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비치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동안 제니퍼 이건의 소설들을 읽어 오면서 인상 깊었던 점은 현 시대의 유행을 잘 잡아낸 소재와 스타일이었다. 매우 감각적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파격적이기도 한 여러 시도들을 제니퍼 이건의 소설들에서 읽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 맨해튼 비치는 대공황에서부터 2차 대전이 한창인 시기까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다가 꽤나 전통적인 소설 작법을 따르고 있어서 이때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작가의 인상과는 다른 제법 낯선 제니퍼 이건을 만날 수 있었다. 600페이지가 넘는 긴 소설인데도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낯섦이 싫지는 않았다.

 

 

이 소설은 11살 애너 케리건이 아버지 에디 케리건과 바닷가 아름다운 대저택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집은 바로 마피아 중간 보스 덱스터 스타일스의 집이었다.

에디와 덱스터가 사업상 은밀한 이야기를 나눌 동안 애너는 덱스터의 자식들이 있는 놀이방에 남겨진다. 생전 처음 가보는 으리으리한 부잣집에 기가 죽었지만 에너는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추운 겨울 맨발로 바다에 발을 담글 만큼 대범한 모습으로 놀이를 주도한다.

애너의 그런 모습에 자식을 보면 그 아버지를 알 수 있다는 믿음이 굳건했던 덱스터는 딸이 이렇게 거침없고 용감하다면 그 아버지 또한 그러리라 확신하며 에디를 고용하기로 한다.

이 첫 번째 장이 이 소설이 앞으로 전개될 방향을 알리는 하나의 커다란 복선인 셈이다.

용감하게 바다에 들어가는 애너와 그 모습에 강력한 인상을 받는 덱스터와 한 발 물러나 그들을 보는 에디.

 

 

시간은 애너가 20살이 될 즈음으로 훌쩍 뛰어넘는다. 실직하고 가난으로 내몰렸던 대공황 시대의 가족들은 이제 전쟁에 참전한 남성들의 빈자리로 인해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해 생계를 책임지는 가족들로 변모하는 시절이었다. 애너도 여성들로 채워진 해군 공창에서 배의 부품을 검수하는 일을 하고 있다.

애너의 아버지 에디는 이미 5년 전에 집을 나가 감감무소식인 상태다. 애너의 여동생 리디아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제 발로 일어서지도 못 하고 말도 못 하는 상태였는데, 이런 장애아가 있는 가족에게서 아버지의 가출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에디의 부재도 그 이유일 것이라 추측되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애너는 우울한 가족사에도 불구하고 공장에서 점심시간에 자전거를 빌려 타고 돌아다닐 정도로 당차고 활발한 인물이다. 자전거 타는 게 뭐가 대수냐 싶겠지만 1940년대 해군 공창에서 아무리 여자들이 많이 일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일대를 활보하고 다닌다는 건 남자들의 눈요기 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애너에게 자전거를 빌려준 넬이라는 친구도 일전에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서 남자들의 성희롱성 야유를 들은 이후 자전거 타기를 중단한 상태였다.


이런 애너의 눈에 들어온 신기한 장면이 있었으니 그것은 거대한 옷을 입고 무거운 헬멧을 쓰고 바다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바다 속에서 배를 수리하거나 시체를 찾아내는 다이버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애너는 다이버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애너는 어릴 때부터 바다를 보며 바닷물이 다 빠지고 나면 그 자리엔 무엇이 있을까 상상하곤 했었다.다이버라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 현재, 애너는 다이버가 되어서 바다 밑바닥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성 다이버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 에너의 도전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다이버 훈련을 맡고 있는 중위는 애너를 번번이 무시하고 이 직업이 남성들만이 해낼 수 있는 어려운 일이라 장담하며 어떻게 해서든 애너를 떨어뜨리려 한다. 하지만 애너는 그럴 때마다 과제를 잘 해내며 실력으로 편견을 깨부순다.

 

애너의 다이버 도전은 2차 대전이 한창인 때 뉴욕의 해군 기지와 맨해튼 해변의 세밀한 묘사 그리고 당시의 사회상을 잘 반영한 생생한 이야기로 큰 재미를 준다. 게다가 다이버들 사이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애너와 유일한 흑인이라 은근히 따돌림 받는 말리의 존재를 빗대어서 미국 사회의 다양한 차별이라는 속내를 이야기 속에 조용하게 비춰 주기도 한다.

 

한편 애너의 삶에서 다이버로의 새로운 도전은 밝고 생기 있는 미래를 희망하게 한다면 덱스터 스타일스와의 우연한 만남은 애너를 아버지의 실종이라는 음산한 사건으로 데리고 가는 역할을 한다.

친구들과 간 나이트 클럽에서 그곳의 주인인 덱스터 스타일스를 보게 된 애너는 그가 11살 때 아버지와 찾아간 집의 주인이었음을 기억해 낸다. 대범한 성격의 애너답게 충동적으로 덱스터에게 인사를 하며 본능적으로 자신의 본명을 감추고 가명으로 자신을 소개하는데 덱스터는 애너의 그 충동성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두 번째 만남에서 애너는 덱스터에게 또다시 대범한 도전을 한다. 바로 동생 리디아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싶은데 차로 좀 데려다 주십사하는 부탁이었다.

냉엄한 마피아 덱스터가 애너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 하는 이유로 그를 표현하는 문장을 한번 살펴보자.

 

덱스터는 이 딱한 사연의 요소들이 그를 에워 싼 채 돌멩이처럼 떨어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피니(=애너) 양이 입은 수수한 울 코트는 소맷부리가 다 해졌다. 이것이 그의 약점이었다. 사람들의 불행을 간파하는 능력. (217)

 

나는 이 문장이 참 좋았다. 사람들의 불행을 간파하는 능력 이라니. 너무 딱 들어맞는 표현 아닌가. 냉엄해 보이지만 인간적인 마피아. 약간 로맨스 소설의 나쁜 남자 같은 느낌인데 이 소설에서 덱스터를 다루는 방식이 딱 그렇다. 터프하지만 로맨틱한.

애너가 나이트 클럽을 다시 찾았을 때 다른 남자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질투에 이글이글 타올라 애너를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라든지 캄캄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애너 혼자 잠수해 들어가 있자 불안해서 모두의 만류를 무시하고 자신도 바다에 들어간다든지 하는 장면. 애너와 덱스터가 함께하는 부분에서는 장르가 잠시 로맨틱한 드라마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덱스터는 어둠의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마피아 보스 밑에서 일하는 동시에 노회한 은행장 집안에 장가가서 그들 세계에서 겉으로는 환영받지만 속으로는 배척받는 입장에 있다. 덱스터는 그 두 세계에서 위태롭게 줄타기 하는 인물로 결국 애너와의 관계로 그 자신이 파국을 맞는다.

한편 애너는 덱스터와 가까워지면서 점점 아버지에 대한 진실에 가까워진다. 아버지의 실종은 덱스터와 관련이 있었고 급기야 덱스터가 에디에게 한 짓을 알게 된 애너. 하지만 그게 과연 진실일까?

 

 

에디에 대한 이야기는 이 소설 후반부를 지탱하는 큰 반전이다.

뉴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배경인 해군을 돕는 상선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펼쳐지고 거기에 타고 있는 다채로운 뱃사람들의 생생한 묘사는 소설 읽기의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기도 한다.

결국 남아프리카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는 정직하고 착한 본성 그리고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에디의 이야기는 뉴욕에서 다이버에 도전하고 혼자서 꿋꿋하게 삶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애너의 이야기와 맞물린다. 속해 있는 세계는 다르지만 바다에 도전하고 살아남는다는 점은 애너와 에디의 부녀사이를 연결하는 공통점이다.

다시 이 소설의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서 맨발로 바닷가에 서 있는 애너를 보고 딸의 강인함은 아버지를 닮았겠구나 추측하는 덱스터를 떠올려 보게 된다.

 

 

나는 이 소설을 참 재밌게 읽었다. 오랜만에 두툼한 장편 소설을 만족스럽게 읽은 느낌이다.

그 시대에 대한 자료조사가 상당히 꼼꼼하게 이루어졌는데 그것을 20살 애너와 그 가족들, 주변 인물들의 삶에 잘 버무려 넣어서 아주 생생하게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항만노동조합을 꽉 잡고 있는 아일랜드계와 어둠의 세력 이탈리아계 마피아, 자본을 장악하고 있는 상류층 청교도들이라는 미국 이민의 역사도 배경으로 은은하게 깔려 있다는 점이 소설에 깊이를 더하기도 했다.

최초의 여성 다이버라는 신선한 소재와 범죄 누아르 로맨스 해양 소설의 요소들을 이 소설 속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전혀 산만하지 않다. 이야기에 이야기가 계속해서 펼쳐지면서 점점 윤곽이 드러나는 각각의 인물들은 그 묘사도 훌륭하고 문장도 무척 아름다웠다.

제니퍼 이건의 소설을 더 읽어봐야겠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거서 2023-03-06 21: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니퍼 이건의 소설을 읽고 싶어지네요. ^^;

망고 2023-03-06 21:33   좋아요 2 | URL
오거서님 이 책 재밌어요 강추입니다😄

오거서 2023-03-06 21:35   좋아요 2 | URL
망고님 덕분에 지금 제니퍼 이건 소설 찾아보면서 올인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

망고 2023-03-06 21:39   좋아요 2 | URL
근데 이 책은 익숙한 소설 스타일인데 다른 소설 특히 ˝깡패단의 방문˝은 호불호가 매우 갈리는거 같아요^^ 저는 그책도 좋았지만요

오거서 2023-03-06 22:00   좋아요 2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scott 2023-03-07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이런 시대물 좋아합니다
제니퍼 이건 능숙한 글쓰기 정점에 올라선것 같아요😊

망고 2023-03-07 13:08   좋아요 1 | URL
맞아요 정말 능숙한 글쓰기! 술술 나오는 이야기에 문장도 참 좋더라고요!

2023-04-07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07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