서 존재한다.
아거스가 고향인 델핀은 평생 술주정뱅이 아버지 뒤치다꺼리를 하고 살았지만 무대에 서는 배우가 되고 싶었던 꿈 많은 소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드디어 지긋지긋한 아버지와 작은 마을 아거스를 떠난다. 배우가 되는 꿈을 이루고 싶었으나 균형잡기의 달인인 잘생긴 남자 시프리언을 만나서 균형잡기묘기를 공연하며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게 된다.
델핀은 시프리언을 무척 사랑하고 시프리언도 델핀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저 한 침대를 쓸 뿐 여동생처럼 대할 뿐이다. 시프리언의 사랑을 의심하던 델핀은 어느 날 시프리언이 남자와 관계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시프리언은 게이였던 것이다. 때는 20세기 초 동성애를 입에 담지도 않았고 그것을 정의하는 단어도 잘 알지 못 했던 시절, 델핀은 시프리언의 그런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와 닿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오누이처럼 지내다가 여기저기 떠도는 삶과 진전 없는 시프리언과의 관계가 지겨워 델핀은 시프리언과 고향으로 돌아온다.
주정뱅이 아버지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은 난장판에 역겨운 냄새가 진동을 했다. 델핀과 시프리언은 열심히 청소를 해 보지만 아무리 해도 역겨운 냄새는 사라지지 않아 애를 먹던 중 드디어 그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내는데, 바로 지하 저장실에 세 명의 썩어가는 시체가 그것이었다. 늘 술에 취해 정신없는 아버지는 자신의 집 지하에 있는 시체의 유무도 알지 못 했다고 주장한다. 마을의 보안관이 수사를 시작하면서 델핀과 시프리언은 사건과 관계된 사람이라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이렇게 마을에 정착하게 된 델핀은 피델리스의 부인 에바와 친구가 되면서 에바를 도와 정육점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렇게 델핀과 에바는 우정을 쌓아 가는데, 나는 이 소설 속에서 나오는 어떤 로맨스 보다 델핀과 에바의 사랑이 아름답고 애틋하게 느껴졌다. 물론 남녀 간의 사랑 같은 그런 성적인 이끌림이 가미된 사랑이 아닌 깊은 우정이지만 델핀이 죽어가는 에바에게 헌신하는 모습, 죽어가는 자신의 허약한 몸을 온전히 델핀에게 맡기는 에바의 모습은 너무나 눈물 나게 아름다운 사랑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이후 에바를 사랑하는 마음에 델핀은 에바의 자식들까지 사랑하게 되고, 혼자 남겨진 남편 피델리스를 챙겨달라는 에바의 유언으로 그를 마음에 담게 된다.
사실 델핀과 피델리스가 정말 사랑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 둘의 애정의 묘사가 부족하게 느껴지는데, 아마도 델핀과 에바의 절절한 우정이라는 후광이 너무 강력해서 델핀과 피델리스의 사랑이 조금 약하게 느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델핀이 마을에 돌아와 집에서 시체가 발견되고 정육점 가족들과 엮이면서 마을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게 된다. 독특한 캐릭터와 다채로운 감정들이 넘쳐나서 페이지를 넘기는 시간들이 꽤 즐거웠다.
델핀의 한명 뿐인 절친 장의사 친구와 그녀를 좋아해서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보안관 이야기는 섬뜩함을 안겨 주고, 마을을 빠른 걸음으로 부지런하게 걸어 다니는 넝마주이 스텝앤드어해프의 이야기는 예상치도 못 한 반전으로 출생의 비밀이 풀리는 결말로 나아가고, 알콜중독자 델핀의 아버지가 술을 먹게 된 이유인 떠나간 연인의 존재와 숨기고 있는 비밀은 놀라움을 안겨주기도 했다. 피델리스의 누나 탄테는 못되고 이기적인 캐릭터인데 그 까탈스러운 성격을 빳빳한 원단의 정장을 입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한 점은 웃기고 재밌기도 했다.
루이스 어드리크의 소설을 이것까지 3권을 읽었는데 읽을 때 마다 문장을 참 아름답게 쓴다고 감탄하게 된다. 문장이 화려한 편이라 비유와 은유가 많고 시적이고 서정적인데 그것이 공허하게 그저 아름다운 묘사로 그치는 게 아니라 뼈있는 삶의 통찰이 담겨 있다. 그래서 책 여기저기 북마크를 꽤 많이 붙여 놓게 된다.
풍부한 문장을 읽는 재미만으로도 루이스 어드리크의 소설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 별 넷을 준 이유는 작가가 할 말이 정말 많아서 꽉꽉 채워서 쓴 거 같은 이 소설이 오히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약간 산만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을 조금 줄이고 주요 인물에 더 집중했으면 하고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사실 피델리스의 아들들 이야기 보다 스텝앤드어해프의 이야기나 델핀의 장의사 친구 이야기가 훨씬 더 흥미롭고 궁금했는데 너무 적게 나와서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