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바턴과 윌리엄은 대학에서 만나 결혼했고 딸 둘을 두었다. 윌리엄은 결혼 생활 내내 여러명의 불륜 상대가 있었고 루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윌리엄은 대학 시절부터 부부의 친구인 여자와도 바람을 피웠다. 윌리엄은 정말 최악의 남편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도 루시는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그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이 불륜상대 때문에 자신을 버릴까봐 두려워서 서럽게 울며 남편을 붙잡고는 제발 나를 떠나지 말라고 사정하기 까지 했다.

젊은 시절 루시 바턴은 그랬다. 자신이 남편을 버려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버려질까봐 울며 매달리던 사람이었다.


루시에게는 너무너무 가난해서 춥고 배가 고팠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부모님은 아이들을 학대하다시피 훈육 했고 학교에서는 더럽고 냄새난다고 놀림의 대상이 되었던 성장기. 그것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이런 루시가 대학에 가서 사랑에 빠지게 된 윌리엄은 여유 있는 집안에서 사랑 받고 자란 외동아들로 루시와는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이었지만 루시를 편안하게 해 주던 사람이기도 했다. 너무 가난해서 집에 TV가 없었기 때문에 대중문화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들을 하나도 몰랐던 루시에게 윌리엄은 다정한 안내자 역할도 해주었다. TV도 같이 봐주고 동화책도 읽어주고 비행기도 태워주고 어머니 집에 데리고 가주기도 하면서 윌리엄은 루시에게 세상을 보여주었다

윌리엄 전에 만났던 남자는 루시의 촌스러운 패션을 지적하거나 가난한 집에서 자란 것을 신기해하며 루시를 기분 나쁘게 하곤 했다. 하지만 윌리엄은 루시에게 차근차근 가르쳐주며 함께 손을 잡고 길잡이를 해주는 사람이었다.

루시는 윌리엄과의 관계를 헨젤과 그레텔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윌리엄은 헨젤이고 루시는 그레텔이라고. 둘다 어린아이고 숲속에서 길을 잃어 빵조각을 찾으며 나아가야 하지만 그레텔은 헨젤이 있어서 안전하다고 느낀다고.

그래서 루시는 윌리엄에게 남들에게는 절대 하지 못 할 어린 시절의 깊숙한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을 수 있었고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 하지만 윌리엄 앞에서는 어린아이같이 엉엉 울어버릴 수도 있었다. 윌리엄과 살던 집은 진정한 집이라고 느끼는 유일한 집이었다고 하고 나중에 재혼한 남편과 살던 집은 진정한 의미의 집이라 부르지 못 했다고도 한다.

 

이토록 루시 바턴에게 윌리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루시는 윌리엄을 떠난다. 아이들이 다 대학을 가게 되고 결혼 생활도 20년쯤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루시가 떠날 수 있었던 건 자신이 소설가가 되면서 드디어 독립할 용기가 생겼기도 했고 그 당시 루시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윌리엄과 이혼 후에도 루시는 계속 그와 친구로 지낸다.

루시의 현재 나이 64, 윌리엄은 71살이다. 그러니까 루시와 윌리엄은 40년 이상을 알고 지내온 셈이다. 부부로 20, 친구로 20년을 함께하는 관계란 어떤 걸까? 소설을 읽는 입장의 나로서는 이런 관계가 과연 현실에 있을 수 있을까 싶어서 좀 놀라웠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루시라면 이런 관계를 지속할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루시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마음 한 구석에 외로움과 우울함을 조용히 쌓아놓고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꽤 자주 현실 속에서 남들에게 자신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에 휩싸인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이런 자신을 보고서 비웃고 있다는 부끄러운 감정도 동시에 든다고 한다. 이 느낌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루시는 그런 느낌이 두렵다. 이런 루시의 감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윌리엄이다. ‘루시 또다시 그런 느낌이 드는 거야?’ 하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 이 세상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전남편 윌리엄인 것이다. 이런 관계는 외로움이 마음속에서 두려움이 되곤 하는 루시에겐 참 소중했을 것이다. 그래서 윌리엄은 루시의 누구보다 가장 친밀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윌리엄에 대한 감정을 이야기 할 때 루시는 윌리엄한테는 권위가 있다고 말한다. 울타리 같은 든든함을 권위라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느꼈는데, 앞서 말했던 그레텔의 손을 잡고 길을 찾아가는 헨젤과 같은 느낌을 루시는 내내 윌리엄에게 투영한다.

그래서 루시가 재혼한 남편이 병에 걸렸을 때,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전화한 사람은 윌리엄이었다. 루시의 전화를 받고 윌리엄은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여러 복잡한 문제들을 처리해 준다.

결혼 생활 중 시어머니 캐서린이 죽어갈 때도 윌리엄은 감정적이었던 루시와 달리 이성적으로 다가올 캐서린의 죽음 이후의 문제를 처리해 나갔다.

이러한 윌리엄의 모습들에 루시는 마음속에 그 권위에 대한 확신을 단단히 쌓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윌리엄에게 몇 가지 충격적인 일이 닥치면서 루시가 알고 있던 윌리엄이라는 이미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 균열은 그전부터 생겨오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윌리엄이 점점 늙어 가는 게 보였을 무렵, 윌리엄의 등이 예전처럼 꼿꼿하게 서 있지 않다고 느꼈을 때 루시는 윌리엄을 보며 마음 아파한다. “오 윌리엄!”을 삼키며.

윌리엄이 겪은 가장 충격적인 일은 최근 자신에게 이부 누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70살이 될 때 까지 까맣게 모르던 일이었다. 거기에 현재 윌리엄의 세 번째 결혼까지 파탄이 난 상태라 그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윌리엄에게도 루시는 가장 친한 친구이고 어머니 캐서린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루시의 존재가 위안이 된다. 그래서 윌리엄은 어머니에 대한 진실과 누나를 확인해 보기 위한 여행에 함께하자고 루시에게 부탁한다.

 

루시와 윌리엄은 죽이 맞아 웃기도 하고 투닥투닥 싸우기도 하면서 여행을 한다. 여행 하는 모습이 꼭 오래된 부부 같기도 했다. 이제는 배고픈 걸 참지 못 하는 노년의 루시 바턴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재밌는 부분이기도 했고.

아무튼 여행에서 윌리엄은 누나가 아주 잘 살고 있으며 윌리엄과는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게다가 어머니가 자랐던 집도 가서 보게 되는데 그 집이 너무 작고 형편없어서 충격을 먹는다. 이건 루시도 마찬가지였다. 루시가 자랐던 집보다도 더 작고 가난해 보이던 집이었던 것이다.

루시가 보기에 늘 우아하고 사랑스럽고 상류층 사람처럼 보였던 시어머니 캐서린. 캐서린은 한번도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윌리엄도 루시도 캐서린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캐서린이 자신의 친구들에게 루시를 소개할 때는 늘 이렇게 말했다. “Lucy comes from nothing”(루시는 출신이랄 것이 없어)

루시에게 캐서린의 취향대로 옷을 사주고 골프를 배우도록 종용하고 루시를 고급스러운 휴양지에 데리고 가주기도 했던 캐서린은 정말로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윌리엄은 이제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모두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여행은 끝난다.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에 윌리엄은 풀이 팍 죽어 있다. 급기야 그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까지 보게 된 루시는 다시 한번 오 윌리엄!”을 삼킨다.

그러니까 루시는 윌리엄의 길이가 맞지 않은 짧은 바지를 볼 때도, 매치되지 않는 색깔의 양말을 볼 때도, 커다랗고 황량한 아파트에 윌리엄 혼자 있는 모습을 볼 때도  윌리엄!을 삼켰다. 요즘 따라 윌리엄의 모습에 루시는 자꾸만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 한동안 뜸했다가 다시 만난 윌리엄은 루시에게 또 다르게 다가온다.

그의 얼굴에서 권위가 사라졌음을 보게 된 것이다. 루시를 안전하게 느끼게 해 주었던 그 헨젤의 모습이 윌리엄에게서 사라졌다.

단단하기만 할 것 같은 윌리엄이 슬퍼하는 모습을 봐서일까? 그도 한낱 늙어가는 외로운 인간이라는 연민이 자아낸 결과일까?

아니 어쩌면 캐서린이 살아 있을 때 루시도 윌리엄도 캐서린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던 것처럼 아마도 루시는 윌리엄을 알지 못 한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아주 작은 일부만 알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어쩌면 변한 건 루시일지도 모른다. 한때는 헨젤에게서 안전함을 느꼈던 그레텔이 다 커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오히려 윌리엄이 루시의 존재로 인해 위로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 윌리엄!”은 루시의 성장을 이야기 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서서히 극복해 가는 과정, 윌리엄에게서 안전함을 느끼다가 이제는 윌리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과정을 통해서 말이다.

젊은 시절 윌리엄의 다리를 붙잡고 제발 나를 떠나지 말라고 울며 매달리던 루시와 현재의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모습의 루시를 비교해 보면 그녀의 성장이 확 와 닿는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에서부터 봐온 루시가 이제는 덜 외롭고 덜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며 오 윌리엄!”을 덮는다. 이제 나는 루시 바턴을 두 딸과 함께 백화점에서 수다를 떨며 쇼핑하는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다. 행복해 하는 모습으로 노년의 루시 바턴을 그려볼 수 있어서 정말 안심이 된다.

 

 

짤막한 현재의 일화들에 의식의 흐름처럼 끼어드는 회상들이 이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데, 시간과 시간 사이에 구멍이 숭숭 뚫려 여백이 많지만 부족하단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루시 바턴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그 진액만 쭉 짜 놓은 거 같은 느낌이다. 문장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이전 소설보다 더 간결하다. 하지만 그런 간결함에 정말 많은 감정을 담고 있어서 짧은 문장 하나하나가 감동으로 다가온다.

오 엘리자베스! 작가님 글이 너무 좋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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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22 14: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망고님에 따끈 따끈한 오! 윌리엄 리뷰!! 넘 ㅎ 좋습니다 !^^

망고 2021-12-22 14:54   좋아요 1 | URL
(_(
(„• ֊ •„)
O☕️O

감사합니당~ 커피드세요 스콧님ㅎㅎ

다락방 2021-12-22 1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망고님은 이 책을 벌써 읽으셨군요. 저는 번역본 출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윌리암이 그 윌리암이로군요. 루시 바턴의 연작이네요. 저도 얼른 읽고 싶어요.

망고 2021-12-22 16:26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번역본 나오기전에 충분히 읽으실 수 있을거 같은데요 정말 문장이 간단하고 분량이 짧은데 단어도 어렵지 않아요 도전해 보시길 추천해요

다락방 2021-12-22 16:41   좋아요 0 | URL
아아 제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망고님 🥺

망고 2021-12-22 16:49   좋아요 1 | URL
일단 시작해 보셔요 화이팅😄